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된 北의 '백두혈통'을 칭송하는 나라 대한민국
  • 11월 13일은 북한의 최고 권력자이자 전쟁범죄자이며 민족반역자인 김일성이 아니라 실제 ‘보천보사건’을 주도한 ‘진짜 김일성’이 전사한지 81주년이 되는 날.

    진짜 김일성은 81년 전인 1937년 11월 13일 일만군(日滿軍)과 교전 끝에 전사한 것으로 당시 일제(日帝)의 수사기록과 언론보도는 전하고 있지만 반미‧종북에 앞장서고 있는 대한민국의 주사파들은 이른바 ‘백두혈통 왕국’의 시조이자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전체주의 독재자 ‘가짜 김일성’을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라며 외치며  신주(神主)모시듯 받들어 섬기고 있다.

    지난 7일에는 국민주권연대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등 종북 13개 단체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시대착오적인 계급투쟁적 전체주의 봉건 세습왕조인 김일성-김정일-김정은 가계(家系)를 노골적으로 미화·찬양·옹호·지지하는 모임을 갖고 김정일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환영하는  ‘백두칭송위원회 결성 선언문’을 발표했다.

    ‘백두(白頭)’는 북한에서 김일성 직계 가족을 일컫는 ‘백두혈통(白頭血統)’의 준말이다.  김일성과 그의 부인 김정숙이 백두산에 밀영(密營)을 설치하고 항일운동을 할 때 김정일이 장차 조선의 통일을 이룩할 ‘백두산의 아들’로 태어났다며 그 직계에 붙여진 이름이며, 김일성 왕조의 신격화를 위해 사용 중인 용어다. 이러한 날조된 ‘백두혈통’은 현재 북한의 교과서와 역사서를 비롯한 모든 문헌과 보도선전물에 사실로 기록돼 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백두혈통으로는 김정은, 김정철(김정은의 친형), 김여정(김정은의 친 여동생), 김한솔(김정은의 이복형으로 독살된 김정남의 아들), 김경희(김정은의 고모로 처형된 장성택의 처) 등이 해당된다.

    하지만 우리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백두혈통이라 부르면 무엇보다 거짓과 날조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무대는 백두산이 아닌 동만(東滿, 당시 간도 지방)과 러시아 연해주이다. 백두산에 밀영을 두고 일본과 싸운 사실이 결코 없다. 김정일은 백두산 아닌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김정은은 백두산과는 무관하다. 
  • 여기서 ‘가짜 김일성’이란 해방후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김일성의 실체가 가짜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도 했다는 이른바 ‘보천보전투’(1937년 6월 4일)등 그의 항일운동 거의 전부가  타인의 이름을 도용하는 등 가짜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엇보다 북한이 김일성의 최대 항일투쟁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소위 ‘보천보전투’를 주도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2군 6사장(師長) 김일성(북한의 김일성이 아님)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국군 제7단과의 전투에서 사살된 후 참수된 것으로 당시 일제 총독부 발표와 만주군(滿洲軍) 기록,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그리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언론보도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당시 항일투쟁에 나선 중국 공산당 산하 단위부대들은 일본군을 교란하기 위해 관례적으로 전설의 장군 ‘김일성’의 이름을 사용했다.

    북한의 김일성 본인이 작성한 유일한 수기에도 그가 보천보전투를 주도하고 지휘했다는 기록은 없다. 김일성이 1942년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작성한  자필수기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는  그가 세웠다는 어마어마한 항일투쟁 전공도, 보천보 전과도, 그리고 그가 창설해 항일투쟁을 했으며 오늘날 조선인민군의 모태가 됐다는 무적의 조선인민혁명군 기록이 없다. 이 수기는 엄청난 조작과 날조, 미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는 달리 아무런 미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그의 솔직한 생 얼굴을 자필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투쟁이  조선독립의 목적에 있었다는 그 어떤 근거도 나와 있지 않다. 그냥 중국 공산당원의 일원으로 중국인들 틈에 끼어 일제에 빼앗긴 만주 회복을 위해 일만군(日滿軍)과 투쟁했을 뿐이다.

    동북항일연군은 항일투쟁을 위해 1936년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지도 하에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연합군 형태의 군사조직으로, 1939년 만주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면서 1942년 소멸됐다. 국내외 좌파학자들은 북한의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다. 보천보사건을 지휘한 2군6사장의 신원을 보면 1901년 함남 혜산진 출신으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사람이다.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은 1912년 평남 대동군 출신으로 만주 지린(吉林)의 위원중학교(毓文中學校)를 중퇴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김성주’란 이름으로, 2군 6사의 일개 부대원이었다. 김성주와 함께 2군6사에 소속돼 있던 친동생 ‘김영주’는 형이 2군6사장이 아니라 일개 부대원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일제의 발표와 당시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진짜 김일성은 1937년 6월 4일 발생한 보천보사건 5개월여 후인 11월 13일 만주 통화성 무송현 양목정자(通化省 撫松縣 楊木頂子)라고 하는 해발 1000m 산중에서 2군 6사 대원 약 1백명과 함께 아침식사를 위해 휴식을 취하던 중 일군의 지휘통제를 받는 만주국군 보병 제7단(團) 제 1영(營)의 포위 공격을 받고 부하 8명과 함께 사살됐다. 만주국군은 일제가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1932년 2월 18일)을 일으킨 직후 만주지역에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滿洲國)의 군대로 일제의 지휘통솔을 받고있고 일본군인들이 참여하고 있어 사실상 일본군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만군(日滿軍)으로도 불렸다.

    당시 김일성의 시체를 회수해 가기 위해 동북항일연군 측은 완강히 저항했다. 5시간의 교전이 있었으나 끝내 시체를 수습해 가지 못했다. 만주군은 인근 주민들을 불러 얼굴을 보여주고 동북항일연군 2군6사장 김일성의 시체였음을 확인했다. 2군 6사장 김일성은 가는 곳마다 주민들은 불러 모아 연설을 했던 관계로 주민들은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만주군 검시관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35-36세로 보이는 얼굴이 작은 사내였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25세(1912년생)였다.

    사건발생 5일 후인 1937년 11월 18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와 매일신보(每日新報),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경의 발표 등을 인용, 공산 비적(匪賊) 김일성이 사망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들 신문의 보도내용을 종합해보면, 살육과 약탈을 자행해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고 치안을 위협하던 중국 공산비(共産匪)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만군(滿軍)토벌대와 5시간동안의 격전 끝에 목을 베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들 신문은 김일성이 11월 13일 무송현 양목정자라고 하는 높이 1000m의 산중에서 대원 약 1백명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휴식을 하다가 만주군 보병 제7단 제1영의 포위공격을 받고 부하 8명과 함께 살해됐다면서, 이로써 반만(反滿) 항일을 계속하던 김일성은 36세를 일기로 악몽을 청산, 파란많은 생애의 막을 내렸다고 전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조간 2면에 ‘반만항일(反滿抗日)의 수괴(首魁) 김일성(金日成) 피착(被捉) 참수(斬首), 토비대(討匪隊)와 격전 5시간’이라는 제목 아래 김일성이 목이 잘리었다(斬首)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자에 ‘金日成被殺?’이란 제목을 달면서도 “지난 13일 만주국군 토벌대는 김일성의 주재지를 탐지하고 그곳을 공격하여 격전 5시간 후 그를 죽였다 한다”고 보도했다.
     
    1937년 11월 13일의 김일성 사살 작전에 참여하고, 시신의 신원 확인을 직접 담당했던 만주군 일본인 장교 야기 하루오(八木春雄, 1910-2002)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이 사살된 후 만주군 측이 신원 확인을 위해 목을 잘라서 가져갔던 것은 사실이다.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장 김일성의 죽음은 그 시체를 검증했던 야기 하루오의 증언외에 만주군 기관지 ‘철심’(鐵心)의 기록으로도 확인 되고 있다.(滿洲國 治安部 參謀司 調査課編 ‘鐵心’, 金日成匪賊討伐詳報 1937년 11월 15일號, pp. 70-75; 이명영 저 ‘金日成 列傳’ p. 288에서 재인용).

    김일성 연구에 일생을 바친 이명영 교수는 그의 저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장 김일성 죽음의 진부를 가려내기 위해 숱한 만주군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참수된 김일성의 목을 검증했던 전 만주군 장교 야기씨를 1973년 일본의 구주(九州)에서 만나 다음과 같은 증언을 청취했다고 소개했다.

    <일만군(日滿軍) 부대는 한인들이 많이 섞인 부대가 양목정자(楊木頂子)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얻고 마침 김일성부대가 관내에 들어왔다는 정보도 있었던 터이므로 필시 김일성부대일 것이라 판단하고 쫓아갔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느라고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복을 입은 여대원(女隊員) 5, 6명이 재봉일을 하는 것도 보였다.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가서야 교전이 벌어졌다. 대장인 듯한 사람이 총에 맞고 쓰러지자 ‘김사령 사료’(金司令 死了: ‘김사령이 죽었다’는 뜻)를 연발하며 공비 대원들이 반격해 왔다. 죽은 김사령(師長을 司令이라 부른다)의 시체를 놓고 쟁탈전이 벌어지기 5시간에 공비부대는 김사령의 시체를 버린채 도주했다. 목(首) 실험이란 것은 시체가 누구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데 내가 그것을 담당했던 것이다. 1936년 6월과 8월의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 부대가 산영자(山營子)란 부락(양목정자에서 좀 떨어진 곳)을 습격했을 때 부락민을 모아 놓고 김일성이 직접 연설을 한 일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김일성의 인상(人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보였더니 틀림없는 김일성 사장(師長)이라는 것이었다. 나이는 내 보기에는 35, 36세 가량이었다고 기억한다. 야기 하루오(八木春雄)씨는 만군기관지 월간 ‘철심’(鐵心)이란 잡지도 보여 주었다. 그 속에 ‘김일성비토벌상보’(金日成匪討伐詳報)란 기사가 있었다. 김일성의 죽음을 확인하는 자세한 전투 기록이었다. 김일성이 35, 36세 가량의 사람이었다는 八木씨의 증언은 시원(市原)(함남도경 고등과 경부) 의 증언과도 상부한다.>

    당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京城地方法院 檢事局)이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공비 김일성사살의 건’(共匪 金日成 射殺의 件)이라는 문서도 김일성의 사살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에 발송한 일자가 1937년 11월 19일로 돼있는 이 문서는 다만 김일성 사살 날자가 11월 13일 아닌 11월 15일로 돼있을 뿐이다. 김일성을 사살한 주체는 만주군이므로 만주 현지에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보고가 올라온 날자를 기준으로 문건이 작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주목할 점은 사살된 김일성의 수급(首級, 목)을 가져와 진위여부를 몰라 관계방면에 연락하여 목하(目下) 실험중(實驗中)이라 한 대목이다. 이는 당시 만주군 장교로 김일성 사살 작전에 직접 참가한 전 만주군 장교 야기씨가 주민들의 김일성 목격담을 토대로 사살된 김일성의 목을 검사한 결과 김일성이 틀림없었다고 한 증언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자료이다. 김일성은 야영지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사람들이 그의 인상착의를 잘 알고 있으며, 야기씨는 김일성의 얼굴을 아는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준 뒤 김일성임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보천보사건 지휘 공비 김일성 사살에 관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자료解題 :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編綴文書 Ⅱ: 17<治安狀況>

    문서철명: 治安狀況(昭和 12年) 第26報 - 第43報

    문서제목: 鮮外情報 - 共匪 金日成 射殺의 件

    발송일: 昭和 12年(1937년) 11월 19일

    한편 경성일보(京城日報)는 당시 혜산사건을 취조한 조선총독부 함경남도 경찰의 보고를 인용, 1937년 11월 18일자에서 김일성의 사망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이명영 교수의 김일성 열전에 기사의 일부 번역이 실려 있다.

    ◈김일성의 사망소식을 전한 京城日報 1937년 3월 18일자 기사

    鮮滿國境住民の 苦惱 今ゃ 解消 共産匪 金日成の 死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여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고 치안을 위협하던 ...중략... 지난 13일 만군토벌대는 김일성의 소재를 확인, 이를 공격하여 5시간 교전 끝에 그를 사살하는데 성공했다...중략... 보천보 습격의 장본인이며 밀림의 영웅같이 동간도 일대를 설치던 김일성이란 어떤 사나이인가. 그의 태생은 혹은 함남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남 출신이라고 했는데 국경경찰관의 조사에 의하면 함남설이 유력하며 그 이상은 판명되지 않는 비적(匪賊)다운 성장 과정이다.

    김일성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월경, 동간도를 근거로 00혁명을 일으켜 그의 부친은 그 수령이 됐었다. 00운동이 대안에 확대함에 따라 적색마가 그들 배후에 나타나 공산사상을 선동했다. 적색에 물들은 김일성은 19세 때에 인민전선의 메카, 모스크바에 잠입해 10년동안 그곳 공산대학에서 공부하고, 적위군에 입대해 반일운동의 실천가가 됐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곧 동간도로 돌아와...중략... 반만항일군을 일으켜 국경선을 휩쓸고 있었다. 밀림 유일의 인테리 김일성은 곧이어 도당의 수괴에 앉혀졌으며...중략...금춘에는 함남의 국경 제 2선 보천보를 습격하여 이 때문에 국경선을 사수하던 혜산서 경찰 수명이 희생될 정도였다. 부자 2대에 걸쳐 반만항일을 계속했던 김일성은 토벌군에 쫓기어 드디어 36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의 막을 닫았다.>
  • 경성일보의 이 기사는 당시 金日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의 활자화된 기록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사 내용에 만군토벌대가 김일성의 소재를 확인했고 국경 경찰관들의 조사로 그의 정체를 확인했다고 돼있다. 이는 혜산사건 수사관들이 철저한 조사를 했다는 뜻이다. 이 기사에는 이치하라(市原)라는 수사책임자가 등장하는 데 이 사람은 함남도경(咸南道警) 고등과(高等課) 경부(警部)로 혜산사건(惠山事件) 수사담당 책임자였던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을 가리킨다. 그때는 권영벽(權永壁:이명 權昌郁), 박금철(朴金喆), 박금록(朴祿金), 마동희(馬東熙) 등 혜산사건의 주요 피의자들이 취조를 받고 있었으며, 김일성에 대한 신원은 이들 피의자들이 확인해 준 것이다. 이처럼 김일성의 신원은 혜산사건의 주역들이 확인해준 것인 만큼 북한의 김일성은 전사한 보천보사건의 김일성과 확연히 다른 사람이며, 그가 남의 업적을 가로챈 것이 분명해 보인다.

    ◈김일성 사망에 관한 매일신보 1937년 11월 18일자 기사

    ①共匪 金日成 被殺 / 十三日 滿洲國 討伐軍에 

    <十七日 朝鮮軍當局談 = 김일성비(金日成匪) 일파는 일즉 압녹강(鴨綠江) 대안 장백무송현(長白撫松縣)에 반거하고 『콤민테룬』 사상하에 소재 주민에 대하야 공산주의(共産主義)를 고취하고 반만항일(反滿抗日)에 노력하며 또는 살인약탈을 함부로하야 주민을 괴롭게하며 엇던 때에는 일만군(日滿軍)에 대한 부정책동을하야 만주국 치안(治安)을 방해하고 잇던 중이엿는데 정보에 의하면 지난 十三일 만군토비대(滿軍討匪隊)가 김일성의 소재를 탐지하고 공격하야 격전 五시간만에 드듸여 목을 비고 개가를 올리엿다한다. 사실 그러타하면은 오래 동안 고민을 당한 주민들과 조선군 당국의 질거워함은 물논 만주토비대의 고심과 노력에 대하야 경의를 표하야 마지안는 바이다.>

     ②金日成 所經歷

    <밀림(密林)의 영웅이라고 하야 동변도(東邊道)를 호령하던 김일성(金日成)이가 필경 피살의 최후를 맛치엿다함은 긔보(旣報)한 바이어니와 그는 도대체 어떤한 인물인가? 어떤 사람은 평남(平南) 출생이라고도 하고 혹은 함남(咸南) 출신이라고도 하야 도저히 알수는 업는터이나 그가 어렷슬 때에 그의 아버지를 따러 고국을 떠나 동변도(東邊道)에 근거를 두고 살다가 ○○혁명운동을 이르키여 그의 아버지는 수령이 되고 자긔는 부하가 되어 활약을 거듭하고 잇섯는데 그 운동이 대안(對岸)에 확대하여짐에따러 적색마(赤色魔)가 배후에 출현하야 드듸여 공산사상에 공명하게 되엿다. 이 사상에 물든 김일성은 十九세에 인민전선(人民戰線)의 『메카』 막사과(莫斯科: 모스크바)에 잠입하야 十년동안을 잇스면서 공산대학(共産大學)을 맛치고 다시 적위군(赤衛軍)에 입대하야 반일(反日) 운동의 실천자가 되엇다. 그리하야 만주(滿洲) 사변이 발생하자 동변도(東邊道)로 돌라와서 비적단(匪賊團)에 가입하야 반만항일(反滿抗日)군을 이르켜 국경을 시끄럽게하던 터인데 금년 봄에 함남 국경을 습격하야 국경 제二선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하야 혜산진(惠山鎭) 서원의 수명을 히생시킨 일도 잇섯다.>
  • 이들 보도에서 보 듯 북한이 주장하는 김일성은 1912년생이므로 만 25세에 사망한 결과가 돼 보천보 습격사건의 김일성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이듬해인 1938년 4월 26일 임강현 6도구를 김일성부대가 또 습격하여 건재를 과시했다는 사실이 전해짐으로써 만주군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일만군(日滿軍)에서 발행한 ‘만주국군’(滿洲國軍)이란 책에 나와 있다. 1937년 11월 18일 김일성의 전사사실을 보도했던 매일신보는 사건 한 달뒤인 1937년 12월 19일자와 이듬해인 1938년 2월 23일자 기사에서 김일성의 사망을 재확인하고 있다.

     ◈김일성 사망 사실을 재확인 한 매일신보 1937년 12월 19일자 기사

    匪賊蠢動期(비적준동기)에 備(비)하야 國境警備陣을 强化

    對岸의 土匪共匪는 約三千 新銳偵察機도 活動

    <혹한 령하 30여도의 선만국경선을 직히는 경비진영은 동긔(冬期) 결빙긔(結氷期)에 들어가 평북(平北) 함남북(咸南北) 三도의 각 제一선 경찰서장 회의도 요지음 종료하야 점차로 국경의 겨울 경비를 갓추게 되엿다. 특히 금년은 선만一여의 방침아레의 선만 경비 연락 협조가 긴밀 강화되여 잇는 때이니만큼 비단의 철저적 섬멸을 긔하야 평북에는 근&#12293; 도착할 신예(新銳)의 정찰긔를 활동식히고 잇는 외에 각종 신예무긔를 가지고 一보라도 조선내를 친해식히지 안흘 결심이다. 그리고 대안의 비적 현황은 금하래의 만주국 토벌군으로 말미암아 왕봉각(王鳳閣), 김일성(金日成)이 뒤를 이어 너머젓슴으로 나머지는 대부분 공비 토비로 최현(崔賢), 만순(萬順), 필(畢)단장, 양정우(楊靖宇) 등 약 三천이 환인(桓仁) 관전(寬甸) 즙안(輯安) 림강(臨江) 장백(長白) 안도(安圖)에 사시 잠복하야 잇는 정도인데 동지의 식량결핍과 동시에 엇더한 『게릴라』 전법에 나오는지도 모르는 준동의 기운이 농후함으로 제一선 국경진은 매우 긴장하여 잇다.>(매일신보 1937년 12월 19일자).
  •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일-만 군경의 동남부 치안숙정공작에 따른 ‘참빗작전’으로 동남 3성(東南 3省) 즉, 길림(吉林), 통화(通化), 간도(間島)에서 활동하던 약 3천명의 동북항일연군의 병력은 사실상 전멸됐다. 사건의 전후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다수 역사학자들은 함흥지방법원의 재판기록을 무시, 보천보사건을 지휘한 사람이 북한의 김일성으로, 그가 2군 6사장에서 제2방면군장으로 승진한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보천보사건’을 ‘보천보전투’로 정의하고 있다. 남한에서도 대부분의 교과서와 역사서에 ‘보천보전투’로 소개되고있다. 북한의 역사교과서등 모든 문헌에 따르면 ‘보천보전투’란 1937년 6월 4일 북한의 김일성(본명 김성주)이 스스로 만들었다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인솔,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일제의 전략적 요충지인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현재 양강도 보천군)의 일본군 경찰주재소를 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는 ‘전투’라는 것이다. 일제 침략기 항일무장대에 의한 최초의 국내 진공작전이며 김일성 항일투쟁의 백미(白眉)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지휘했다는 것은 완전 조작이다. ‘보천보전투’는 북한의 김일성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함남출신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이 지휘했으며, 이 사람은 전투발생 5개월여 후인 같은해 11월 13일 일제의 만주 토벌군에 사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보천보전투’는 전투가 아니라 아주 미미한 1개 경찰주재소 습격약탈사건으로 ‘보천보 일경(日警)주재소 습격약탈사건’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습격을 지휘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당시 이 사건을 지휘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북한의 김일성이 아님)이 일제의 만주토벌군에 사살됐다는 사실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1937년 11월 18일자 기사, 그리고 만주국 치안부가 발간한 만주군 기관지 월간 ‘철심(鐵心)’ 11월호(발행일자 11월 15일)에 상세히 보도돼 있다. 또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이 조선총독부에 보고하기위해 1937년 11월 19일자로 작성한 문건 ‘공비 김일성 사살의 건’과 1937년 12월 1일자 일본 외무성 자료에도 김일성의 사살을 알리는 기록이 나온다. 사건발생 5일후 언론에 보도된 것은 전사자 2군 6사장의 신원확인에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매일신보는 사건발생 약 1개월 후인 1937년 12월 19일자와 1938년 2월 23일자 기사에서 보천보습격을 지휘한 김일성의 사망을 재확인했다.

    작전을 수행한 부대도 조선인민혁명군이 아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업적을 우상화하기위해 실재하지도 않은 날조된 가공의 군대다. 습격을 주도한 부대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산하 제 2군 6사였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이 1936년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인과 조선인 등의 항일 유격부대를 통합시켜 만든 연합군 형태의 군사조직으로 지휘통솔권은 중국측에 있었다. 보천보습격은 2군 6사와 박달, 박금철이 주도한 국내 연계조직인 조국광복회와의 연합작전이었다. 그런데도 북한의 모든 문헌들은 김일성이 날조한 조선인민혁명군의 단독 작전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일제가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조선인민혁명군을 통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는 북한의 주장은 오로지 북한의 날조된 교과서 등 역사서에만 기술돼 있을 뿐 당시 김일성의 활동무대였던 중국이나 소련의 어느 공식 기록, 그리고 투쟁상대였던 일본의 문헌이나 자료에도 없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날조된 역사가 대한민국의 교과서 등 김일성 관련 문헌에 버젓히 실려있고, 이것이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폄훼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보천보습격사건은 항일빨치산부대에 의한 경찰주재소 습격약탈사건으로 전과(戰果)로 따지면 일본 경찰관(순사)의 두 살난 딸과 일본인 음식점 주인 등 2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했을 정도로 미미한 사건이다. 일본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조선인 상가를 약탈한 사건을 대형 전투로 치켜세우고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당시 동아일보 보도였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지휘했다는 근거자료로 동아일보 보도를 인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천 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천 383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관이 주재소에 상주하고 있었을 뿐이다. 사전에 현지답사를 통해 지형 정찰까지했던 소위 김일성(북한의 김일성이 아님) 부대는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경찰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하고 주재소에 없었다. 오히려 김일성부대는 퇴각하는 과정에서 6월 5일 일본경찰추격대와 충돌해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보천보습격을 지휘한 김일성(설명 편의상 제1대 김일성)은 함경남도 태생으로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1901년생으로 사건 당시 36세였다. 일찍이 부모를 따라 만주에 가서 살다가 1920년 러시아에 들어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마치고 붉은군대(赤軍)에 있다가 만주사변후인 1933년께 소련으로부터 동만주로 들어왔다. 그는 1934년 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인 동북인민혁명군이 제2군 제2사를 설립될 때 정치위원으로 활동하다 제2군 제3사장이 됐으며 19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될 때 제1로군 2군 6사장으로 있었던 인물이다. 2군 6사장에게는 장백현의 한 농가에 최(崔)씨성의 부인이 살고 있었다. 일경은 보천보습격사건 이전 2군 6사장의 신원을 파악하고 그를 체포하기위해 수차례나 최여인의 집을 덮쳤으나 그때마다 도피하고 없어 번번히 실패했다. 전사한 2군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은 일본 관헌측이 보천보습격사건 직후 국내 연계세력인 수백명의 조국광복회 회원들을 체포해 신문한 결과 확보된 것이다. 당시 소련은 만주에 있는 중국 공산당과 그 유격대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하고 있었을뿐 아니라 심지어 동북항일연군에 소련인 지도요원을 배치하고 있었다.

    2군 6사장 김일성이 죽은 뒤인 1938년 봄 또 한 사람의 조선인이 소련으로부터 파견돼 와서 사망한 2군 6사장의 후계자(제2대 김일성)가 된다. 이 사람은 1906년 간도 태생으로 본명이 金一星이며 간도 용정(龍井)의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와 소련의 적군사관학교를 나와 1930년 5.30 간도폭동사건 때에는 행동대장이었으며, 1939년초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산하 제1, 2군이 제1, 2, 3방면군으로 개편되면서 제2방면군장에 승진한 사람이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는 1939년 5월 3일 밤 200여 명의 병력으로 함남 삼수군 호인면의 반절구(半截溝)에서 일제의 만주국 경찰과 4시간 교전해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고 경관과 주민을 포함해 약 40명을 살상했다. 이 과정에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중상을 입는 등 병력 손실도 컸다. 제2방면군장의 부인인 김혜순(金惠順)도 부상당한 몸으로 귀대하지 못하고 밀림 속에 숨어 있다가 1940년 4월 6일에 체포됐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일만군(日滿軍)의 추격을 피해 1940년 소련의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근교에 정착, 패주한 동북항일연군 소속 대원들을 대상으로 교육훈련을 시켜온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Okeyanskaya Training Camp)교장이었으나 1944년 가을 부상 후유증에 결핵까지 겹쳐 사망했다. 제2방면군장의 정체는 체포된 김혜순과 다른 부대원들의 진술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제3대 김일성)은 이 두 부대장의 부하(대원)였다. 북한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金英柱)와 김일성의 봉천(奉天) 평단중학교(平旦中學校) 동창생으로 절친한 친구였던 장아청(張亞靑, 본명 張蔚華)은 북한의 김일성이 2군 6사의 사장이 아니라 일개 부대원이었다고 각각 진술 한 바 있다. 김영주는 친형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함께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직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지휘했다면 2군6사장, 제2방면군장, 북한 주석 김일성은 동일인물이어야한다. 하지만 2군 6사장은 1937년, 제2방면군장은 1944년, 북한 주석 김일성은 1994년에 각각 사망했다. 북한의 김일성(제3대 김일성)은 이처럼 자신의 상관이었던 죽은 김일성들을 자기 자신이라고 조작한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뒤늦게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에서 김혜순을 잘 알고있는 것처럼 언급하기도 했으나 김혜순을 자기의 부인으로 조작할 수 없었다. 자신의 항일 빨치산 대원이자 부인인 김정숙에게서 태어난 김정일과 김경희(처형된 장성택의 부인)가 증거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습격을 지휘했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들통나고 만 것이다.

    2군 6사장 김일성, 제2방면군장 김일성, 북한 주석 김일성이 동일인이라면 1937년의 보천보습격과 1939년의 반절구(半截溝)전투를 이끈 사람은 동일인 즉, 북한의 김일성이어야 하는데 지휘자가 서로 다른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특히 반절구전투에서 김일성이 중상을 입었으며, 함께 전투에 나선 그의 처 김혜순도 부상을 입고 별도로 숨어지내다 체포됐으며, 당시 전투지휘를 한 김일성이 체격이 깡마른 데다 심한 고도 근시로 안경을 상시 착용하고 찍은 사진, 그리고 그런 내용이 담긴 일본측 자료나 주장은 북한의 김일성을 설명하는 데는 전혀 맞지 않는다.
     
    북한의 기록에 의하면 항일투쟁시기 북한의 김일성이 부상을 당했다거나, 근시로 안경을 착용한 적이 결코 없다. 그의 부인(1940년 10월 혼인관계에 들어갈 때 까지는 여대원)의 이름은 김정숙(金貞淑)으로, 김혜순이 아니다. 김일성이 죽기 직전에 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혜순이 등장한다. 1992년에 쓴 4권 183쪽에서는 김혜순이 꾀꼬리처럼 노래 잘하는 반일자위대원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192쪽에서는 동생 김영주에게 밥을 해준 김혜순을 김일성이 1936년에 만났다는 얘기가 나온다. 김혜순에 대한 내용은 ‘세기와 더불어’ 전 8권을 통틀어 4권에만 몇 군데 나오고 4권 이후론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그러나 어느 대목에도 김혜순이 북한 김일성의 아내라고 읽히는 대목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72년 개관한 평양의 혁명박물관에 김혜순의 남편인 안경 낀 제2방면군장이 동료 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전시하고 항일투쟁 시절의 북한 김일성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사람이 북한 김일성으로 그가 죽지 않고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일관되게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귀국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전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중국의 흑룡강성(黑龍江省) 혁명박물관에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 사진과 88여단 시절의 김일성 사진 등 2개가 전시돼 있는데,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동명이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안경낀 제2방면군장 사진설명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의 일부 지휘자와 전투원’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진짜 북한 김일성이 들어있는 사진은 그의 중국인 상관인 저우바오중(周保中) 88여단장이 부대원들과 함께 하고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길림성 도서관 홈페이지에도 나온다.

    북한의 평양 ‘인문과학사’가 1968년 펴낸 백봉(白峰)의 저서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영문명: The Sun of the Race, Marshal Kim Il-sung)’도 깡마른 체구의 안경낀 제2방면군장이 앉아 있는 모습의 사진을 싣고 ‘림강현 오도구(臨江縣 五道溝) 밀영에서 대원들과 함께 계시는 김일성장군’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다. 거짓말도 거짓말이지만 날조를 하다보니 앞서 죽은 제2방면군장이 김일성이라는 모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 사진은 당시 일만군경의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 공작대장이 도망가버린 제2방면군장 막사를 습격해 압수한 것으로, 일본측은 대량 복사해 김일성 체포를 위해 살포했다. 나가시마는 조선이 해방된 후 한참 지나서 이 안경 낀 제2방면군장 사진을 조총련의 북한 연락대원 유광수(柳光守)라는 자가 복사하고 돌려주겠다고 가져간 후 돌려주지 않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북한이 현재 항일투쟁기의 김일성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제2방면군장 사진은 당시 만주 벌판에 뿌려진 것을 습득한 것인지 아니면 북한이 유광수로부터 전달받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시기 ‘김일성’이란 이름이 난무한 이유는 이렇다. 당시 신출귀몰하다는 ‘전설의 김일성장군’에 대한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는 데다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수많은 빨치산 항일운동가들이 돌려 사용하던 이름으로,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기보다는 무장투쟁 지휘관들이 검거를 피하고 일본군경의 토벌작전을 교란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일종의 가명이었다. 여러 명이 동시에 사용했기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천하를 쥐락펴락’하며 이곳 저곳 전투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의 단위부대장들은 거의가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소위 ‘김일성부대’는 소부대 단위로,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히트 앤드 런’의 전형적인 유격전을 벌였다. 당시 ‘김일성 부대’ 토벌과 김일성 검거에 나섰던 일본 군경은 ‘김일성 부대’를 이미 소탕했는데도 몇 달후 또는 1-2년 후 소탕됐다는 김일성부대가 다른 지역에서 다시 출몰하는 바람에 긴장하고 병력을 재투입해 전투를 벌여야 했다. 이런 점 때문에 학자마다 김일성 연구가 혼란스럽고 어렵다는 점을 호소하고 있다. 김일성 이름을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고 설정해 연구를 하다보니 큰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좌파 학자들은 이 3인의 김일성이 동일인물(제2군 6사장=제2방면군장=북한 김일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 검인정 교과서들도 보천보습격사건을 ‘보천보전투’라는 이름으로 비중 있게 수록하면서 이 사건 후 김일성(북한의 김일성)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국내에서 이종석 교수(전 통일부장관) 등이 주장하는 ‘진짜 김일성’의 유일한 근거는 북한이 내세우는 자료를 제외하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檢事局) 사상부(思想部)가 1939년 8월 31일자로 발행한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기록이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측 자료에는 보천보 습격사건은 나오지만 김일성이 이를 이끌었다는 기록이 전무하다.

    사상휘보는 보천보사건을 지휘한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본명 김성주(金成柱), 당년 29세의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 출신으로 어릴 때 부모를 따라 간도 방면으로 이주하여 동 지방에서 자라 비단(匪團)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현재 그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라고 적고 있다. 본명과 출신지로 보면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지휘한 것이 맞다. 그러나 이 기록도 본명과 출생지 이외의 나머지 다른 ‘팩트’들은 모두 틀린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의문시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12년생이므로 당시 나이는 25세이며, 이주한 곳은 간도가 아니라 무송이다. 또한 어머니 강반석(康盤石)은 7년 전인 1932년 7월 31일 이미 사망했다. 오히려 ‘사망한 보천보습격사건 지휘자 김일성’의 이주지가 간도이며, 그의 부모와 처자도 거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휘보의 기록은 사망한 2군 6사장 김일성과 북한 김일성의 신원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주목할 점은 사상휘보에 나오는 김일성의 본명이 ‘金成柱’로, 이보다 2년전 ‘보천보사건 지휘자 김일성’의 사망소식을 전한 경성일보 기사(보도 일자 1937년 11월 18일)에 나오는 이름 ‘金成柱’와 동일하다는 점이다. 사상휘보의 기록은 ‘이미 죽었다는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인데. 왜 그런지 이 대목에 대한 설명이 없다. 또 하나의 주목을 끄는 것은 보천보습격을 지휘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의 출생지가 평안남도가 아니라 함경남도라는 자료(서적)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출생지가 함경남도라면 보천보사건 지휘자는 북한의 김일성이 결코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지금의 평양시 만경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일본인 나가오카 도모타로(永丘智太郞)가 1938년에 쓴 ‘극동의 계획과 민족’(極東の計劃と民族)이라는 책의 ‘만주(滿洲)의 비적적화(匪賊赤化)와 조선인(朝鮮人)’이라는 장을 보면 2군 6사장 김일성은 평남출신이 아니라 함남출신으로 나온다. 또한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의 1942년 문집 ‘압록강’(鴨綠江)의 ‘비적(匪賊)과 압록강’이란 장에서도 보천보습격을 지휘한 김일성은 함남태생으로 기록돼있다. 이같은 기술은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습격을 지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연구를 하다보면 김일성 본명의 한자가 ‘金成柱’인지 ‘金聖柱’인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북한은 김일성의 한자명이 ‘金成柱’라고 하나, 이는 보천보습격사건 이후 전사한 2군6사장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평생을 북한 김일성 진위를 연구하다 2000년 6월 20일 타계한 이명영(李明英) 전 성균관대 교수(정치학)는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金成柱’가 아닌 ‘金聖柱’이며, 그가 본명이 ‘金成柱’인 보천보사건 지휘자 제1대 김일성의 공적을 가로채기 위해 본명의 한자까지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북한 김일성의 본명이 ‘金成柱’ 아닌 ‘金聖柱’로 보아야 할 근거는 많다. 김일성의 동생이름이 철주(哲柱; 지혜로운자), 영주(英柱: 영웅)임을 감안하면 그의 본명은 ‘成柱’보다는 ‘聖柱’(거룩한 자)가 더 어울리는 이름이다. 더구나 부모가 기독교 신자임을 감안하면 ‘聖柱’로 작명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명영 교수가 1971년 2월에 당시 혜산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 책임자였던 함남도경(咸南道警) 고등과(高等課) 경부(警部)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를 일본에서 만나 청취한 바에 따르면 사건 피의자의 한사람인 박록금(朴祿金)은 보천보사건을 지휘한 김일성(金日成)이 1901년생으로 1937년 당시 36세(북한의 김일성은 1912년생으로 1937년 당시 25세),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고 만주사변 후에 소련에서 만주로 온 사람이란 것을 처음으로 진술했다. 혜산사건이란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일본 관헌측이 2군 6사장 김일성 부대의 보천보습격사건 직후 국내 연계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501명을 체포해 188명을 기소한 사건이다. 이명영 교수는 1974년 그의 저서 ‘김일성 열전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를 통해 북한이 보천보습격사건의 지휘자를 김일성(훗날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된 사람)으로 조작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주장했다.

    박록금(朴祿金)에 의해 보천보습격사건의 지휘자 김일성(金日成)의 신원이 알려졌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 권영벽(權永壁), 이제순(李悌淳), 박달(朴達), 박금철(朴金喆) 등 혜산사건의 다른 주요 간부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치하라는 그들의 진술이 거의 일치했다고 증언했다. 사상휘보의 기록은 자료에 적시된 것처럼 여러 가지 설(說) 중의 하나를 택한 것이며, 2군 6사장 김일성을 직접 체포해 심문하고 조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여러 가지 증거들을 모두 배척하고 사상휘보 기록만을 취한다는 것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사상휘보의 2군 6사장 김일성 신원은 북한 김일성의 신원과 일부 부합하나, 이는 혜산사건의 수사기록도, 재판기록도 아닌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이 펴낸 일종의 동향보고서에 불과한 만큼 형사피고인의 유무죄를 다룬 신문조서나 판결문보다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할 것이다. 형사사건에서는 피고인의 정확한 신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팩트’(사실)다. 더구나 보천보사건 이후 진짜 김일성이 전사한 후에도 다시 김일성의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일만군경에 대항하는 전투와 함께 약탈행위가 그치지 않았던만큼 ‘살아있는 김일성’ 즉, 보천보사건을 지휘한 김일성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전제아래 조사보고서를 만든다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에 전사하고, 그후 사상휘보 20호가 발행된 1939년 무렵에는 북한의 김성주가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으로 행세하고 있었으므로 사상휘보의 기록은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착각하여 기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상휘보 기록보다는 수사 책임자의 증언과 당시 언론보도가 더 믿을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의 보천보사건 지휘가 맞다고 주장하는 국내외 학자들도 김일성이 한 명이라는 전제 하에 연구를 진행하다 보니 제2방면군장의 처 김혜순을 북한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이라고 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등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가 브루스 커밍스이다. 커밍스는 그의 저서 ‘North Korea, Another Country’ 115쪽에서 북한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이 김혜순이며, 일본군에 체포돼 죽었다고 썼다.

    북한 김일성의 부하들도 김일성이 보천보습격사건을 지휘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1942년 이후 소련 극동군 25군 예하 88정찰여단에서 김일성(제1영장: 대대장에 해당)의 부관으로 활동했던 전 북한군 부참모장 유성철(6.25전쟁 때 작전국장, 육군중장)씨와 부대대장을 지낸 박성훈씨는 한결같이 북한의 김일성이 죽은 김일성(동북항일연군 2군6사장)의 공적을 자기 것으로 가로챘다고 주장함으로써 김일성이 가짜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30년대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의 일개 대원(또는 지대장급)으로 항일 빨치산운동을 했다. 그러나 그가 1937년 6월 4일 보천보습격사건을 지휘하기는커녕 작전에 참여한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은 아무도 없다. 그는 1940년 10월 23일 일본 관동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의 연해주로 패주했다. 그는 이곳에서 한참 수용소 생활을 한 뒤 1942년 8월부터 해방 때까지 88정찰여단에서 활동했다.

    보천보 습격부대의 국내 협력 조직인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만주로 가서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을 만나 국내 진공목표인 보천보 경찰주재소의 위치, 현황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2군 6사장이 병력을 이끌고 직접 보천보를 습격했을 때 길 안내 등 각종 편의와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일경에 체포돼 옥살이까지 했던 박달(朴達), 박금철(朴金喆)은 해방후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을 보고 그들이 보천보사건 때 만났던 2군 6사장이 결코 아니라고 증언했다.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전쟁 당시 월북해 북한 외무성 국장을 지냈던 박갑동 씨는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전투 참가혐의로 일본군에게 체포돼 재판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박달, 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 속 인물이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고 각각 증언했다”고 밝혔다. 당시 국내에서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항일운동을 벌이던 박달과 박금철은 1937년 5월 중순경 국경을 넘어 장백현 이십도구(二十道溝)의 외진 곳에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6사장 김일성을 만났다. 이 때 제6사장 김일성에게서 보천보 습격계획을 듣고 돌아온 박금철은 보천보 부락의 지도 등 지형정보를 작성해서 제6사로 보냈다. 또 습격당일 밤에는, 조국광복회 소속 60여명의 국내 동지들을 이끌고 방화약탈의 선두에 섰다. 그래서 김일성의 얼굴 등 인적 사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김일성의 10촌으로 1994년 탈북한 강명도(인민무력부 보위대학 보위전문 연구실장과 합영회사 부사장 역임)는 2014년 8월 3일 종편 채널A 방송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북한의 김일성은 실제 진짜 김일성 장군의 이름과 업적을 가로챈 가짜라고 주장했다. 근거로 김일성이 해방 후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자기 가족도 김성주가 김일성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미 군정청도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침략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진짜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미군정청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와 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 김일성)’로 가장했다고 기술돼 있다.

    중국 공산당 문서 등 중국측 문헌에도 보천보습격사건이 일부 언급돼 있으나 이를 북한의 김일성이 지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해방 50주년을 맞아 1995년 조선족 계열의 요녕인민출판사는 일제 침략기 만주지역에서의 항일투쟁을 상세히 다룬 ‘항일투쟁반세기’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출판했는 데 여기에는 해방후 북한정권에서 주요 직책을 담당했던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등은 기록하면서도 김일성 또는 김성주(김일성의 본명)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1995년이란 시점은 한해 전인 1994년에 사망한 김일성을 객관적으로 평가, 서술할 수 있었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외시켰다는 것은 김일성(김성주)이 보천보습격사건 참가는 말할 것도 없이 항일투쟁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김성주를 만주항일투쟁사에 편입시켰을 경우 항일투쟁쟁사 전체가 왜곡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중국측에 펴낸 ‘동북항일렬사전’에도 최용건 등 김일성이 소속돼있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소속 열사 19명의 이름은 나오지만 김일성의 이름은 없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결정적 증언을 한 또 한 사람은 해방 직후 평양의 소련 군정청 핵심 멤버였던 레베데프(Nikolai Georgievich Lebedev, 1901-1992)소장이었다. 1945년 8월 평양에 진주한 소련 극동군 제25군 정치사령관인 레베데프 소장은 사망 1년 전인 1991년 6월 모스크바에서 가진 중앙일보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결정적 증언을 했다. 기자회견 내용은 그해 9월 5일자 중앙일보에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를 맡았으며 당시 33세의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양성하는 등 북한 정권창출에 직접적으로 간여한 인물인 레베데프에 따르면 본명이 김성주(金聖柱)인 김일성은 입북할 때부터 명성만 있고 실체는 불분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을 이용하기 위해 김일성이란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하도록 했으며 소련군 장성들도 이것이 절묘한 신의 한 수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레베데프 소장의 이같은 언급들은 그가 1991년 8월 22일 모스크바에서 가진 장준익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예비역 중장)과 가진 인터뷰에서 재확인 된다. 레베데프 소장은 장 전 육사교장과의 인터뷰에서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대회는 ‘김일성장군환영대회가’가 아니라 ‘조선 인민해방 축하대회’라고 수정하면서 “김일성 동지의 발언이 있겠다고 소개하니까 그곳에 모인 군중은 열화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는 김일성장군에 대한 국민들의 대단한 인기를 알 수 있었고, 연설이 끝난후 김일성(김성주)은 진짜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여론이 비등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은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이름으로 행세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간부들에게 가짜 김일성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현 모란봉경기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는 전설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씨는 “연설에 앞서 소련 점령군사령관 스티코프 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티코프는 여기 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이밖에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들은 오영진(吳泳鎭)의 ‘하나의 증언’, 허동찬의 ‘김일성 평전’, 임은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 등에 나타나 있다.

    원래 김일성 가짜설이란 북한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성주(金成柱)가 일제 식민통치 시기 만주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일본군을 무찌르던 신출귀몰한 전설적인 명장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김성주가 언제부터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의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에서 김성주란 본명을 가진 그가 어떻게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됐는지 적고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1928년 10월 자신이 김성주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을 당시 그 지역에 김혁이라는 사람이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혁이 만든 노래 가운데 ‘조선의 별’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 ‘조선의 별’이 김성주를 지칭하는 뜻이었다고 한다. 당시 16세에 불과했던 김성주는 이에 대해 김혁을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혁과 차광수, 서정애, 박도범&#160;등 동지들도 김성주를 ‘조선의 별’ 이라는 뜻에서 ‘한별’이라고 불렀고 나중에는 한자어인 ‘一星’(일성)으로 고쳐 부르는 데 찬동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성주가 김일성이 된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고, 전설의 명장 김일성의 이름도 도용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에는 백마를 탄 항일투사 김일성의 그림이 걸려 있으며 김일성 전기나 만화책, 교과서 등에는 이런 그림이 빠짐없이 들어있는 데 이 ‘백마를 탄 김일성 장군’은 아마도 1887년 함남 북청출신으로 일본육사를 졸업한 김광서(金光瑞: 일명 金擎天)장군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소련에서 일본간첩혐의로 두 차례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김광서는 북부 시베리아 수용소 수감중 강제노역을 하다가 심장질환으로 1942년 1월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아직도 그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59년 소련 군사재판소는 재심끝에 김광서에게 무죄를 선고, 그에게 씌워졌던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겨줬다.

    미국에서도 김광서(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밀문서를 2009년 공개한 바 있다. 미 극동사령부 정보참모국(G-2)이 1952년 7월 31일자로 작성한 기밀문서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는 “당시 조선인들 사이 전설로 알려진 백마탄 장군 김일성은 실존 인물로 본명이 김광서이며,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이 내세운 가짜로, 본명은 김성주”라고 적고 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 ‘선구자’의 “조국을 찾겠노라 말달리던 선구자”는 김광서 장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조국의 광복도 못 본 채 이역만리에서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 전설적 김일성 장군인 김광서 장군에게 뒤늦게나마 8.15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또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김광서 장군의 손녀 2명에 대해 특별 귀화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다. 이들은 러시아 국적으로 각각 모스크바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거주 중인 옐레나(당시 54세. 의사)와 동생 갈리나(당시 52세. 의사) 자매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같은 가짜설이 남한의 우익 인사들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에 의해 먼저 제기됐다는 사실이다. 해방 후인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33세의 나이로 연설하기 위해 평양 공설운동장(현 모란봉경기장)에 모습을 나나내자 북한 주민들은 말로만 들어왔던 전설의 항일 명장 김일성이 이렇게 젊을 수 있냐며 가짜설을 제기했고 이후 남한에서도 우익인사, 반공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가짜설이 퍼져나갔다.

    ◈보천보 업적 가로채려 근시로 안경낀 상관 사진까지 김일성 자신 것으로 조작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시절 3명의 김일성 중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제2대 김일성)만 3장의 사진을 남겼을뿐 전사한 2군 6사장(제1대 김일성)과 북한의 김일성(제3대 김일성)은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3장의 사진은 일만군경의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 공작대장이 도망가버린 제2방면군장의 밀영을 뒤져 압수한 것들로, 김일성 수배를 위해 전군에 배포됐다.

    이들 사진은 ①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의 김일성이 아님)이 자신의 부인이자 제2방면군 여성부장인 김혜순을 비롯한 여성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②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다른 남자대원들과 서있는 모습으로 찍은 사진 ③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그의 상관인 웨이정민, 오성륜(전광, 재만조선광복회 발기인)과 3명의 소년대원들을 포함한 다른 대원들과 앉아서 찍은 것이다. 북한은 수거한 3장의 사진 중 ③의 사진만 공개하고 여기에 등장하는 제2방면군장을 북한의 김일성이라고 주장한다. ③의 사진은 제2방면군장의 얼굴이 상당히 흐리게 나와 있는데 북한은 이 사람을 항일투쟁시절의 북한의 김일성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 3개 사진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모두 동일인으로 한결같이 깡마르고, 코가 높으며, 키가 작고, 근시로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북한 김일성의 1927년 육문중학 재학시절 사진, 그리고 김일성이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피한 후 동북항일연군교도려(뒤에 88정찰여단) 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나오는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③의 사진을 역사서에 게재하고, 이를 다시 변조해 평양의 혁명박물관에 전시해놓고 키가 작고 깡마른 체격에 안경을 착용한 사진 속의 이 사람이 항일 빨치산 시절의 김일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은 청년시절은 물론 해방 후 상당기간까지도 안경을 착용한 적이 없다. 백봉의 김일성 전기집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은 ③의 사진, 즉 제2방면군장이 앉아있는 모습의 사진을 싣고 ‘림강현 오도구밀영에서 대원들과 함께 계시는 김일성장군’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3장의 사진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이 모두 동일인물이지만 북한이 ①과 ②의 사진을 사용하지 않고 ③의 사진만을 사용하는 데는 큰 이유가 있다. 원래 등장인물은 조작하기위해서는 얼굴이 흐린 사진이 안성맞춤이다. 서있는 모습의 사진(②)은 조도(照度)가 알맞아서인지 얼굴이 비교적 선명하게 나타나 북한 당국이 김일성의 사진으로 채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①의 사진에는 훗날 북한 김일성의 부인이 된 김정숙이 아니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인 김혜순을 비롯한 여러 여성대원들이 나오기 때문에 북한은 이 사진을 조작할 수 없었다. 이 사진은 당시 김일성부대 토벌에 나선 일제 공작대장 나가시마가 보유하고 있었으나 1969년 조총련의 대북한 연락책으로 알려진 유광수라는 사람이 복사하고 돌려주겠다고 가져간 후 소재가 불명한 상태다. 유광수는 이명영 교수에 앞서 보천보사건과 혜산사건을 담당했던 당시 일본 군경 고위 인사와 판사, 검사들을 모조리 찾아 진짜 김일성 관련 자료들은 모조리 챙겨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이 앉아서 찍은 사진도 조작했다. 김일성을 최고 상관으로 조작하기 위해 위치를 중앙으로 옮겼다. 또한 김일성이 최고 지휘관임을 나타내기 위해 원래 13명이 찍혀있던 것을 상관인 웨이정민과 오성륜 등 4명을 삭제, 9명으로 만들어 놓았다. 조작된 이 사진은 1972년 개관된 평양의 혁명박물관에도 전시돼 있다.

    아래 사진 ①②③④⑤⑥은 필자가 정리한 김일성 사진 변천사이다. 유독 사진 ②만 얼굴 윤곽이 다르고 안경을 끼고 있다. 이 사람은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제2대 김일성)이다. 이 사람은 1944년 병사했다. 그런데도 북한은 이 사람이 북한의 김일성이라고 우긴다. 사진 A, B, C, D는 언론인 출신으로 성심여대-카톨릭대 교수를 역임한 정자환씨가 쓴 ‘북한은 남한에게 무엇인가-거짓의 두 왕국’(도서출판 선, 2012)에 나오는 것을 재인용한 것이다. 북한이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을 지휘했다는 것을 주장하기위해 사살된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과 2군 6사장의 후계자인 제2방면군장(얼굴이 깡마르고 안경을 낀 사람)을 동일인물이라고 우기고 있다. 
  • 한편 중국의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사진과 북한 김일성의 88여단시절 사진 등 2개가 전시돼있는데 두 사람은 동명이인임을 입증하고 있다. 안경낀 제2방면군장 사진설명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의 일부 지휘자와 전투원’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가짜라는 것을 나타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안경낀 제2방면군장은 1944년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크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 교장시절 중상 후유증에 폐결핵까지 겹쳐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방면군장이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 좌파 학자들의 주장처럼 북한 주석 김일성과 동일인물이라면 이 사람은 1945년 8월 9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며 조선을 해방한 인물이라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2군 6사장은 죽지 않았고 후에 제2방면군장으로 승진했으며, 이 사람이 북한의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따라서 2군 6사장=제2방면군장=북한의 김일성) 학자는 도쿄대의 와다 하루키, 하와이대의 서대숙, 펜실베이니아대의 이정식, 이종석 교수(전 통일부장관),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 스칼라피노(Robert A. Scalapino, 2011년 작고) 박사 등이다. 이들은 북한의 주장 등은 받아들이면서도 이명영 교수의 연구결과에 대해서는 이 교수가 혼동한 모양이라고 무시하고 있다. 이들 아래서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쓴 국내의 많은 학자들도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백봉의 저서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은 김일성의 만주에서의 항일활동모습을 모두 사진이 아닌 삽화로 처리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이 만주지역에서 남긴 사진은 육문중학 재학시절 교복입은 사진 한 장이 유일하다. 그 이후 만주지역 항일투쟁시절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중요한 것은 삽화 어디에도 북한의 김일성이 항일투쟁시절 안경을 착용한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상관을 자기로 조작했지만 상관부인은 자기부인으로 조작할 수 없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전사한 동북한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제1대 김일성)을 승명(承名)한 뒤 제2방면군장으로 승진한 사람(제2대 김일성)을 자신인 것처럼 조작했으나 이 사람의 부인까지는 자기 부인으로 만들 수 없었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 부대는 1939년 5월 3일 밤 200여명의 병력으로 장백현의 한 부락을 습격, 일만군경과 4시간 교전 끝에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고 일제 군경과 주민을 포함해 약 40명을 살상했다. 이 과정에서 제2방면군(종전 2군 6사)의 병력 손실도 적지 않았다. 제2방면군의 군장인 김일성의 부인이자 여자청년부장이었던 김혜순(金惠順)은 가벼운 상처를 입고 중상을 당한 남편과 헤어졌다. 부상자와의 동행은 눈에 띄기 쉽다는 전략적 고려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김혜순은 밀림속 산가(山家)에 숨어 있다가 1940년 4월 6일 함경남도 압록강 건너 13도구의 서강북쪽 백압이란 곳에서 일만군경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공작대에 의해 체포됐다. 만약 이때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이 맞다면 그 시점에서 그에게는 공식적으로 부인이 없어야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존재는 김정숙이어야 한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피할 때 훈춘의 한 산꼭대기에서 동료 대원 김정숙과 혼례를 올린 것으로 당시 함께 도피중이었던 빨치산 여대원 서순옥(徐順玉) 등의 증언에 나와 있다. 김정숙은 1935년 9월부터 김일성 유격부대에 합류했다. 또한 북한의 김일성은 자신이 보천보사건을 지휘했고 계속 살아 남아 1945년까지 항일무장투쟁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만큼 제2대 김일성(제2방면군장) 부인인 김혜순은 전사한 제1대 김일성(2군 6사장)의 부인이 되어야하고 훗날 김정일을 낳은 자신의 부인도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은 제1대 김일성과 2대 김일성, 제3대 김일성(북한의 수상/주석)이 모두 동일인물이며, 남한의 친북학자 대부분도 이런 주장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1대 김일성의 업적을 독차지하고 그 후계자인 2대 김일성의 업적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부인만큼은 자기 부인으로 만들 수 없었다. 우선 ‘증거물’로 김정숙에서 태어난 아들 김정일과 김만일(사망), 딸 김경희(처형된 장성택의 부인)가 있기 때문이다.

    제1대 김일성 즉, 2군 6사장에게도 당시 장백현의 어느 농가에 최(崔)여인이란 부인이 살고 있었다. 일제 경찰에서는 2군 6사장 김일성을 체포하기 위해 그의 부인을 검거하려 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나가시마는 함북태생인 김혜순이 체포된 후 그의 함경도 집에서 부인과 함께 친하게 지내며 기거한 적이 있다고 1971년 2월 이명영교수가 일본에서 그를 만났을 때 증언한 바 있다. 나가시마는 당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을 체포하기위해 어렵게 김일성부대의 유격근거지를 뒤져 사진을 수집, 상부에 보고한 것이 오늘날 안경을 낀 제2방면군장 사진들만 역사에 남게 된 원인이 됐으며 자신도 이 안경낀 제2방면군장 김일성과 여대원들이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을 갖고 있었는데 수년 전에 조총련의 유광수(柳光守)라는 자가 복사하고 돌려주겠다고 가져간 후 무소식이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했다. 나가시마는 이명영 교수에게 “유광수가 명함 한 장만 남기고 내가 만들어 가지고 있던 김일성 스크랩북과 사살된 김일성에 대한 목실험(인근 주민과 부하들을 불러 김일성 시체의 얼굴을 확인한 것) 기록 및 사진들을 모두 복사하고 돌려주겠다고 가져간 후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도쿄의 조선문화연구회(朝鮮文化硏究會)소속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유씨는 사실은 조총련(朝總聯)의 대북연락책 겸 행동대원으로, 일본에 자료로 남아있는 북한 김일성의 과거 흔적을 지우기 위해 당시 만주에서 김일성의 체포와 ‘김일성부대’ 소탕에 전력을 투구했던 일본군경과 검찰, 법원 관계자들을 오래전부터 찾아가 모든 자료를 입수해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혜산사건으로 체포된 사람 중 최초로 2군 6사장 김일성의 정체에 대해 본명 金成柱, 나이 36세,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고 만주사변 이후 소련에서 만주로 온 사람이라고 이 사건 수사책임자인 함남도경(咸南道警) 고등과(高等課) 경부(警部)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씨에게 처음으로 진술했던 박록금(朴祿金)은 김일성은 사장(師長)이라 여자대원에게 손대는 일은 없었고 장백현의 한 도구(道溝) 농가에 최(崔)여인이라는 처가 있어서 거기로 자주 출입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따라 이치하라(市原) 경부는 혜산경찰서 형사 최령(崔鈴, 이명 崔燕)과 곤야(近野)를 보내 최여인을 체포하려 했으나 이미 달아나고 없어 번번히 실패했다고 이명영 교수에게 밝혔다.

    1981년 ‘한국전쟁의 기원: 해방과 분단정권의 등장, 1945-1947’(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이란 책을 썼던 미국 시카고대학의 수정주의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1991년 ‘김정일코드’(원제: North Korea: Another Country, 남성욱 역)에서 김일성의 첫 부인이 김혜순이라는 실수를 하고 만다.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을 지휘한 진짜 김일성이라는 것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즉, 3명의 김일성을 한 명의 김일성으로 인식하다 보니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물론 김혜순이 김정숙 이전에 북한 김일성의 애인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북한당국은 이를 철저히 부인하고 있다. 1930년대 김일성이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제2군에는 김확실, 김혜순, 박록금, 서순옥, 최희숙 등 30여명의 여성 대원들이 있었는데 여성대원 중에서 제일 잘생긴 여성은 화룡에서 입대한 김혜순으로 이 여성이 바로 북한 김일성의 애인이었다는 것이다. 정숙이라는 이름의 여성도 3명이나 됐다. 정숙이라는 이름은 문정숙, 박정숙, 김정숙 등 3명이었는데 이들 중 김정숙은 키가 작고 까무잡잡하여 ‘깜장 정숙’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 ◈중국측 자료에도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 이끌었다는 기록 전혀 없다

    중국측과 만주 조선족들이 펴낸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의 투쟁사 자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북한의 김일성이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 조선족이 경영하는 심양의 요녕인민출판사가 발행한 조선족혁명렬사전(朝鮮族革命烈士傳, 1-3권, 1983 1986 1992)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사망한 72명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의 약사를 수록하면서 보천보전투를 언급하고 있으나 그 어디에도 김일성이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은 없다. 요녕인민출판사가 지난 1983년 제1권을 낸 이후 9년만에 제3권을 낼 정도로 이 책은 노작이다. 그만큼 관련자들의 증언을 철저히 들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 소속인 오중흡(吳中洽, 1910-1939, 전 북한 인민군 참모장 오극열(吳克烈)의 아버지), 권영벽(1909-1945), 이동학(1911-1938), 김산호(?-1936)등이 직접 보천보전투에 참가했던 사실은 비교적 상세히 기술돼 있으나 김일성의 참전여부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책을 보면 북한의 김일성은 보천보습격사건에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흑룡강성사회과학원(黑龍江省社會科學院) 지방당사연구소(地方黨史硏究所)와 동북렬사기념관(東北烈士紀念館)이 공동으로 편찬한 동북항일렬사전(東北抗日烈士傳, 1-3집, 1980·1981·1981)에는 동장영(童&#38271;&#33635;), 웨이정민(魏拯民) 등 중국인 열사를 포함, 김일성이 소속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열사들의 이름만도 19명이나 수록돼 있으나 김일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만 조선인으로 허형식(許亨植), 김책(金策), 최용건(崔庸健, 이명 崔石泉)등이 언급돼 있다. 특히 경북 선산군 구미면(龜尾面) 출신으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제3로군 제12지대 정치위원을 지낸 허형식은 그 이름이 목차의 제목에 나올 정도로 비중있게 소개되고 있으나 김일성은 이름 석자도 나오지 않는다. 
  • 1989년 흑룡강출판사가 펴낸 저우바오중전(周保中傳)이나, 1991년 중국의 인민출판사가 출간한 저우바오중(1902-1964)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에는 북한의 김일성 이름은 나오지만 그가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내 소수민족인 운남성(雲南省) 백족(白族)출신으로 지난 1931-1945년 사이 동북항일연군(제2로군 사령관)과 소련극동군 25군 예하 88정찰여단(여단장)을 이끌었던 저우바오중이 당시의 항일 유격활동을 일기체로 기록한 이 책에는 김일성과 김책, 최용건, 강신태(姜信泰, 姜成山 전 북한정무원총리 부친)등이 그에게 업무성과를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일기는 김일성이 자신이 소속된 중국 공산당 주도의 동북항일연군과는 별개로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해 보천보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는 북한측 주장과는 달리, 조선인민혁명군 창설 및 보천보전투 등에 관해 전혀 언급치 않고 있어 북한측의 그같은 주장이 조작된 것이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지휘와 관련해 가장 확실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들이지만, 대다수가 북한 핵심 권력층이거나 연로하거나 사망해 믿을 수 있는 증언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일성과 같이 빨치산 활동을 한 여자 대원들 중 중국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증언이 몇몇 나와 있으나 이들 또한 보천보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MBC의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방송 자료집에 나오는 김선(金善)의 증언록에는 보천보 사건이 있은 1937년 전후의 일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보천보 사건 자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재일교포 김찬정(金贊汀)의 ‘빨치산 만가(輓歌): 김일성과 88독립여단’(신동아, 1992년 7월, pp. 360-387)에도 김선(金善) 외에 김책과 같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소속 빨치산으로, 소련군 88여단 시절 김일성과 함께 있었다는 김정순(金貞順, 초명 김백린)이라는 여성의 증언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보천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김정순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사령관이었던 이조린(李兆麟)의 부인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지금까지 김일성이 직접 보천보주재소를 습격하고 군중들에게 반일연설을 했다는 선전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의 업적을 높이기위해 지난 1955년 이곳을 혁명전적지로 조성하고 김일성이 주재소를 습격한 후 모인 군중들앞에서 반일연설을 하는 장면을 대형 걸게그림과 조각으로 만들어 평양혁명박물관등 곳곳에 전시하고 있다. 북한주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보천보전투의 잘못된 진실을 사실인 것처럼 아직도 그대로 믿고 있는 실정이다.

    ◈보천보사건보다 규모 큰 동흥습격사건은 주도자가 김일성 아니라는 이유로 은폐

    보천보습격사건은 항일군에 의한 최초의 국내 진공작전도, 규모가 가장 큰 것도 아니다. 이보다 2년 앞서 1935년 2월 13일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이란 것이 있다.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 공산유격대원 2백여명을 이끌고 평안북도 북동부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을 습격하여 일본군 다수에 인명 피해를 준 사건이다. 당시 평안북도 경찰부 집계를 인용한 조선중앙일보 1935년 2월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일본측 피해는 사망 8, 중경상 5, 체포(포로) 10명 등 총 23명이었다.

    경기도 용인군 단삼동 출신 여성으로 1926년 길림성(吉林省) 이통현(伊通縣)으로 이사했던 이홍광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인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 사장으로 습격사건을 지휘했다. 이홍광은 그해 5월 환인현(桓仁縣)과 흥경현(興京縣)의 접경지 노령(老嶺)에 이르러 일본군과 마주쳐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환인현 해청화락(海靑火絡) 밀영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동흥습격사건은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 보천보사건보다 비중있게 보도됐으나 북한은 김일성이 지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에서 지어 버렸다. 한심스런 것은 한국내에서도 보천보사건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한 것이라며 미화하느라 크게 떠들지만, 그보다 피해 규모와 파장이 컸던 동흥습격사건은 지휘자가 김일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심을 갖는 사람도, 거론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도 언론도 거의 없다는 점이다.

    ◈김일성토벌 참여 전 만주국 최고검찰청 공안검사 증언: 북한 김일성은 가짜다

    당시 만주국 최고검찰청 사상(공안)담당검사로서 일경(日警), 만주군과 함께 김일성 토벌작전회의에 참가했던 오가타 히로시(緖方 浩)씨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김일성은 조선인이며, 나이는 34-35세(1940년 현재), 키는 5尺 4-5寸(약 165cm)의 작은 사람이며, 얼굴은 빈약했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은 위장용이 아니라 심한 근시때문이란 것을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그의 이같은 증언은 보천보습격사건을 지휘한 2군 6사장이 북한의 김일성이며 이 사람이 제2방면군장과 동일인물이라는 남한내 다수 학자들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북한의 백봉이 1968년에 쓴 김일성 전기집‘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은 219쪽에서 안경을 착용한 제2방면군장(제2대 김일성)의 사진을 게재하고 ‘림강현 오도구 밀영에서 대원들과 함께 계시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김일성 신원규명에 일생을 바쳐온 이명영 교수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1940년 말 소련으로 도주한 사실, 그리고 그의 처 김혜순이 체포된 사실은 기록에 남아있으나 그의 경력과 인상착의 등은 기록된 것이 없어 당시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하고 1970년 도쿄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오가타씨를 만나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증언을 청취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오가타 변호사의 증언 내용.

    <나는 나고야(名古屋)에서 검사생활을 하다가 만주국에 초청되어 최고검찰청 사상담당 검찰관으로 부임했다. 치안이 확립되지 않아 공비토벌이 계속되고 있었다. 마침 동남삼성(東南三省) 치안숙정공작(治安肅正工作)의 노조에사령부(野副司令部)가 구성되었을 때에 그 속에 설치된 동남부치안연락위원회(東南部治安連絡委員會)에 최고검찰청 연락부 책임자로 관계하게 되었다. 그때 야부사령부에 기타베 구니오(北部邦雄)중좌라는 아주 수완이 비상한 증가참모(增加參謀)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토벌작전의 모든 계획을 짜는 사람이며 동시에 그는 특수공작의 총책임자였는데 이 사람이 아주 머리가 빠른 사람이어서 나하고 호흡이 잘통했었다. 그런 관계로 나는 이 사람을 통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들을 수가 있었다. 김일성에 관해서도 자세한 정보가 입수됐었다. 패전 때 관동군의 문서가 전부 태워졌고 또 남은 것은 소련군이 다 가져갔으므로 지금은 찾을 도리가 없으나 관동군 제4과에는 비수(匪首)들의 인적 상황에 관한 자세한 카드가 작성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한인(韓人)이며 34-35세 정도(1940년 현재)였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김일성의 얼굴에 대해서는 지금도 아주 기억이 생생하다. 북부(北部)참모의 예하 공작대가 김일성의 사진을 입수해서 토벌사령부에 보고해왔던 것이다. 공비들이 자기네끼리 찍은 사진인데 산새(山塞)를 수색해서 선전문서들과 함께 입수한 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었는 데 그 속에서 김일성의 얼굴을 투항한 간부들을 통해 확인했었다. 키는 5尺 4-5寸 가량의 작은 사람이며, 얼굴은 빈약했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은 위장용이 아니라 심한 근시때문이란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사진을 수십장을 복사해서 사방에 나누어 주어 체포토록 했던 것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그 사진을 보면서 이놈만 잡으면 다 된다 하고 별렸던 그 얼굴이어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1946년에 만주에서부터 걸어서 북한을 거쳐 귀국했는 데 평양에 둘렀더니 거리마다에 지금 북한의 집권자인 김일성의 포스터가 붙어있는 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가 토벌하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과는 딴판의 사람인 데 놀랐던 것이다. 이래로 나는 북한의 김일성은 가짜라고 확신하고 있다.>

    한편 이명영 교수는 이 사진을 외국의 전문 사진감정기관에 보내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인인가의 여부에 대해 감정을 의뢰,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회답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한 이 사진을 김일성의 창덕학교 급우였던 조의준(趙義俊)/조사준(趙士俊)씨, 김성주(북한의 김일성)가 길림의 육문중학을 다닐때 만났던 최진무(崔震武)씨, 김성주가 남만(南滿)학원에 다닐때 만났던 이시찬(李時燦)씨, 그리고 김성주와 오가자에서 같이 살았던 이선일(李善一)씨 등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더니 모두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란 대답을 했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이 교수는 이 사진을 해방후 평양에서 김성주를 자세히 볼 수 있었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김창순(金昌順)씨와 외과의사로 평양서 김성주를 몇 번 만났던 장기려(張起呂)박사와 조진석(趙震錫)박사에 동시에 보였더니 대답은 똑같이 김성주가 아니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이 사진을 아주 희미하게 얼굴을 잘 알아보기 어렵게 해서 그들 선전책자 속에 넣어놓고 유격대 시절의 김일성이라고 거짓주장을 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근시가 아니며 키가 크고 코가 낮다. 빈약한 체격에 근시이며 키가 작고 코가 높은 제2방면군장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김일성은 처음부터 가짜였다: 소련군정청 레베데프소장의 결정적 증언

    김일성이 가짜라는 결정적 증언을 한 사람은 해방직후 평양의 소련 군정청 핵심 멤버였던 레베데프(Nikolai Georgievich Lebedev, 1901-1992)소장이었다. 1945년 8월 평양에 진주한 소련 극동군 제25군 정치사령관인 레베데프 소장은 사망 1년전인 1991년 6월과 10월 모스크바에서 가진 중앙일보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결정적 증언을 했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를 맡았으며 당시 33세의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양성하는 등 북한 정권창출에 직접적으로 간여한 인물인 레베데프에 따르면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소련군에 있을 때는 Kim Ir-sen(김일성의 소련식 표기) 아닌 ‘진치첸’ 으로 불리다, 입북할 때부터 명성만 있고 실체는 불분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을 이용하기 위해 김일성이란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했으며 소련군 장성들도 이것이 절묘한 신의 한 수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숨김 없이 말한다면 김일센의 본명이 김성주(金聖柱)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인민들에게 잘 알려진 위대한 반(半)전설의 애국 영웅 김일성장군을 상징하기 위해 김일센과 그의 부하, 그리고 당시 북한 내 공산주의자들과 상의해 ‘김일성장군’으로 소개했던 거지요. 대회 전날인 13일밤 김일센이 양복 차림으로 왼쪽 가슴에 소련훈장을 달고 찾아와 “사령관님, 이 복장으로 내일 대회장에 나가 인민들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명연설을 하겠습니다”면서 으쓱거리더군요.

    나는 소련훈장을 달고 나가면 군중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으니 떼고 나가라고 지적했지요. 그러나 연설장에서 보니 훈장을 달고 나왔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김일센의 연설원고는 우리 사령부에서 작성해 준 것입니다. 소련장교가 소련어로 작성해 고려인이 한글로 번역(외무성 부상 박길용 박사는 시인 전동혁(田東赫)이 번역한 것이라고 증언)한 것이지요. 이날 연설에서 조만식은 조선을 해방시켜 준 데 대한 감사와 민주조선 건설을 위해 투쟁해 나가자고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일센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이 주석단 앞까지 몰려와 ‘가짜 김일성이다’며 소동을 벌였지요. 조금은 난감했습니다. 주최측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몽둥이를 휘두르기까지 했으니까요. 이같은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대회 후 기자들을 만경대 김일센 생가로 데리고 가 그의 조부모·숙부와 숙모 등 친·인척 모두를 소개했지요. 그랬더니 인민들의 여론이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레베데프 소장의 이같은 언급들은 그가 1991년 8월 22일 모스크바에서 가진 장준익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예비역 중장)과 가진 인터뷰에서 재확인 된다. 레베데프 소장은 장 전 육사교장과의 인터뷰에서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대회는 ‘김일성장군환영대회가’가 아니라 ‘조선 인민해방 축하대회’라고 수정하면서 “김일성 동지의 발언이 있겠다고 소개하니까 그곳에 모인 군중은 열화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는 김일성장군에 대한 국민들의 대단한 인기를 알 수 있었고, 연설이 끝난후 김일성(김성주)은 진짜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여론이 비등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로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이름으로 행세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간부들에게 가짜 김일성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현 모란봉경기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는 전설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씨는 “연설에 앞서 소련 점령군사령관 스티코프 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밝힌바 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티코프는 여기 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국내 학계에서 ‘가짜 김일성’설은 강한 비판을 받게 된다. 서대숙(徐大肅) 미 하와이대 교수는 북한의 김일성이 각각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과 동북항일연군 제2방면군장을 지낸 김일성과 동일 인물로서 보천보 사건 등 1930년대 중·후반 남만주와 한만국경지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김준엽(金俊燁), 이정식(李庭植)교수도 북한의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항일투쟁을 한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이들은 김일성의 항일운동은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며, 중국공산당 휘하에서의 운동으로 한국민족주의 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의 본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평가했다. 1980년대 이후 이종석 교수 등 이른바 진보적 학자들과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 등은 이영명 교수 등의 ‘4명의 김일성 설’을 냉전시대 반공선전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한국민족해방운동사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 가짜론’은 남한에서 처음 제기된 것이 아니다. 그가 평양에 등장한 이후 북한 주민들 내부에서 먼저 제기됐고 이어 남한 내 조선공산당, 우익진영 등에서 거의 동시에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우익진영이 김일성을 비난하려는 목적에서 가짜설을 만들어 퍼뜨린 것이라면, 박헌영과 여운형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굳이 가짜론을 만들 필요 없이 ‘공산주의자’라는 딱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함흥지방법원의 ‘혜산 사건’ 판결문 자체에는 ‘제6사장 金成柱’라고만 적혀 있을 뿐 그 밖의 신원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없다. 그것은 그가 체포, 기소된 형사피고인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결문에 첨부된 혜산사건 피고인 신문조서에는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아래는  보천보습격사건의 지휘자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라는 즉, 북한의 김일성은 상관의 직함과 업적을 도용한 가짜이며 진짜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23개항을 요약한 것이다.

    ⑴보천보사건 이후 일제가 국내 연계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188명을 기소한 사건인 이른바 혜산사건 피고인들의 2군 6사장 김일성 신원에 대한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신문(訊問)조서(1974년 출간된 이명영 저 ‘김일성열전’을 보면 2군 6사장 김일성이 기소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 석자만 판결문에 나와 있다. 김일성이 기소되지 않은 것은 혜산사건 관련자 검거기간중 이미 사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함경남도 경찰국 고등과 경부(警部)는 “2군 6사장 김일성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사건의 핵심인 만큼 200명(정확히 188명)에 가까운 피고인들에 대한 신문조서에 2군 6사 김일성의 신원이 자세히 기록된다는 것은 조서 작성상의 상식”이라고 말했다. 실제 혜산사건 피고인들은 수사관 신문과정에서 2군 6사장 김일성의 정체에 대해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1901년 함남출신,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붉은 군대’(赤軍)를 거쳐 입만(入滿)한 후 동북항일연군 입소>라고 밝혔다고 이치하라씨는 증언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12년 평남 대동군출신으로 학력은 길림 육문중학 중퇴다. 본명이 金成柱라고 스스로 주장하나 사실관계나 정황으로 보아 金聖柱일 가능성이 높고 본명까지도 조작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런 증언으로 보면 보천보습격을 주도한 2군 6사장은 북한의 김일성이 절대 아니다.

    ⑵숨진 2군 6사장 김일성의 가족사항이 북한 김일성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제 내무성 경찰국의 특별고등경찰 조사보고서(보고서에 따르면 2군 6사장 김성주(金成柱)에게 김성보(金成甫)라는 이름의 사촌형이 있다고 기록돼 있으나 북한의 김일성은 종손 장형으로 사촌형이 결코 없다. 그리고 ‘성보’는 ‘성주’, ‘철주’, ‘영주’로 이어지는 북한의 김일성 가계 항렬(柱字)이 아니라는 점이다)

    ⑶보천보사건 5개월 후 2군 6사장 김일성의 사살을 확인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檢事局) 보고서 및 김일성 사살을 전한 당시 언론(경성일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보도 내용

    ⑷2군 6사장 김일성을 사살한 만주군의 진술을 담은 만주군 기관지 ‘철심’(鐵心) 보도내용

    ⑸2군 6사장 김일성의 인상착의를 잘 아는 주민들의 진술을 토대로 김일성의 참수된 목(얼굴부분)을 검시, 신원을 직접 확인한 만주군 장교의 증언(2군 6사장 김일성은 야영지에서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의 인상착의를 잘 알고 있었다)

    ⑹북한의 김일성이 2군 6사장이 아니라 이 부대의 일개 부대원이라는 친동생 김영주와 김일성의 중국인 친구 장아청의 증언

    ⑺보천보습격을 지휘한 사람이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라는 박달(朴達, 1910-1960), 박금철(朴金喆, 1912~1967 ?)등 국내에서 2군 6사장을 도와 습격에 참가한 사람들의 증언

    ⑻88여단 시절 1영장(대대장) 김일성의 통역관이었고 6.25전쟁기간중 중장계급을 달고 조선인민군 작전국장을 역임했던 소련의 고려인 출신 유성철(兪成哲, 1917-1995)은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전사하고, 그후부터 김성주가 김일성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⑼소련의 고려인으로 88여단 1대대장 김일성밑에서 부대대장을 역임했으나 해방후 북한으로 오지 않고 소련군에 남았던 박성훈은 북한 김일성은 1939년 가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만주 빨치산 영웅 김일성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했다고 증언했다(보천보습격의 주역 2군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분명히 이야기하면서도 전사한 해를 1937년 아닌 1939년으로 잘못 말한 것이다.)

    ⑽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후 북한에서 내무성 부상까지 지내다 1959년 소련으로 망명한 강상호(姜尙昊, 1910-2000)도 북한 김일성이 상관인 동북항일연군 2군6시장의 이름을 도용했다고 증언했다.

    ⑾소련군정 당시 평양에서 중좌로 김일성의 정치상담역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Mekler, 1909-2006)는 1944년 88여단을 방문하여 여러 조선인들을 면담한 결과 김일성의 이름은 전사한 존경받던 전임 게릴라 지도자(2군 6사장)의 이름에서 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

    ⑿해방 직후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은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하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우연히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박금철과 동행하게 되면서 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사람은 가짜로 보였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보천보습격을 도왔던 박금철은 사전에 국경을 넘어 2군 6사장 김일성을 만나 보천보의 지형 등 많은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를 잘알고 있었다.

    ⒀이진구(李鎭九, 1898~?) 목사는 1941년 7월 함흥형무소에서 혜산사건으로 수감된 박달과 같은 감방에 있었는데, 그때 박달이 자기 나이는 31세, 보천보습격사건의 2군6사장 김일성의 나이는 10년 위인 41세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증언은 2군6사장이 1901년생이라는 수많은 증언과 거의 일치한다.

    ⒁사살된 2군 6사장의 후계자로 제2방면군장으로 승진한 제2대 김일성의 깡마르고 안경낀 사진(3명의 김일성 중 제1대 김일성과 제3대 김일성(북한의 김일성)을 제외한 제2방면군장(제2대 김일성)만이 유일하게 동북항일연군시절의 사진 3장을 남겼다. 일제 토벌대가 수거한 이들 사진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은 한결같이 빈약한 체격에 키가 작고 코가 높고 근시로 안경을 착용하고 있는데 북한은 이 3장의 사진 중 흐릿하게 찍혀있는 사진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을, 그것도 변조해 북한의 김일성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 토벌대가 제2방면군장의 사진과 함께 인상착의까지 공개하고 사진을 복사해 수배전단까지 뿌렸기 때문에 보천보사건의 2군 6사장이 죽지않고 끝까지 부대를 이끌고 1945년 해방때 까지 계속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인 북한당국으로서는 해방후 2군 6사장, 제2방면군장, 북한 김일성이 모두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⒂제2방면군장이 1939년 5월 3일 밤 200여명의 병력으로 함남 삼수군 호인면의 반절구(半截溝)를 습격하다 중상을 입었고 결국 이 후유증으로 5년후 병사한 사실(북한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과 동일인물이라면 전투 중 중상을 입었어야 하는데도 북한 김일성은 항일투쟁중 중상을 입은 사실이 전혀 없다)

    ⒃1939년 일만군경에 체포된 제2방면군장의 처 김혜순의 증언 및 죽은 2군 6사장에게도 부인이 있었다는 여자대원의 증언(제2방면군장이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인물이라면 북한은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 김정숙을 김일성의 첫 부인이자 항일의 여성영웅이라고 밝혀온 만큼 김혜순과 김정숙은 동일인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두 여인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또한 제1대 김일성 2군 6사장에게도 장백현의 한 농가에 최(崔)씨 성을 가진 부인이 살고있었다는 6사 소속 부대원의 증언이 있고 실제 일제 경찰에서 이 부인을 체포하려 갔다가 도망가고 없어 허탕친 일이 있다. 따라서 제2군 6사장, 제2방면군장, 북한의 김일성이 모두 동일인이라면 이들의 부인도 모두 동일인이어야 하는 데 제각각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은 이처럼 제1대 김일성과 제2대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으로 조작했지만 이들의 부인만은 조작할 수 없었다)

    ⒄1940년 당시 만주국 최고검찰청 사상담당 검사 오가타 히로시(緖方 浩)씨가 일본 관동군 제4과(課)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에 관한 기록을 토대로 한 증언(김일성은 조선인이며, 나이는 1940년 당시 34-35세, 키는 약 165cm의 작은 사람이며, 얼굴은 빈약했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은 위장용이 아니라 심한 근시때문이란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은 당시 28세로 신장 175cm의 건장한 체격이었고 안경을 끼지않았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시기 사진은 무슨 이유인지 한장도 남아있지 않아 그가 안경을 착용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1940년 말 일본관동군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소련 연해주로 패주한 뒤 해방때까지 소련군 88정찰여단에서 활동할 때 모습이 담긴 사진, 그리고 해방이후 북한 최고지도자로 군림하던 1970년대 까지도 안경을 낀 모습은 북한의 어느 신문방송, 홍보선전기록물이나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육문중학 재학시절의 사진이 한 장 남아있으나 이것도 안경을 끼지않은 모습이다.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투쟁때의 장면들은 100% 삽화 등 그림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여기에도 안경을 착용한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⒅만주국군 기관지 월간 ‘철심(鐵心)’은 1937년 5월호에서 보천보습격을 주도한 2군 6사장 김일성이 30세 가량의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고 보도했다. 1937년 당시 북한 김일성의 나이는 25세였고, 최종학력은 길림 육문중학 중퇴인만큼 보천보습격사건 주도자는 다른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⒆일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36년 11월 27일자는 2군 6사장 김일성의 나이가 37-38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혜산진 출신으로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만주로 왔다고 보도했는데 이같은 사실은 보천보습격의 주역이 북한의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김일성은 1912년 생으로 1936년 당시의 나이는 불과 24세다. 또한 김일성은 일만군의 추격을 피해 1940년 연해주로 피신하기전에는 소련에 간 사실이 없다.

    ⒇만선일보 1940년 4월 18일자는 북한 김일성이 만주사변(1931년) 때 죽은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의 이름을 습명(襲名)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1931년에는 빨치산의 활동도 없었고, 유명하다는 비수 김일성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보천보사건 5개월이 좀 지난 1937년 11월 13일에 전사한 2군 6사장 김일성의 이름을 습명한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가 보도된 시점 북한 김일성은 아직 만주에 있었다. 그는 일만군의 토벌공세를 피해 1940년 10월 23일에 소련의 연해주로 피신했다.

    (21)2군 6사장 김일성이 만주 통화성(通化省) 양목정자에서 전사한 후 통화성 주민들이 추모비 건립 모금운동을 벌인 사실

    (22)일본인 나가오카 도모타로(永丘智太郞)가 1938년에 쓴 ‘극동의 계획과 민족’(極東の計劃と民族), 그리고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의 1942년 문집 ‘압록강’(鴨綠江)에 보천보습격을 이끈 김일성이 함남출신으로 서술돼 나온다는 점(북한의 김일성은 평남 대동군 태생인만큼 이들 책에 나오는 2군 6사장은 결코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다)

    (23)당연히 기록돼야 할 것으로 보이는 중국측 자료에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을 이끌었다는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