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이 靑에 있던 노무현정권 시절,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한발짝도 진전 없어
  • ▲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총리대신이 지난 2004년 7월 제주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이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뉴시스 사진DB
    ▲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총리대신이 지난 2004년 7월 제주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이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뉴시스 사진DB

    노무현정권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가 자신들이 집권하고 있을 때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해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섰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을 때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조차 못한 사람'으로 지목된 것이 분하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워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발끈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의 지적이다.

    더민주 문재인 대표는 14일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에 대한 입장문〉을 내고, 최근 한일 간의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문재인 대표는 "위안부 협상이 최상의 결과라며 인정해달라는 대통령의 자화자찬에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럽다"며 "최종적·불가역적 운운하며 법적 책임이 이미 끝났다는 협상의 내용을 어느 누가 동의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소녀상 철거를 떠들고 있는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한 마디 반박도 못하고 있다"며 "야당의 정치공세라고 치부하는 정부의 난청이 답답할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에는 그러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당연히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협정 단계에서 '청구권'과 '보상' 문제에 포함되지 못했다.

    처음 이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노태우정부 때의 일이다. 1990년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는 모 일간지에 '정신대 취재기'를 연재했고, 이에 힘입어 이듬해 김학순 옹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했다.

    이에 다니노 사쿠타로(谷野作太郞)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은 "보상 문제는 이미 1965년의 청구권 협정으로 완료됐다"고 밝혔다.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항에서 "한국과 일본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 간의 재산·권리·이익·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고 규정했고, 3항에서 다시 "한국과 일본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 본 협정의 서명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해서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노태우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언급하며 대일(對日) 무역 역조 개선을 촉구했고, 이에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내각총리대신은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하면서도 "국가간 해결은 끝났다"고 강조했다.

    1993년 정권이 바뀌고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진일보한 자세를 취했다. 그는 물적 보상 요구를 거둬들이는 대신 진상규명과 사과를 촉구했다. 이에 같은 해 다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 관방상은 "배상 이외의 대응 방식을 모색하겠다"고 밝혔고, 이는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내각총리대신이 패전 50주년을 맞이해 도쿄 시내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쟁 피해자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던 '8·15 시민선언 집회'에 참석해 "아시아국민들 특히 위안부들에게 감내할 수 없는 고통과 굴욕을 안겨준데 깊이 사과드린다"고 하는 상황으로 진전됐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라는 민간 재단이 창설됐고 1997년 1월 이 재단은 우리나라의 위안부 피해자로 추산되며 당시 생존해 있던 인원 200여 명 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61명에게 기금을 전달했다.

    다시 정권이 바뀌어 1998년 김대중정부가 성립하자,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해결 시도가 시들해졌다. 이에는 2002년에 우리나라와 일본이 공동으로 월드컵을 개최하게 된 영향도 있었다. 정권 초기인 1998년 4월 외교통상부는 "배상 요구는 않겠지만 과거 행적을 반성하고 사과하라"고 일본에 촉구해, 이전 정권의 기조를 이어갈 뜻을 비친 뒤로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 사이 2011년 일본대사관 맞은 편에 위안부 소녀상이 제막됐으며, 이 무렵부터 일본은 유감을 표명하고 철거를 요구하는 역공에 나서게 된다.

    더민주 문재인 대표가 청와대에서 민정수석·시민사회수석·비서실장 등을 역임하며 영화로운 자리에서 승승장구하던 노무현정권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의 암흑기였다.

    이 때 정부 차원에서는 이렇다할 해결의 노력이 전무했으며, 외교적 성과는 물론 접촉조차 미진했다. 이같은 상황은 정권이 바뀌고 난 뒤인 2011년 12월 이명박 대통령이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총리대신과의 교토 정상회담에서 일본 측의 '중대결단'을 촉구할 때까지 계속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앞선 13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이 점을 우회적으로 꼬집은 바 있다.

    노무현정권 5년 동안은 아무런 문제 해결의 전망이나 비전이 없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한 해 한 해 연세만 들어가던 때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피해자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이 89세로 정말 시간이 없다"며 "한 분이라도 더 생존해 있을 때 사과받고 마음의 한을 풀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물었다.

    이어 "역대 대통령과 달리 나는 유엔이나 국제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이야기했다"며 "결과를 놓고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정작 자신이 책임 있는 자리에 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조차 못해놓고 이제 와서 무효화를 주장하고 정치적 공격의 빌미로 삼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고 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