김정은 백두혈통 처음부터 조작… 가족·주민 1천여명 사살한 '인간도살자'를 흠모한다고?
  • 평양정상회담에 따라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의 서울 답방이 약속돼 있는 가운데  김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환영하며 그를 칭송‧미화‧옹호‧흠모‧지지하는 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지난 7일 서울의 광화문 광장에서 발족한 ‘백두칭송위원회’를 시작으로 ‘서울시민환영단’, '위인맞이환영단', '백두수호대', '김정은 국무위원장 서울방문‧남북정상회담 환영 청년학생위원회(청년학생위원회)', ‘김정은 국무위원장 서울방문 강북구 환영위원회’ 등 28일 현재 확인 된 것만 해도 6개에 달한다. 

    단체 가운데 ‘백두칭송위원회’는 국민주권연대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등 종북좌파 13개 단체로 구성돼 있으며 청년학생위원회는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서울대학생겨레하나 등 106개 학생청년단체로 구성된 연합체의 성격을 지닌다.

  • 20-30대의 젊은이들이 주축인 이 들 단체는 김정은에 호감을 보이면서 김위원장이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겸손하고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많고 결단력이 있으며  배짱 좋고 실력 있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부 단체 소속원들은 발족식 때  “공산당이 좋아요”를 연호했다.

    특히 백두칭송위원회는 블로그에  한 친북 인터넷 매체의 기사를 인용, ‘김정은의 풍모’를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품 △여성을 위한 세심함 △다심한 정 △유연성 △주민에 대한 헌신성 △충복(忠僕) 인민관 등으로 소개했다. 블로그는 이와 함께 “정이 많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기에 남녘에서도 진심과 정을 다한다면 남북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김정은 위원장의 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갈수록 엄청난 지도자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들 단체가 김정은을 칭송하며 즐겨쓰는 말은 ‘백두(白頭)’이다 북한에서 ‘백두’라는 단어는  사람에 적용할 때 김일성 직계 가족을 일컫는 ‘백두혈통(白頭血統)’의 준말이다.  김일성과 그의 부인 김정숙이 백두산에 밀영(密營)을 설치하고 항일운동을 할 때 김정일이 장차 조선의 통일을 이룩할 ‘백두산의 아들’로 태어났다며 그 직계에 붙여진 이름이며, 김일성 왕조의 신격화를 위해 사용하는 용어다. 이러한 백두혈통은 현재 북한의 교과서와 역사서를 비롯한 모든 문헌과 보도선전물에 사실인 것처럼 기록돼 있다. 심지어 북한의 교과서들은 김정일 스스로 “백두산은 나의 고향입니다”라고 말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 ◆백두혈통은 처음부터 조작된 것

    하지만 백두혈통은 완전한 조작으로 가짜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무대는 백두산 밀영이 아니라 동만(東滿: 당시 북간도(北間島)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러시아명 프리모르스키: Primorskii) 일대이다. 또한 김정일은 백두산 아닌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김정은은 백두산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우리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백두혈통이라 부르면 무엇보다 날조된 거짓을 용인하는 것이 된다. 

    북한이 혁명의 성지(聖地)라 부르는 백두산 밀영은 처음부터 없었다. 김일성대학총장을 지냈고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 북한 전 노동당 비서는 회고록에서 백두밀영은 처음부터 없었고 훗날  조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황 전 비서는 김일성은 1940년 말 러시아의 연해주로 피신해 1945년 해방될 때 까지 그 곳에 있었는 데 어떻게 해서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황 전비서는 “김일성이 1986년 항일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김정일이 태어난 백두산의 밀영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백두산 일대를 뒤졌지만 애초에 없던 밀영지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김일성이 직접 나서 경치도 적당하고 위치도 그럴듯한 곳을 찾아내 1987년 ‘여기가 밀영지였다’고 지적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이름 짖고 성역화했다. 당 역사연구소는 구호나무도 준비하고 큰 바위에다 ‘정일봉’이라고 써서 산 정상에 올려붙였다. 그리고 예술인들은 ‘정일봉’이라는 노래를 지었다”고 말했다(황장엽 회고록-‘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서울: 한울, 1998, p. 245.) 

    김일성 본인이 작성한 유일한 수기에도 그가 백두산에 밀영을 두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며 일본군에 대항했다거나, ‘보천보 전투’를 지휘했다거나,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전무하다. 1942년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작성한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란 제목의 이 자필수기는 동북항일연군 시절 상관이었던 저우바오중(周保中)의 지시에 따라  동만에서의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중국어로 기록한 것이다. 이 수기는 엄청난 조작과 날조, 미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는 달리 아무런 미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그의 솔직한 생 얼굴을 자필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투쟁 목적이 조선독립운동에 있었다는 그 어떤 근거도 나와 있지 않다. 그냥 중국 공산당원의 일원으로 중국인들 틈에 끼어 일제에 빼앗긴 만주 영토 회복을 위해 일만군(日滿軍)에 대항했을 뿐이라고 적고있다.

    실제 백두산 동남쪽에 김일성과 부인 김정숙이 항일투쟁을 함께하며  생활했다는 밀영이 유지되었다는 주장은 1980년대 중반까지의 북한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최초로 서술한 탁진 등의 저서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이 출간된 것은 1984년이다.

  • ◆김정일 출생지는 러시아 연해주

    김정일은 백두산이 아니라 하바로프스크 시(市)와 가까운 소련 극동지역인 연해주 라즈돌노예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본 관동군과 만주군의 공식문서, 그리고 옛 소련정부 기록과 당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김일성이 일본 관동군의 토벌을 피해 도망가 있던 소련 연해주의 우수리스크(Ussuriysk, 雙城子)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작은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Hamatan, 오늘날 지명: 라즈돌노예 Razdolnoye)란 마을의 남야영(南野營)에서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 

    김정일이 러시아에서 태어났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출생 당시 현지 조산원과 유모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정일이 태어날 당시 탯줄을 자르고 아기를 받았던 러시아인 조산원 엘냐, 그리고 김정숙이 젖이 모자라 김정일에게 젖을 먹였던 조선인 유모 이재덕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라즈돌노예 마을길 88번지 연립주택인 것으로 확인 되고 있다. 

    김정일의 출생당시 러시아어 이름이 ‘유라 김(Yura Kim)’이었고 이런 이름이 유치원 소학교 초급중학교를 거쳐 그가 1960년 7월 평양의 남산고급중학교(한국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적부에 등재돼 있었다는 점도 출생지가 백두산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에 있어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당위성의 근거가 되며, 항일투쟁 중에서도 백두산에 유격 근거지(밀영)를 두고 승리를 거뒀다는 보천보전투는 ‘백두혈통’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핵심적 요소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조선의 해방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1920년대는 10대의 나이로 백두산이 아닌 동만(東滿) 일대에서 약탈과 살인·방화를 일삼는 불량배 무리 ‘마골단(馬骨團)’을 따라 다녔고, 1930년대는 중국 공산당을 위해 ‘비적항일운동(匪賊抗日運動)’, 그리고 1940년대는 소련을 위해 대일(對日)첩보활동을 했다. 그 무대는 백두산 밀영이 아니다. 그가 창설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령부가 1936년부터 1945년 해방때 까지 백두산 밀영에 존속했다는 것은 새까만 거짓말이다. 백두산에 밀영이라는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실체가 없는 조작해낸 군대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1937년 6월 4일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지휘했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백두혈통’이라는 용어는 날조된 ‘백두산=김정일’이란 프로파간다를 김정은에게 대입시키기 위한 시대착오적이고 유치한 봉건적 조작으로서, “김정일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만큼 아들 김정은도 혈통 자체가 우월하다”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백두혈통’이라는 말을 쓰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북한의 주장이 사실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백두혈통으로는 김정은, 김정철(김정은의 친형), 김여정(김정은의 친 여동생), 김한솔(김정은의 이복형으로 독살된 김정남의 아들), 김경희(김정은의 고모로 처형된 장성택의 처) 등이 해당된다. 

    북한은 김정은의 우상화 선전 일환으로 그의 생모 고용희(2004년 사망)에 대한 우상화 작업도 재개했다. 북한은 2001년 초부터 고용희를 ‘존경하는 어머님’으로 찬양해 오다가 2004년 고용희가 사망한 이후 중단한 바 있는데 김정은의 집권과 함께 다시 권력기관들을 중심으로 고용희를 ‘평양 어머님’으로 호칭하면서 ‘우리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 등 찬양 노래들을 보급하고 있다. 김정은 우상화에는 생모 고용희가 재일교포 무용수에 김정일의 기쁨조 출신이며, 고용희의 부친인 고경택은 제주 사람으로 일제 때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군복공장의 간부, 즉 친일파로 일했다는 걸림돌도 존재한다. 북한 주민들에게 ‘째포’(재일교포를 줄여 비하하는 표현)라고 멸시받던 계층인데다 ‘남조선’에 뿌리를 뒀다는 건 가계 우상화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 ◆김정은은 3세때 사격 시작한 명사수? 

    그러면 북한은 전체주의 독재 인권탄압 3대 세습의 주인공 김정은을 국내외에 어떻게 칭송, 미화하고 있는가. 

     북한이 노동당 중앙당 간부와 당원 및 각급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김정은 선전자료 ‘청년대장 김정은 동지에 대한 위대성자료(위대성 자료)’에는 김정일이 해외에서 2년간 유학하면서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숙달했고, 요즘은 중국어와 일본어 러시아어도 학습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세 살 때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한자(漢字) 간체자로 지은 ‘광명성 찬가’를 한자 정자로 척척 써내려 갔다는 내용도 있다. 또한 세 살때 할아버지 이후 전수돼온 권총 한 자루를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물려받고 사격에서 백발백중의 솜씨를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2009년 작성된 후 현재도 각급 학교 교사들의 교수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 위대성 자료에는 “청년대장 동지는 이미 3세 때부터 총을 잡고 명중사격을 하시였다”고 적혀 있다. 자료에 따르면 김정은은 2009년 5월 자동소총 사격을 했는데 1초 당 3발씩 쏘며 100m 밖에 매달아 놓은 전등알들과 그 뒤에 매달아 놓은 병들을 다 한 번에 맞혔다. 또 표적지에 총을 20발 쏴 모두 10점짜리 동그라미 안에 명중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은이 해외에서 2년간 유학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는 1991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9년간 스위스에 유학했다. 또한 사격 전문가들에 따르면 단발로 쏴서 100m 밖 전등알을 맞히거나 20발을 쏴 모두 10점짜리 동그라미에 맞히는 것도 가능하지만 자동소총으로 1초간 3발을 점사로 쏴 전등 3개를 맞히는 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위대성 자료’에는 김정은이 2008년 사리원 협동농장을 방문해 즉석에서 미생물 비료를 고안해 이듬해 이 농장에서 정보당 15t의 벼를 수확케함으로써 북한 농업연구사들을 깜작 놀라게 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한편 김정은 집권 4년차인 2014년 북한의 고급중학교(고등학교 과정) 학생들에게 김정은의 ‘위대성’을 깊이 체득시키기 위하여 평양의 교육도서출판사가 출간한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 혁명활동 교수참고서’에 따르면 “김정은 원수님은 일찍이 10대에 보통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서 정치와 경제는 물론 철학, 력사(역사)와 같은 사회과학과 수학,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 그리고 군사와 외교 등 모든 부문에 정통하시고 폭넓고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계시였다. 3살 때 총을 쏘았고, 9세 때는 3초 내에 10발의 총탄을 쏘아 목표를 다 명중시키며 100% 통구멍을 냈다. 사격선수들도 명중사격과 속도사격에서 원수님을 따르지 못한다. 3살 때부터 운전을 시작해 8살도 되기 전엔 굽이와 경사지가 많은 비포장도로를 몰고 질주했다. 또 초고속 보트를 시속 200㎞로 몰아 외국 보트회사 시험운전사를 두 번이나 이겼다.”고 기술돼 있다.

  • ‘인류가 낳은 걸출한 영도자, 현 세기를 이끌 찬란한 태양’ 

    북한 관영매체들은 김정은이 16살 때에 김일성의 영군술(領軍術)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다면서 지략도 뛰어나고 군사전법에 밝으며 다재다능한 천재 중의 천재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김정은을 우상화 한 영화에 ‘백두의 선군혁명 위업을 계승하시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가 있다. 이 영화에 따르면 김정은이 백마를 타는 모습으로 시작해 6.25때 맨먼저 서울에 진입한 탱크부대인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탱크사단’을 방문해 직접 탱크를 타보고 있는 모습 등 군부대 시찰 내용이 중점적으로 소개됐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비공식 내정된 2009년 1월 이후 촬영한 영상들을 편집한 것들이었다. 김정은은 2009년 4월 5일 장거리로켓 ‘광명성 2호’ 발사 당일 김정일과 함께 관제지휘소를 찾아 “적들이 요격으로 나오면 진짜 전쟁을 하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고 이 영화는 소개했다.

    영화는 김정은이 탱크외에도 전투기와 군함에 탑승한 장면과 북한제 자동소총을 만져보는 모습 등도 공개했다. 영화는 또 김정은을 ‘백두산 장군’ ‘천재 중의 천재’라고 치켜세우면서 “김일성군사종합대에서 하루 3, 4시간만 자면서 공부했다”고 주장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의 103회 생일이 되는 2014년 4월 15일 김정은을 ‘경애하는 원수님’,  ‘불세출의 위인’, ‘인류가 낳은 가장 걸출한 영도자’, ‘현 세기를 이끄실 찬란한 태양’ 등으로 칭송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된 날이 2012년 4월 13일이었음을 언급하면서 “새로운 주체 100년대의 지나온 700여일은 또 한분의 불세출의 위인에 대한 열화같은 흠모열기, 김정은 열풍이 온 세계를 휩쓴 환희와 격동의 날과 달들이었다”며 그같은 표현들을 사용했다. 

    북한은 김일성이 1912년 4월 15일 세상을 밝게 비추는 ‘태양’(太陽)으로 세상에 왔다하여 그날을 태양절이라 명명했고, 아들 김정일도 30년 후인 1942년 2월 16일 세상을 비추는 ‘광명성’(光明星)으로 백두산에서 태어났다하여 이날은 백두광명성절(白頭光明星節)로 부른다.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密營)에서 태어날 당시 하늘에서 크고 아름다운 별 하나가 떴으며, 이에 김일성과 함께하던 항일 유격부대 대원들이 갓 태어난 김정일에게 ‘김일성의 뒤를 이어 민족의 향도성(북한말로 ‘앞길을 이끌어주는 별’이라는 의미)이 되어주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김정일을 ’백두광명성‘이라고 칭송한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북한의 문헌들과 보도선전물들은 예수가 빛으로 세상에 왔지만 ‘참 빛’은 예수가 아니라 김일성(태양)과 김정일(광명성)이라고 선전한다. 북한은 1942년에 출생했다는 김정일 보다 42년 뒤인 1984년 1월 8일 태어났다는 김정은에 대해서도 ‘찬란한 태양’으로 표현, 백두산 정기를 받았다는 김정일 이후로 이어지는 ‘김씨왕국(Kim Dynasty)의 성골 혈통’임을 강조한다.  즉 ‘백두혈통’이 김정은에 그대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에서 하루 3, 4시간만 자면서 공부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탈북자들은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적(籍)만 두었을 뿐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면서 “북한은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정되자 갑자기 생활자료를 찾는다고 법석을 떨며 교직원들이 자료를 조작해냈다”고 증언했다.  북한은 김정은이 과거에 방문했던 시설물들을 일일이 찾아내 사적물로 등록한다며 실태조사를 하는가 하면 각 지방당별로 몇 건 이상씩 주요시설을 방문한 것으로 날조해 올리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컨대 김정은이 2009 4월 원산농대를 방문한 이후 교정에는 ‘청년대장이 다녀간 곳’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됐으며, 원산농대 학장이 김정은을 면담하고 미사여구를 사용해 찬양하는 내용을 녹음, 전 주민이 청취토록 한 바 있다. 녹음한 내용에 따르면 원산농대 학장은 “만경대 가문의 혈통, 백두의 혈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김정은은 비상한 탐구력과 여러 분야의 해박한 지식, 유능한 군사 지휘능력, 담력과 배짱을 지닌 군사의 영재”라며 김정은을 한껏 띄우고 있다.  
    북한의 대남선동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도 ‘세계를 휩쓴 김정은 열풍’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외국 언론들이 김정은을 세계에서 가장 젊고 매력있는 령도자, 현대정치가로서의 모든 자질과 품격을 완벽히 갖춘 령도자, 력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커다란 관심을 끈 가장 젊은 지도자라고 보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민족끼리’는 김정은이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된 이틀 후인 그해 4월 15일 김일성 출생 100주년 경축 열병식에서 한 첫 공개연설은 현지에 있던 약 200명의 외신기자들에 의해 온 우주에 전파됐으며, 단 며칠만에 1만 2천여 개의 출판보도물을 통해 “조선에서 김정은 시대가 닻을 올렸다” 등의 제목으로 전해져 수 억명의 인구가 시청했다고 말했다.
  •  <김정은 선전노래 ‘발걸음’>

    1. 척척척 척척 발걸음 우리 김대장 발걸음 
    2월의 정기 뿌리며 앞으로 척척척 
    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한번 구르면 
    온 나라 강산이 반기여 척척척 

    2. 척척척 척척 발걸음 우리 김대장 발걸음 
    2월의 기상 떨치며 앞으로 척척척 
    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한번 구르면 
    온 나라 인민이 따라서 척척척 

    3. 척척척 척척 발걸음 우리 김대장 발걸음 
    2월의 위업 받들어 앞으로 척척척 
    발걸음 발걸음 더 높이 울려퍼져라 
    찬란한 미래를 앞당겨 척척척 

    ‘우리민족끼리’는 이어 “경애하는 원수님의 강령적인 연설에 접한 세계는 놀라움과 경탄, 기쁨과 환희로 설레였다” 면서 “온 누리를 진감시키는 김정은 위인칭송의 목소리는 김일성, 김정일 조선의 강성번영과 더불어 세세년년 끝없이 울려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은 김정은 우상화를 위해 2014년 ‘혁명일화집’이란 책자를 만들어 각급 학교에서 교양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이 혁명일화집은 220쪽 분량으로 김정은을 초인적 능력과 고결한 인품을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다.

    1-2장은 김정은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간의 일화, 3장은 김정은이 어릴 때부터 얼마나 많은 재능이 있었고 뛰어났는지, 4장은 외국에서 김정은이 어떻게 평가되는지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혁명일화집은 김정은이 어린이를 매우 사랑하고 있으며 군사적 지식은 어릴 때부터 전문가를 가르칠 정도로 뛰어났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북한 전역에 건립 중인 김일성⦁김정일 동상은 간부들과 인민들의 한결같은 염원 때문이라는 설명도 담았다.

    ◆스위스 유학 때 국내서 주먹밥으로 끼니 때웠다고 거짓말

    북한은 김정은이 소위 ‘고난의 행군’시기(1995-2000년) 매일 줴기밥(주먹밥)과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인민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이 시기 그는 스위스에서 호화로운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정은의 등장과 함께 새로 개설된 북한의 고급중학교(남한의 고등학교) 학과목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 혁명활동’의 학습지도를 위한 교수참고서(2014년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발행)는 “경애하는 원수님(김정은)이 고난의 행군시기 풋강냉이 한 이삭으로 끼니를 에울(때울) 때도 있었으며 거의 매일과 같이 줴기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 북한 노동신문도 2013년 김정은의 생일을 하루 앞둔 1월 7일 김정은이 스위스 유학중이던 1990년대 중·후반에 “주먹밥과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선전하는 등 김정은 우상화를 위해 거짓말들을 쏟아냈다.노동신문은 이날 ‘우리가 사는 시대’란 제목의 200자 원고지 44매 분량의 기사에서 “고난의 행군 시기 나는 호의호식하지 않았다...중략... 풋강냉이 한 이삭으로 끼니를 에울 때도 있었으며 거의 매일 줴기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웠다”는 김정은의 발언을 소개했다.

    그러나 200만-300만명의 아사자를 낸 고난의 행군 시기(1995-2000년)에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한 학기에 약 3천만원 가까운 학비를 내며 호화 유학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난의 행군이란 김일성 사망한 1990년대 중ㆍ후반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체제 붕괴에 따른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북한이 경제적으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은 시기를 말한다. 원래 고난의 행군이란 말은 1938년 말-1939년 김일성의 항일빨치산이 만주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100여 일간 행군한 데서 유래했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정신’은 북한이 김일성 사망(1994년 7월 8일)과 뒤이은 자연재해 및 경제난 심화 등에 따른 체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대중 노력동원 캠페인이다. 이는 김일성이 “일제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광복을 이루었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주민들이 현재의 난관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고 김정일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시련을 극복하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이룩하자는 것이다.

    이 용어는 1996년도 당ㆍ군ㆍ청년보의 공동사설에서 <백두밀림에서 창조된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싸워 나가자>라는 구호를 최초로 제시함으로써 생겨났으며, 이후 ‘고난의 강행군’(1997년), ‘최후승리 위한 고난의 강행군’(1998년) 등으로 점차 강조되어 오면서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동참여와 혁명열기를 재점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북한은 1999년 이후에도 경제난이 계속 악화됨에 따라 ‘고난의 행군’ 캠페인을 연장해 오다가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경제난이 다소 완화됨에 따라 2000년 10월 당 창건 55주년을 기해 “우리 군대와 인민은 최근년간 고난의 행군의 어려운 시련을 이겨냈다”고 주장함으써 ‘고난의 행군’의 종료를 공식 선언한다.

    김정은의 외국유학에 대해 북한은 입을 다물고 있으나 스위스의 프랑스어 일간신문 ‘르 마탱 디망슈(Le Matin Dimanche)’는 2012년 4월 1일자에서 북한의 김정은 제1비서가 소년시절 스위스에 체재했던 기간은 종전에 주장된 1998-2001년이 아닌 1991-2001년이며 이는 스위스 경찰의 공식문서를 통해 확인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김정은이 7살 때인 지난 1991년 11월 제네바 유엔대표부에 근무하던 북한 외무성 관리 박남철의 아들 2명 가운데 1명인 ‘박은’ 이란 가명으로 스위스에 입국해 9년간 머문 뒤 2001년 초 평양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초기에는 베른국제학교를 다니며 어학을 공부한 뒤 1990년대 중반부터 리베펠트-슈타인 휠츨리 공립학교에서 ‘박은’이란 가명으로 초중등과정을 공부한 것으로 돼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은이 스위스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국내에 있으면서 줴기밥과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인민들과 고락을 같이했다는 거짓주장을 가르쳐야 하는 데 대해 큰 부담을 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처럼 실력 부족으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0년 11월 24일 영국 일간지 더 선(The Sun)은 김정은이 스위스 유학시절 공부를 잘 못해 같은 반 학생들이 ‘김(Kim)’ 대신 ‘띨띨하다’ ‘둔하다’는 뜻의 ‘딤(dim)’을 붙여 ‘딤정은’으로 부를 정도였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김정은은 스위스 최고 국제학교에서 교육에 많은 돈을 쏟아부었지만, 클라스의 낙제생이었다. 중등교육 검정시험 자격증에 해당하는 것조차 따지 못했다. 결국 15세 때 베른국제학교에서 공립인 리베팰트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금세 열등한 학생층으로 떨어졌다. 옆자리에 앉았던 포르투갈 외교관의 아들 조앙 미카엘루는 “김정은과 내가 반에서 가장 둔한 학생(the dimmest student)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2군에 속했다. 김정은은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독일어를 잘하지 못했다. 또 문제를 내고 대답을 하라고 하면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곤 했다”고 말했다.

    2년 뒤 2012년 4월 1일 르 마탱 디망슈도 김정은이 1990년대 스위스에서 2년간 다닌 국제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익명의 소식통들을 인용해 김정은이 스위스 베른국제학교 시절 첫해에 75일, 두 번째 해엔 105일을 결석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당시 김정은과 같은 반 학생이었다는 사람은 그가 오후에 학교에 나온 적이 많았고 성적도 좋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들이 말한 바로는 당시 ‘박운’이란 가명을 쓴 김정은의 자연과학 성적은 6등급 가운데 3.5등급이었다. 또 수학·문화·사회·독일어 등에서 과락을 겨우 넘는 성적이었고, 영어는 처음 고급반에 들어갔다가 보통 반으로 재배치됐고 과락을 겨우 넘겼다. 반면 음악과 기술은 최고 등급인 6등급 바로 밑의 5등급이었다.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 후 2002년에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입학, 2007년 졸업했다.

    ◆집권 7년간 고모부 등 주민 1천여명 총살 

    그러면 김정은은 어떤 사람인가? 고모부 장성택을 고사총과 화염방사기로 살해해 살점 하나 남기지않고 공중분해시켰고, 이복 형 김정남을 외국의 공항에서 독극물 테러로 독살시킨 장본인이다. 아버지 김정일 사망(2011년 11월 17일)과 함께 유일독재체제의 권자에 올라 7년간 군-내각의 고위 인사 100여명을 소위 ‘불충(不忠)’이란 멍에를 씌어 총살 등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 자가 김정은이다. 김정은이 회의에서 졸았다는 이유 등으로 처형한 군과 내각의 간부만도 수십 명에 달한다. 장성택이 처형된 표면상의 이유도 김정은이 연설할 때 졸고 박수를 건성건성 쳤다는 데 있다. 

    탈북자들의 미 의회 증언 등에 따르면 김정은 집권 기간 중 일반 주민 1천여명도 총살로 죽어갔다. 탈북자들은 김정은 정권이 ‘반혁명분자’로 찍힌 북한의 고위층 간부들의 경우 고사총으로 쏜 뒤 탱크로 시신을 뭉개거나 화염방사기로 태워 없애는 등 전례 없이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증언에 따르면 차수 계급의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은 혁명화 교육을 받던 중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교육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가 총살당했다. 한때 북한군 서열 1위로 거론됐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주석단에 앉아서 졸다가, 김용진 부총리는 단상 아래로 안경을 닦다가 총살 당했다. 장성택의 최 측근으로 오른팔 격인 리용하 노동당 행정부 제1부부장과 왼팔 격인 장수길 당 행정부 부부장도 총살됐다. 

    리룡하와 장수길의 처형 현장에 참석했던 인민무력부 관계자 증언을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상황”이었다. 리룡하와 장수길은 처형 전 심하게 구타당한 뒤 단상에 끌려 나왔고, 그들 앞에는 고사총 8문에 1천여발의 총탄이 장전돼 있었다. 이후 사격명령이 떨어지자 ‘따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4초 동안 총탄이 발사됐고, 사람의 형체는 아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고사총은 김정일 사망 애도 기간에 술을 마신 일부 군 간부들을 처형할 때 처음 사용했다. 고사총은 옛 소련이 개발한 구경 14.5mm ZPU 중기관총으로, 주로 포신 4개를 결합해 지상이나 해상에서 공중 목표물을 격추하기 위해 만든 대공화기다. 대공화기와 탱크, 화염방사기를 사람 처형하는 데 사용하는 나라는 아마 북한이 유일할 것이다. 

    지금 북한  주민 전체는 김씨 왕조의 노예이며 그 중 10만-15만명은 수용소에서 짐승 취급을 당하고 있다. 그런 자가 어느새 한국에서 평화와 화해의 친근한 지도자 이미지로 탈바꿈된 것이다.
  • 김정은도 김일성,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여성들과 은밀한 사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17일 대북소식통을 인용, “김정은이 집권 초반에는 초대소나 별장 등을 별로 이용하지 않았지만 2014년 다리 이상과 발목 수술 이후엔 초대소·별장 등지에서 휴양하는 일이 잦다”며 “김정은이 자주 찾는 초대소와 별장 등지에는 키 170cm 이상 미모의 여성들이 근무하고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 생존 시 활동했던 기쁨조를 모두 해임하고 새로 (기쁨조를) 뽑았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은 첫사랑인 현송월과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판 걸그룹’ 모란봉악단 단장인 현송월은 노동당 국제부장과 노동신문 책임주필을 지낸 현준극의 조카로 김정은 보다 다섯 살이 많다. 연상의 여인인 성혜림과 연인 관계였던 아버지 김정일은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던지 둘 사이를 떼어놓았으나  김정일이 죽고 둘의 관계는 다시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강명도 경민대 교수는 “현송월이 그 나이에 인민군 대좌(대령) 계급을 단 것은 김정은의 총애가 없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의  협상 상대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패륜적인 김정은 집단을 미화·칭송할 수는 없다. 더구나 김정은은 말로는 핵없는 세상을 외치면서도 행동은 핵포기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 인사들은 김정은에 대해 ‘솔직 담백’ ‘예의 바른’ ‘전략적’이란 수식어를 쓰고 ‘북한에 백성 생활을 더 중시하는 지도자가 마침내 출현했다’라고 칭송했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을 계속 추켜세우니 미국 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는 서울 한복판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반미(反美)집회가 열리고 ‘김정은 만세’ ‘미군 떠나라’는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래는 김정은 우상화를 담은 북한 문헌들의 내용을 원문대로 소개한 것이다.   

    10대 때 정치 경제 철학 역사 군사외교 수학 물리학에 정통?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는 일찍이 10대에 보통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서 정치와 경제는 물론 철학, 력사(역사)와 같은 사회과학과 수학,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 그리고 군사와 외교 등 모든 부문에 정통하시고 폭넓고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계시였다. 3살 때 총을 쏘았고, 9세 때는 3초 내에 10발의 총탄을 쏘아 목표를 다 명중시키며 100% 통구멍을 냈다. 사격선수들도 명중사격과 속도사격에서 원수님을 따르지 못한다. 3살 때부터 운전을 시작해 8살도 되기 전엔 굽이와 경사지가 많은 비포장도로를 몰고 질주했다.(출처: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 혁명활동 교수참고서,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주체103(2014)년) 

    ◆ 외국선수와 보트경기에서 시속 200km로 몰아 승리?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영웅남아다운 담력과 배짱, 강의한 의지를 지니고계시였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위대한 대원수님들을 그대로 닮으시여 어린시절부터 영웅남아다운 담력과 배짱, 강의한 의지를 지니고계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대장의 정신과 기질은 백두산의 정기와 기상 그대로입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어린시절부터 만사람을 경탄시키는 수많은 전설같은 일화들을 남기시였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어린시절에 외국의 한 이름있는 기술자와 초고속배운전경기를 진행할 때 영웅남아다운 담력과 배짱, 뛰여난 지력으로 경기에서 이기시였다.
     어느 해인가 초고속배생산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있다고 하는 외국의 한 호사기술자가 우리 나라에 왔었다.
    그 기술자는 회사의 시험운전사 겸 기관전문가로서 초고속배운전기술에서 제노라고 뽐내는 사람이였는데 《마운틴》이라는 배까지 가지고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되신 어리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그와 한번 겨루어보실 결심을 하시고 그날 밤으로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가시였다.
    경애하는 원순님께서는 부두에게 그를 만나 배의 기술적인 문제만 몇가지 물어보시고나서 당신이 《마운틴》운전에서 기술이 높다고 하는데 한번 경기를 해보지 않겠는가고 하시였다.
    초고속배전문가는 몹시 놀라와하면서 이배의 속도가 200km/h나 되는데 그래도 꽤 탈수 있는가, 정 해보겠으면 직선주로에서 해보자고 하는것이였다.
    (학생들에게200km/h는 몇m/s인가를 계산해보도록하고 55.56m/s의 속도로 달리는 초고속배가 얼마나 빠르겠는가를 상상해보도록 한다.)
    어리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직선주로는 배의 성능이나 겨우 판정할수 있지만 진짜 경기로는 못되지 않는가, 2개 대상물을 정해놓고 그것을 돌아오는 방법으로 경기를 하자고 하시면서 그에게 먼저 배를 골라잡으라고 하시였다.
    경기가 시작되자 외국 초고속배기술자는 자기 기술을 믿고 으스대면서 처음에는 속도를 내지 않다가 쾌속으로 번개같이 달리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모습을 보고는 와닥닥 놀라 있는 힘을 다해 따라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경기에서 진 그는 《아니, 이럴수가 있는가.》 고 하면서 다시한번 경기를 하자고 거듭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되였다. 외국기술자는 첫 경기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출발선에서부터 최대의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귀환점에서 그의 약점이 드러났다. 너무 속도를 내다나니 귀환점 선회선에서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 그만 원을 크게 잡고 돌지 않으면 안되였던 것이다. 그이 이런 약점을 미리부터 예견하시였던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여유작작하게 그의 뒤를 물고 따라가다가 귀환점에서 마치 휘거선수가 원을 아름답게 그리듯이 맵시나게 돌아서시여서는 그를 뒤에 떨구고 앞서시였다. 결국 두 번째 경기에서도 외국 초고속배전문가가 졌다. 경기가 끝난 다음 외국전문가는 경애하는 원수님께 배의 기술문제나 운전기술에 완전히 정통하고있는것도 놀랍거니와 어린 아이에 《마운틴》과 같은 초고속배를 가지고 이 배의 운전기술에서 제왕이라고 하는 나와 경기를 하겠다고 한 그 담대한 기질이 신비스럽다고, 보통인물이 아닌 것 같다고 놀라와 하였다. 그러면서 한번 자기 나라에 있는 회사에 와서 다시 경기를 했으면 한다고, 그러면 우리 회사의 명성이 더 높아질것이라고 청을 올리였다.(출처: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 혁명활동 교수참고서,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주체103(2014)년)

    ◆“풋강냉이 한 이삭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있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고난의 행군시기 매일과 같이 줴기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우시며 우리 인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시였다.
    함박눈이 내리던 주체94(2005)년 11월 어느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고난의 행군시기를 추억하여 일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고난의 행군시기 전선시찰의 강행군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는 최고사령관동지(아버지 김정일)를 수행하면서 최고사령관동지의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무한한 헌신성, 숭고한 인민적풍모를 가슴뜨겁게 새겨안게 되였으며 최고사령관동지의 그 강행군길에 나의 발걸음을 맞추어나갔습니다.
    나는 고난의 행군시기 풋강냉이 한이삭으로 끼니를 에울 때도 있었으며 거의 매일과 같이 줴기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웠습니다.
    나는 고난의 행군 전기간 최고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인민들과 함께 있었고 인민들이 겪는 고생을 함께 겪었습니다.
    그러시면서 나는 앞으로도 고난의 행군시기를 영원히 잊을 것 같지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학습지도방법>
    경애하는 원수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수 있는가?
    (2~3명의 학생들을 지명하여 대답하게 한 다음)
    강조할 내용: 경애하는 원수님은 그 어떤 특전과 특혜를 바라지 않고 우리 인민들과 고락을 같이해오신 인민의 위대한 아들이시다.(출처: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 혁명활동교수참고서, 제1장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 지니신 비범한 천품,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주체103(2014)년)

    ◆우상화 교본 ‘청년대장 김정은동지에 대한 위대성 자료’ 전문(全文) 

    청년대장 김정은동지는 위인의 품격과 자질을 완벽하게 체현하시고 위대한 장군님의 사상과 영도를 충직하게 받들어나가시는 백두산형의 장군이시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우리 장군은 군사에도 밝고 첨단과학기술에도 밝으며 우리 인민이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존엄높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환히 알고 멀리 앞을 내다볼줄 아는 백두산형의 장군입니다.》 

    △ 청년대장 김정은동지는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충실성을 최고의 높이에서 재현하신 충실성의 귀감이시다. 

    - 청년대장 김정은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안녕과 높은 권위를 백방으로 지켜나가고 계신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안녕을 모든 사업과 활동의 첫 자리에 놓고 사업을 전개하시는 것을 체질화하고계신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제일호위병이 되시어 장군님의 현지지도로정을 먼저 밟아보시며 위대한 장군님을 모실 장소, 날씨, 기온,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비롯한 모든 조건을 일일이 헤아리시고 자그마한 빈틈도 없도록 대책을 세우고 계신다. 
    지난 4월부터 위대한 장군님께서 강원도, 함경남도, 자강도에 이르는 수천리 머나먼 강행군길을 이어나가실 때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걸으신 로정을 앞질러가며 밟아보시며 필요한 대책을 다 세워주시였다. 
    하기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얼마전에도 청년대장동지께서 자신의 건강과 기쁨을 위해 애쓰는 것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하시면서 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는 진정이 넘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올해 4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웅장한 밀림속에 둘러싸인 어느 한 단위를 돌아보시고 기쁨을 금치 못하시며 그 단위의 책임일군을 몸소 자신의 곁에 세우시고 기념사진촬영을 하셨을 때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위대한 장군님앞으로 한걸음 다가가시며 사진을 다시 찍어야 하겠다고 정중히 말씀드리였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앞에 선 나무의 그늘로 장군님의 영상이 밝게 새겨지지 못할 것 같아 경애하는 장군님의 영상을 가장 밝고 정중하게 모실수 있도록 사진찍을 위치를 다시 정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높으신 권위를 지켜드리는 사업에서는 사소한 실수나 한점의 티도 허용되서는 안되며 모든 것이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되여야 한다는 것이 청년대장동지의 투철한 신념이다. 

    - 김정은청년대장동지께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빛내여나가시는 선군혁명위업을 충직하게 받들어 나가고계신다. 

    올해 5월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자강도의 어느 한 기계공장을 단독으로 현지방문하실 때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께서 위대한 수령님께 물려주신 두자루의 권총이 오늘 경애하는 장군님에 의하여 온 나라에 총대숲을 이루었다는것을 형상적으로 표현한 공장벽면의 벽화를 오래동안 보아주시고나서 무기조립장으로 가시여 줄지어 쏟아져나오는 무기들을 근엄한 눈길로 바라보시다가 이것이 바로 김형직선생님께서 바라시던 념원이였다, 두자루의 권총이 위대한 수령님대에 가서 총검의 숲을 이루게 되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총대로 개척되고 경애하는 장군님에 의하여 승리적으로 전진하여온 선군혁명위엄을 총대로 끝까지 완성해나갈 굳은 결의를 피력하시였다. 

    △ 청년대장 김정은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상과 령도풍모를 그대로 체현하신 위인이시다. 

    - 김정은청년대장동지는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상리론적 예지를 천품으로 물려받으신 사상리론적 대가이시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비상한 탐구심과 명철한 통찰력, 심오한 분석판단력으로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혁명사상을 완벽하게 체득하시고 발전풍부화해나가고 계신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어리실 때 벌써 혁명리론들과 관련한 여러가지 원칙적문제들에 대한 명철한 견해들을 내놓으시여 사람들을 놀래우시였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10대에 모든 사업에서 실리를 재는 기준에 대하여《경애하는 장군님을 위한 일이라야 실리가 있다》고 명백히 정립해 주시였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또한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 민족자주정신에 기초하여 우리 나라의 지형학적 특징을 새롭게 밝혀주시였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최근에 어느한 군수공장을 현지지도하시면서 우리 군수공업의 력사는 위대한 수령님의 력사인 동시에 경애하는 장군님의 력사라고 우리 나라 군수공업의 력사에 대하여 명확히 규정해주시였다. 
    -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주체의 철학과 군사학, 주체경제학, 주체의 문학과 예술에 정통하고있을뿐아니라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세계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등 모든 분야의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계신다. 
    하기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김정은대장은 천재중의 천재》라고 말씀하시였다. 

    - 김정은청년대장동지는 령도풍모에서도 위대한 장군님 그대로이시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 기쁨과 만족을 드리는 일이라면 열백밤을 지새워서라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전환시키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령도풍모를 그대로 이어받으시여 장군님께서 바라시고 의도하시는 문제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최상의 수준에서 완벽하게 풀어나가고계신다. 
    올해 우리 나라에서 5천년 민족사에도 없었고 세계에도는 없는 희한한 축포야회들이 련이어 진행된데는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청년대장동지의 고결한 충정이 깃들어있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오래전부터 우리 나라의 축포기술을 세계 최첨단수준에 올려세울데 대한 장군님의 의도를 실현하시기 위하여 올해 뜻깊은 2월의 명절을 맞으며 황홀한 축포야회를 진행할것을 발기하시였다. 
    그런데 해당부문 일군들이 축포발사기술을 배워오기 위하여 어느 한나라에 갔댔지만 그 나라 사람들은 기술을 똑똑히 배워주지 않았고 세부적인 자료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위대한 장군님께 우리 식의 축포야회를 보여드릴 확고한 결심을 안으시고 며칠밤을 꼬박 밝히시며 축포의 조형화, 예술화, 률동화를 최상의 수준에서 실현할수 있는 축포발사자동프로그람들을 매우 짧은 시간에 높은 수준에서 완전무결하게 작성하시였다. 
    얼마 안되는 인원이 컴퓨터로 조종하여 20 분동안에 15 만발의 축포알을 음악에 맞추어 터쳐올린 이 축포야회는 청년대장동지께서 기술을 완성하시고 직접 지휘하신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주체식 축포행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축포야회를 보시고《청년대장은 이번 축보발사조정준비를 위해 며칠간이나 밤을 꼬박 새웠다. 이것이 바로 청년대장동지의 비범하고 특출한 실력이다. 정말 영특하고 놀랄 정도이다》라고 하시면서 이것은 단순히 젊음과 비상한 두뇌, 특출한 자질과 실력에 의한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그 밑바탕에는 령도자에 대한 충정이 깔려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며 이렇듯 희한하고 훌륭한 축포야회를 우리 인민들에게 보여줄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을 받드시고 청년대장동지께서는 태양절을 맞으며 축포야회《강성대국의 불보라》와 5.1절 축포야회《우리는 승리하리라》를 직접 조직진행하시였으며 신변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폭탄이 만장약된 발사장현장에까지 나오시여 행사를 성과적으로 보장하도록 세심히 이끌어주시였다. 
    축포야회가 진행된 후 일군들은 청년대장동지께 지금은 온 나라 인민들이 축포야회를 보고나서 강성대국의 아침을 멀지 않았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있다고 말씀드리였다. 
    그러자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축포야회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리 인민을 위하여 천만금을 들여 마련한것인데 인민들이 기뻐하면 되었다고 하시며 인민들의 기쁨이자 장군님의 기쁨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 청년대장 김정은동지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지니신 천출명장으로서의 비범한 천품과 자질을 그대로 체현하고계시는 군사의 영재이시다. 

    - 김정은 청년대장동지께서는 비범한 군사적지략과 령군술을 지니고계신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10대에 벌써 동서고금의 세계적인 명장들에 대하여 다 파악하시였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시절에 한다하는 군사가들이 한생을 다 바쳐도 다 터득하지 못한 보병, 포병은 물론 공군과 해군을 비롯한 군종, 병종, 전문병분야에 완전히 정통하시고 전군을 지휘통술할 수 있는 뛰어한 령군술을 남김없이 보여주시였다. 
    언제인가 한 인민군부대를 현지시찰하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 대장동지에게 포병전술안을 짜볼데 대한 과업을 주시자 대장동지께서는 즉석에서 장군님의 의도에 맞게 전술안을 작성하시여 최고사령부 성원들과 부대의 지휘관들을 깜짝 놀래우시였다. 
    - 김정은대장동지는 백두의 천출명장이신 장군님그대로이신 무비의 담력과 배짱, 뛰어난 령군술로 적들을 단순히 제압하시는 무적필승의 청년장군이시다. 
    지난 4월 인공지구위성《광명성2호》를 발사할 당시 적들은 우리의 령해와 가까운 공해상에 구축함을 비롯한 수많은 해상무력을 전진배치해놓고 우리를 위협공갈하였으며 수많은 전자정찰기제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위성발사를 막아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사실 그때 정세는 전쟁접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적들의 발광책동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으시고 우리 군대가 전면에 직접 나서서 만약 적들이 우리의 위성을 《요격》한다면 적들의 아성까지도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리겠다는 선군조선의 의지를 온 세계앞에 선언하게 하시였다. 그리고 광명성 2호의 발사를 앞두고 인민군 륙해공군부대들에 고도의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하시고 만약 적들이 덤벼든다면 우리 비행대들에 날강도 미제침략자들의 함선집단과 요격체계를 가차없이 짓뭉개버리라고 명령하시였다. 
    우리 비행대들의 드세찬 공격앞에 질겁한 적들은 요격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뺑소니치고말았다. 
    지난 4월 5일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위성관제조종종합지휘소를 다녀오셨던 그날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오늘 각오를 하고 거기에 가셨댔다고,《적들이 요격에로 나오면 진짜 전쟁을 하자고 결심하셨댔다》고 하시면서《각오하고 달라붙으니 무서울것이 없었다》고 말씀하시였다. 
    인공지구위성발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번에 인공지구위성을 요격하겠다는 적들의 책동에 반타격을 가한것이 김대장이라고 하시면서 그가 반타격사령관으로서 륙해공군을 지휘하였다. 만약 적들이 우리의 위성을 요격하였다면 청년대장동지의 반타격에 큰일날뻔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 김정은청년대장동지는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소유하고계시는 천하제일 명사수이시다. 

    언제인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총을 잘 쏘는 것은 우리 가문의 매력인 것 같다고 하시면서 청년대장동지의 사격술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청년대장동지는 이미 3살때부터 총을 잡고 명중사격을 하시였다. 
    올해 5월 어느한 단위를 찾으신 청년대장동지께서는 그곳 일군들의 청을 수락하시어 자동보총사격을 하시였는데 1초동안에 3발의 속도사격으로 100M밖에 매달아놓은 전등알들과 그 뒤에 매달아놓은 병들을 다 백발백중하시였다. 그리고 고정목표 점수따기를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목표판에 20발의 탄창을 다 쏘시어 모두 중심이 10점짜리 동그라미안에 명중하시였다. 
    이처럼 김정은대장동지는 천재적인 군사적자질과 령군술을 지니신 장군형의 위인이시다. 

    △ 청년대장 김정은동지는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없이 겸허하고 소탈하신 인민적풍모를 그대로 체현하신 위인이시다. 

    - 김정은 청년대장동지께서는 한없이 검박하고 소박하고 겸손하신 품성을 지니고계신다.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청년대장동지께서 어느 한 인민군부대를 찾으시였을 때 일군들은 중대예술소조공연을 관람하시는 장군님 곁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대장동지께서 앉으실것을 말씀드리였다. 
    하지만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위대한 장군님만 잘 모시면 된다고 사양하시면서 군인들과 함께 비좁은 자리에 앉아 마지막까지 공연을 보시였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어느 한 군수공장을 찾으시였을 때에도 비가 억수로 내리자 우산을 바쳐드리려고 하는 공장 일군들에게 인민군 지휘성원들이 비를 맞는데 나혼자 우산을 쓰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그들과 꼭같이 한비를 맞으며 공장을 시찰하시였다. 

    - 김정은 청년대장동지는 병사들과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니시고 그들의 생활을 따뜻이 보살피고 계신다. 

    청년대장동지께서는 어느 한 군수공장을 현지지도하실 때 음식소개판을 보시고 단고기장대신 로동자들이 늘 먹는 강냉이빵을 만드는 법을 소개하니 얼마나 좋은가고 하시며 일군들에게 겉치레식 일본새를 없애고 로동계급을 위해 복무하는 참다운 인민의 충복이 되어야 한다고 따뜻이 일깨워주시였다. 청년대장동지의 숭고한 위인적풍모를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 
    우리는 청년대장동지께서 계시여 주체혁명위업의 휘황한 전도가 있고 조국과 민족의 창창한 미래가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심장 깊이 간직하고 청년대장동지를 높이 받들어모시며 그이의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보위하여야 하며 청년대장동지께서 위대한 장군님의 령도를 받으시는 길에서 주시는 과업을 그 어떤 조건과 환경속에서도 무조건 철저히 집행해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백두산에서 개척된 주체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