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교육 개혁의 과제⑥ 공교육 목적과 이념 혼란의 문제- 교육목표의 모호성과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경제관
  • 1960년대에 30대였던 우리의 대선배들이 산업화를 이룰 때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의 젊은 세대가 부러워할 만큼 그리 희망에 찬 시대는 아니었다. 6·25 직후 한국 경제는 국영기업으로는 한국전력, 대한광석 정도가 있었고, 민간기업으로는 자그마한 경성방직 등이 고작이었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자리 얻기가 바늘구멍이 아니라 직장 그 자체가 아예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어렵던 시절, 미국의 원조를 전후 복구 자금으로 삼고, 가난한 나라에 차관을 빌려준 서독 같은 우방의 도움으로 조금씩 산업화를 이루면서 나라 형편이 펴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공사(公社) 구분 없이 합심해서 열심히 공장 짓고 수출하여 국가 총생산을 늘리는 데 온 나라가 힘을 모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았던 정주영 회장은 현장을 둘러보러 왔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공사 현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깜박 졸았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온 나라가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었다. 그렇게 해서 전기, 전자, 중공업 등 대기업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한국은 한 세대 만에 근대 산업국가가 되었다.

    전세계 꼴찌에서 두 번째로 가난했던 나라

    아래 이야기는 김용선 前 LG인화원 원장의 이야기다. 초창기 한국의 전화교환기 국산화를 통해 오늘날 한국이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게 한 숨은 공로자의 한 사람이다. 아래 이야기는 김 원장이 대학을 막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을 즈음인 6·25 직후 황폐했던 시절에 공학도 엔지니어로서 한국 경제를 만들어나가던 모습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가 잘 먹고 평화롭게 잘 산다고는 하지만 우리 세대 같이 많은 경험을 해 보지는 못했고, 앞으로도 못 할 것이다. 한국의 우리 세대는 건국과 부흥, 산업사회 만들기를 한꺼번에 했다. 1인당 연 소득 80달러, 세계 180개 나라의 꼴찌에서 두 번째 나라가 10여 등까지 올라 왔다는 말은 많이 들어서 알 것이다. 그러나 뒤떨어진 것은 경제만이 아니라, 당시는 사회 전체가 미개하고 야만스러웠다. 우리는 지나치게 사회 전체가 ‘찬란한 문화민족’이라며 자화자찬만 함으로써 자라나는 젊은 세대에게 객관적인 역사를 배우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못 하는 경향이 있다. 인생 황혼기에 들어서서 되돌아보니, 일생 동안 참 행복하고 운 좋은 직업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을 새삼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시절을 다시 한 번 더 살겠느냐고 묻는다면 사양할 것 같다.”

    김 원장이 사회 초년병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던 때는 아직 재벌이나 대기업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민간기업이라야 경성방직이 제일 큰 기업이었던 시절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취업난이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지만, 당시에는 취직할 기업 자체가 없었다. 김 원장은 지나고 보니 보람 있고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면서도 그런 고생을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전 세계 꼴등에서 두 번째 나라에서 10위권으로 올라왔으면 정말이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데 세상일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런 기적도 만들 수 있지만 잘 못하면 다시 원위치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태도를 공교육에서 심어 주어야 한다.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이런 상황이 만고불변의 환경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첫 직장으로 기업체는 갈 데가 없었고, 전공을 살려 체신부에 입사했다. 임용장을 받고 조금은 실망했다. 정부 규정상, 대학졸업생은 4급(지금의 7급-주사/기사)을 주어야 하는데, 체신부에 당시 4급(기사) T/O가 없어서 5급(기원)으로 발령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고졸 취급이다. 지금 같으면, 쳐다 보지도 않고 돌아 서서 나왔을 텐데, 졸업 동기 총 5명 모두 아무 소리 안 하고 취직했다.”

    "수많은 외국인이 일하고 있는 나라에서 일자리가 없다니…"

    이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김 원장께 한국 젊은이들의 ‘헬조선’ 현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나는 김 원장보다 거의 한 세대 차이가 나고,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1980년대는 이미 산업화가 활발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취직 걱정 같은 것은 거의 없고 오히려 입사할 직장을 여러 개 합격해 놓고 어느 곳이 좋을까 고민하던 시절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터라 지금 젊은이들의 청년실업 문제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김 원장께 걱정스럽다고 했던 것인데, 나로서는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김 원장은 “지금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서 많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일자리 없다며 청년실업이니 헬조선이니 하는 것은 이해를 못 하겠다”라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김 원장 세대처럼 불모의 땅에서 산업을 개척해나가던 시절을 겪은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는 반응이다.

    나는 김 원장과는 한 세대 후의 사람이라서 그런 고생을 못 해보고 사회생활을 했던 터라 요즘 젊은이들이 겪는 좌절감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한국의 기업인, 사실은 한국 사회 전체가 언젠가부터 기업가정신을 잃기 시작하면서 청년들이 가고자 하는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 짐작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된 배경은 ‘87년도부터 ‘민주화’니 하며 사회 분위기가 반 기업 정서에 오염된 탓이다. 지금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그런 ‘민주화’는 오히려 책임 있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휩쓸려 간 퇴행이었다. 

    둘째는 공교육 정책에서의 실패를 들 수 있다. 세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두가 대학을 가게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산업체에서 필요한 자리에서 혁신과 창조를 해 내고 제 역할을 할만한 실력 없이 그저 대학 졸업장을 양산한 것이 오늘날의 청년 실업을 만들었다고 본다. 실력이 안 되면 눈높이를 낮추어서라도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 하는데 ‘평등’이 강조되는 풍토에서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서 대우가 못 미치는 중소기업은 자존심상 갈 수가 없다. 이 부분은 한국의 공교육 종사자를 포함하여 모든 지식인들이 책임을 느껴야 한다.

  • 2년간의 현장 경험

    “들어가자마자, 우리 5명에 대한 전무 국장님의 특별훈시가 있었다. "자네들은 2년간, 현장 실습을 해야 하네. 도중에 ‘빽’을 써서 사무실에 들어왔다간 당장 파면이야. 알겠나!" 그 국장님은 새로 부임한 장관이 청사에 도착해도 얼굴 도장 찍으러 현관에 마중 나가지 않고, 후에 장관실에 공식 인사만 간다는 소문이 난 자신감 넘치고 강직한 분이었으니, 누가 감히 그 명을 어기겠는가? 그리고 쫓겨나면 갈 곳도 없다. 꼼짝없이 2년간 현장에서 일했고, 그 경험은 후에 사무실에서 일할 때 큰 자산이 되었다. 

    제일 처음 한 일이, 시내의 대로(大路) 한가운데 있는 맨홀을 열어 지하에 매설된 전화 케이블의 전식(電蝕-전류로 인한 부식 정도)을 측정하는 일이었다. 그때 서울 시내에는 노면전차가 달렸는데, 그 직류전류의 일부가 지하 케이블을 타고 흘러서 케이블에 손상을 주어 전화고장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일은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나 측정 장비를 손수레에 실어 시내로 끌고 가서, 맨홀 뚜껑을 열고, 땡볕에 밀짚모자를 쓰고 일하는 모습은 별로 남에게 보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측정작업이 끝나고 현장 사람들과 같이 보수(maintenance)작업을 하게 되었다. 현장 사람들은 일제 때부터 일하던 나이 많은 층과, 해방 후에 들어온 젊은 사람의 두 층이었다. 놀란 것은 그들이 쓰는 직업용어가 거의 전부 일본어, 또는 일본식 발음의 영어임을 발견한 일이었다. 케이블 연결 작업을 하면서 자꾸 "칩프, 린구"라고 하기에,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무슨 말이든 상관없고 ‘칩프'와 '린구'가 틀리지 않게 그렇게 복창하면 된다는 대답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케이블 안의 통신선을 연결할 때 한 쌍(pair)이 틀리지 않게 하려고, 그 옛날 일본에 온 서양사람들이 "Tip, Ring"이라 하던 것을 일본인들이 "칩프, 린구"라 발음한 것을 우리가 귀로 들어 배운 것이었다. 이런 예는 후진국의 비애지만, 모르면 그게 ‘최신 지식’인 것이다. 우리 일상에 이런 ‘최신 지식’을 자랑하고 숭상하는 일이 지금도 많은 것 같다. ‘자유’, ‘권리’에서 시작하여 ‘민주주의’, ‘대중’, ‘사회정의’ 등의 정치용어는 물론이고, 일상 무심히 쓰고 있는 서양 수입의 개념들을 제대로 알고 쓰는지 의심스러운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우리는 정치 철학적 개념의 말뿐 아니라 입고 있는 옷, 타고 다니는 차, 기술 모두가 서양에서 만들어진 것을 도입해서 쓰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근대화 이후 짧은 기간에 배우고 사용한 것들이라 그 이해도가 깊지 못하다. ‘민주주의’란 단어만 하더라도 서양의 ‘democracy’는 ‘민주정체(民主政體)’ 정도의 의미일 텐데, 이 단어가 일본을 통해 ‘민주주의’라는 용어로 도입되다 보니 ‘주의’ 즉 ‘ism’에 강세가 놓여져 이 단어가 무소불위의 권위를 갖는 단어처럼 되었다.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란 제한된 민주주의, 즉 의회의 입법 기능이 자유를 보장하도록 개인이든 기업이든 보편적으로 강제할 사항만을 다루어야 하며, 특정 대중이나 이익 집단이 원하는 대로 입법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즉 목적성이 없어야 한다는 법치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반면에 대중이 원하는 것은 모두 입법할 수 있다는 발상은 포퓰리즘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것이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는 히틀러나 모택동 식의 전체주의로 이행될 가능성이 크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 미국의 관대함

    “2년간의 현장 기술자 생활을 마치고 사무기술직으로 돌아와 자동전화교환 설비의 계획을 담당하게 되었다. 수동식 설비담당을 약 1년 하고 자동식 설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업무의 규모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질이 달라졌다. 당시, 국내에는 작은 규모의 자동교환기 생산 업체가 하나 있었으나, 품질과 규모로 보아 외국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더욱이 일제시대에 설치되어 전쟁으로 많이 파손된 설비로는 전후 복구의 수요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미국의 원조 당국(USOM)1의 주관으로 해외 교환기의 국제입찰을 하게 되면서 업무가 국제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제구매 업무를 맡은 외자청(OSROK)과의 협조 관계가 생겼고, 외국 제조사에서 온 서양사람 기술자와 영업사원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최하위 체신부 말단 직원으로서는 천지개벽할 일대 변화였다. 조달청 공고번호 336-M으로 자동전화교환설비 만 오천 회선의 국제입찰을 했는데, 내가 본부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낙찰자가 결정 된 상태였으므로 나는 관계서류를 뒤져 그 경위부터 공부해야 했다.

    발견한 것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미국의 원조 당국이 미국자금으로 국제경쟁입찰로 한국에 자동교환설비를 사주면서, 그 경쟁입찰에서 선정된 기종을 한국의 표준 기종으로 삼고, 앞으로 계속 그 기종을 사도록 조건을 달아 놓은 것이다. 참으로 관대하고도 합리적인 조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미국 아닌 나라의 기종이 선정되더라도 그것을 계속 표준으로 삼고 사라니. 전쟁으로 황폐한 설비를 사 주는데 끝나지 않고, 미국의 손익을 초월하고, 한국 통신설비 표준화에 지침을 제시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있는가 놀랄 정도였다. 입찰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일본의 자동교환기 제조회사가 참여했는데, 일본이 성능미달로 탈락하고 독일 지멘스(Siemens)사의 EMD 방식이 낙점 되었다. 이때 탈락한 X-bar 방식과, 선정 된 EMD 방식의 성능 우열 논쟁이 그 후, 30년간 계속되는 발단이 된 것이 이 입찰이었다.”
  • 미국의 무상원조 중단

    여기서 잠깐 기업체에 취직하여 사회에 나와 조직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김 원장은 공학도지만 어찌하다 보니 외국 기술자들과 상담하는 일, 원조 자금으로 국제 조달을 하는 등 일의 내용과 질이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어느 조직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은 단지 월급 받고 생활비를 버는 것을 넘어, 일을 통하여 그 개인이 개발되고 독립적이며 창조적인 개인으로 거듭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은 그 종류가 무엇이 되었든 프로의 정신을 갖고 일하면서 그 사람 자아의 일부가 된다. 꼭 권력을 갖는 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을 가진 중책을 맡은 사람이 자신의 직업 정신을 잃는 경우처럼 비열해 보이는 것도 드물다. 위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 또 한 가지는 당시 미국은 공산 혁명의 저지선 역할을 해낸 한국의 진정한 우방으로서, 전후 한국의 복구와 이어진 산업화에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컸음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만은 한국이 잘살게 될수록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생공화국의 교환설비 표준화까지 자기네 돈으로 해주려 했던 그 ‘마음씨 좋은 아저씨’도 힘의 한계에 도달한 듯, 위에 언급한 공고번호 336-M 이후, 한두 번 미국자금으로 서독 지멘스사 교환기를 구매한 후, 드디어 무상원조를 중단하고, 유상인 차관 제공 형태로 바뀌었다. 차관 제공자는 미국의 개발차관자금(Development Loan Fund)라는 국책기금인데, 속칭 DLF 차관이라 불렀다. 미국 차관으로도 몇 년간 계속 독일교환기를 구매했다. 앞에 언급한 표준화 정책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다가, 미국의 사정이 더 급해졌는지, 원조든 차관이든, 미국자금으로는 미국제품만을 사야 한다는 소위 ‘Buy American’ 정책이 공표되었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선심이 끝난 것이다. 그 당시에도 미국은 유럽에 대한 마셜 플랜 원조로 힘을 소진하고 그 후 닉슨 대통령이 미국통화(달라)의 금 태환 정지 조치를 할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었던 것이다. ‘Buy American’ 정책으로 미국 원조로 외국 설비를 구매할 때는 미국제 설비를 사야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교환기 같은 국가의 기간 설비의 표준화는 너무도 중요한 것이므로, 표준 기종으로 자리 잡은 지멘스사 교환기를 사 오려면 독일의 차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샘플을 참고해서 독일에 차관을 신청하는 문서를 만들어야 했다.

    선진국에 '꿈같은' 기술연수

    외국 기종으로 표준화하면, 외국의 산업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당장 자체 기종을 개발할 만한 능력도 없다. 그렇다면, 현재 표준화되어 있는 기종을 국내 생산하게 함으로써 외화도 절약하고, 원 생산자에게 기술 이전, 기술 지도의 의무를 지게 하여 국내 기술 향상과 국내 산업 육성을 도모하겠다는 것이 그 시점에서, 한국 정부로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도 현명한 방안이었다. 그 취지와 방침이 서독 지멘스사에 공식으로 전달되었다. 표준화 기종의 공급자 위치를 선점한 지멘스로서도 다른 방안이 있을 수 없었으므로, 즉시 한국 내 생산 파트너 물색에 착수하게 되었다. 1963년 가을의 일이다.


    당시 부산 동래에서, 치약, 비누, 화장품 같은 일용품 화학공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락희화학공업사는 다음 사업분야를 전자공업으로 정하고 1958년에 금성사를 설립하여 트랜지스터 라디오, 선풍기, 전화기 등의 생산을 시작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마침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새마을 운동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매출을 신장하여 새로 출발한 금성사의 기반을 든든히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지멘스는 금성사의 이런 실적을 보고, 통신기 분야에 이미 다른 선발 기업이 두 개 있었으나, 신참자 금성사를 파트너로 결정하였다. 

    금성사를 선택하면서, 지멘스는 교환기 생산설비를 갖추기 위한 차관 500만 마르크를 금성사에 제공하기로 하고, 금성사는 동래 온천장 근방에 사들인 대지 위에 2,000평의 통신기 공장 건물을 세우기로 했다. 국산화 업무의 준비를 진행하는 한편, 지멘스사는 체신부의 관련 공무원 3명을 유럽 여행에 초대했는데, 내부 인선 결과 내가 제일 ‘졸자’로 국장과 계장을 모시고 따라가기로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대에 누리기 힘든 꿈만 같은 여행이었다.”
  • 민간기업으로 이직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흔히 기술이전이라고 하는 과정이 어떤 식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에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선진국의 발달된 제품을 도입할 때 국내에 생산 공정을 이전하여 조립 생산을 시작하고, 차츰 부품들을 국산화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 국내에 제조 공정을 만들려면 다수의 사무기술직 직원들이 차출되어 해외 사업 파트너의 공장에 가서 여러 달씩 기술 연수를 했다. 이런 일이 1980년대까지 30여 년 정도 지속되었는데, 업무 연수 차 선진국에 파견된 직원들의 눈에 비친 미국, 유럽 선진국의 모습은 부러움 그 자체였다. 우리도 하루빨리 선진국이 되어 남부럽지 않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를 새기며 귀국하던 시절이었다.

    “초대 여행에서 돌아와 두어 달 지나자 금성사에서 자기 회사로 와 달라는 제안이 들어 왔다. 지멘스사와의 제휴로 시작하는 EMD 교환기 국내생산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다. 체신부의 일이 재미있기는 했으나. 공무원 월급으로는 생활이 안 되었다. 계급은 5급 기술직 공무원(기원)으로 들어 와 4급(기사)을 거쳐, 3급(기좌, 사무관 급)까지 올랐으나 월급은 6,000원이 조금 넘어, 갓 태어난 첫 딸에게 먹이는 분유 두 깡통 값 밖에 안 되었다. 

    부친 없는 가장으로서 모친과 처에게 체면도 안 서거니와, 관청에서 비 합법적으로 보태 주는 각종 보조금은 항상 감사 대상이고 준 범죄자 내지 예비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이라 기분도 나빴다. 보수도 많지 않고 사회적 명예도 보장되지 않는 공무원이란 평생 할 직업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라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직속상사인 연구소장은 "월급이 적어서 말리지는 못하지만, 회사는 개인을 위해 일하는 곳이고, 관청은 나라 전체를 위해 일하는 곳인데, 자꾸 빠져나가면 긴 눈으로 볼 때 나라는 어떻게 되겠느냐"라고 한탄을 하셨다. 

    옳고 고마운 말씀이지만 그 월급으로, 더구나 범죄 예비군 취급 받고는 살 수 없었고, 부친이 겪은 수십 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생각해 보아도, 나 자신은 조금 다른 길을 택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직 후 무엇보다 생활이 안정되었다. 6,000원이던 월급이 14,100원으로 올라 갓 난 아이에게 분유를 넉넉하게 먹일 수 있게 되었고, 감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져 사회를 떳떳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관청인 체신부에서 일 할 때는 ‘방식 표준화’나 ‘국산화’는 나라를 위해 꼭 실현되어야 할 일이기는 해도, 나의 입장은 그런 일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고, 공무원으로서 지도, 감독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금성사에 와서 그 표준형 교환기 국산화를 직접 담당하게 되고 보니, 표준화와 국산화의 성패가 바로 나의 개인적인 성패라기보다 생사에 직결된 문제가 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국산화에 실패하면 표준화가 안 되고, 우리 회사가 만드는 교환기가 표준화 기종에서 떨어지면, 회사도 문제지만 내가 회사에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공무원에서 사기업체로 직업을 바꾸고 보니 이렇게 큰 변화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날 공무원이 되겠다고, ‘공시족’이니 하며 수십 대 일의 시험에 합격하겠다고 몇 년씩 고시촌에서 머리를 싸매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지금의 공무원 처우는 예전처럼 사기업체의 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 아니라 연금 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더 나은 수준으로 올라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무원이 더 매력적이게 만들어 놓은 사회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비대한 정부는 생산적인 데 사용해야 할 자원을 비 생산 영역에 돌리는 결과를 빚는다. 그때와 지금 중 어느 때가 더 발전성이 있는가? 위 이야기에서 김 원장이 공무원일 때의 ‘국산화’는 그저 당위의 문제였던 데 비해, 사기업체에서는 개인과 조직의 생사 문제가 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쉽게 말해 공무원의 ‘국산화’는 실패해도 정년까지 월급을 못 받는 일은 없는 처지이고, 사기업체에서의 ‘국산화’는 자신의 일터가 없어지는 사활의 문제가 된 것이다. 어느 쪽이 실질적이고 진정한 성과를 낼 것인지, 지식과 노하우의 축적과 혁신이 어느 쪽에서 이루어질 것인 것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공무원 숫자를 늘려 실업 통계를 좋게 하려는 발상은 정말이지 이중으로 이치에 맞지 않은 발상이다. 생산적이지 않은 쪽으로 인적 자원을 돌린 데 더하여, 머리 좋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가 의미 있게 하려고, 결과적으로는 기업활동을 옥죄는 규제를 더 촘촘하게 만들게 된다. 그 옛날 공무원을 그만두려는 직원에게 공무원은 나라를 위한 일이고 사기업은 개인을 위한 일이라 걱정스럽다고 한 김 원장의 상사가 오늘의 상황에서는 어떤 말을 했을지도 궁금하다. 아니, 그 좋은 공무원을 마다하고 사 기업체로 오려는 사람이 없을 테니 그런 걱정을 할 기회조차 없겠지만 말이다. 다음 회에는 김 원장의 이야기를 통해 기술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생각해볼 것이다.

    각주

    1) 주한미군 원조사절단(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US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