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언론 함께 뭉친 日, 자기 정부 깍아내리기 바쁜 韓
  • 외교(外交)는 수사(修辭)다. 국가간 외교 협상의 성패(成敗)는 잘 가꿔진 수사에서 엇갈린다.

    탄탄하게 다져진 수사는 단단한 국민 여론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튼튼한 여론은 국제사회를 향해 내세울 명분을 세우고, 주변국들에 대한 설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설득력을 가진 외교 협상이 비로소 국제 사회에서의 실효성을 가지게 된다.

    결국 외교 협상이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수사'가 근본이며, 시작이다. '수사'라는 것이 꼭 다듬고 꾸며서 아름답게 만드는 사전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외교에서의 수사는 자국에게 유리한 점은 부각시키고 불리한 점은 뒤로 빼는 기법 전반을 아우른다. 외교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政治)'라는 얘기는 여기서 비롯된다.

  •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청와대를 방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방명록을 쓰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 뉴데일리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청와대를 방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방명록을 쓰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 뉴데일리
    12·28 한일 위안부 협정을 두고 전(全) 일본이 전방위적인 외교적 수사 만들기에 나섰다. 이번 협정을 통해 일본이 처할 불리한 국면이 부각되지 않도록 먼저 공세적 방어에 나선 것이다.
    일본이 우려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그동안 부인해왔던 위안소 운영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공식화된다는 점이다.
    12·28 협정에서 일본은 군(軍)의 관여를 인정했고, 이에 따른 일본 정부의 책임을 통감했다. 또 한국이 설치하는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재단 출연 비용 전액(10억엔)을 일본 정부가 부담한다. 모두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담은 내용이다.
    하지만 일본은 정부·정치권·언론 등이 모두 달라붙어 이번 협정을 무력화시키는 외교적 수사를 만들고 있다.
    '일본 정부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문구에서는 '통감을 할 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 아니다'는 억지 논리를 들이댄다. '통감'이라는 단어를 최소한 축소 해석함으로써 선제적 외교전을 시작한 셈이다.
    위안부에 대한 '일본 군의 관여'라는 예민한 부분도 일본 정치권과 언론들은 이미 희석 작업을 시작했다.
    아베 총리와 개헌 연대 움직임을 함께 하는 하시모토 도루 전 오사카 시장은 "군의 관여란 문언이 들어갔어도 그것이 강제연행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이는 대부분 국민들이 공감한다"고 했다. 그는 특히 "'군의 관여'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필요하다면, 세계 다른 나라도 해야 한다. 군이 관여한 성(性) 문제는 일본만이 아니다"고 했다.
    일본 유력 언론들도 보수와 진보 매체를 가리지 않고 '위안소에 대한 오해'를 헤드라인으로 보도하며 물타기를 시도했다.
    보수 매체인 요미우리 신문은 태평양 전쟁을 전후한 당시 시대적 배경을 강조하며 2차 대전 중 독일이나 구 소련도 비슷한 사례가 저질렀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일본군이 많은 여성을 강제연행해 위안부로 삼았다'는 것은 오해라는 진단이다.
    진보 매체인 아사히 신문은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의 '제주도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증언에 근거한 자신들의 보도가 허위로 판명된 것까지 거론하며 위안부에 대한 왜곡 의혹을 제기했다.
  • ▲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 뉴데일리
    ▲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 뉴데일리
    발광(發狂)에 가까운 일본의 반응과는 달리 한국의 사정은 정치권이든 언론이든 일단 정부를 몰아붙이기 바쁘다.

    DJ-노무현 정부 내내 이렇다 할 대일 외교 성과도 없었지만, 야당은 정부의 성과를 깍아내리기 바빴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합의금만 차이가 날 뿐, 국민적 동의 등 그 어느 것도 얻지 못한 3무 합의"라면서 "박 대통령은 아직도 어두운 식민지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분이다. 그 근원에 아버지가 있다"고 했다. 심지어 "부녀가 대를 이어 일본 국가에 두 차례나 식민 지배와 반인도적 가해행위에 면죄 행위를 준 것"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여당도 실상은 별다르지 않다.

    새누리당 소속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30일 라디오 방송에서 "현실적 제약 하에서 외교적으로는 잘한 협상"이라면서도 "그러나 과연 최선이었느냐는 부분에서는 다소 아쉬움은 있다"고 했다.

    유리한 점은 부각시키고 불리한 점은 축소시키는 외교적 수사의 기본 자세보다는 '어떻게든 비판하고 지적하려는' 대한민국 국회 특유의 버릇은 여전했다. 특히 외교적 수사를 구현하는데 여론을 조성해야 하는 국회 역할이 중요한 시점임에도 이에 대한 인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경원 위원장은 "우리가 이 건과 관련된 후속 법안을 만들거나 하는 부분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앞으로 국회의 역할을 "일본정부가 착실하게 (협정 내용을)이행하느냐를 두고 계속적인 문제제기와 관찰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적극적으로 나서 여론을 하나로 모으려는 일본 정치권과는 거리가 먼, 한발짝 뒤로 물러난 소극적인 자세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언론도 보수나 진보 가릴 것 없이 후속 대응에 대한 고민보다는 현재까지 이뤄진 협상에 대한 '우려'를 앞세우는데 급급했다.

    <조선일보>는 '동북아 정세 격변 속 위안부 합의에 대한 평가와 우려' 제하의 사설을 통해 특유의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담았다. <경향>과 <한겨레>도 법적책임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부각시킨 1면 톱기사를 보도했다.

  • ▲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 뉴데일리
    ▲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 뉴데일리
    안으로는 여론을 한 곳으로 모으고, 밖으로는 일본을 압박해야 할 국내 정치권과 언론이 오히려 정부를 비난하자 청와대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과거에 비해 상당히 진전된 성과라는 자평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대승적 합의를 이해해달라"는 자신감 있던 목소리는 정치권과 언론이 주도하는 회의적인 시각에 급속도로 움츠러 들었다.
    MB정부 당시 대일 외교업무를 담당한 한 비서관은 "외교 협상에서 100% 이기고, 100% 지는 사례는 결코 생길 수 없다"고 했다. 한 국가가 전적으로 만족하는 협상안은 도출될 수 없다는 얘기다. 이 비서관은 "특히 예민한 일본과의 외교 문제는 협상에 따른 실무적 협의를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매우 중요한데, 여기에는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며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냈다 해도 회의적인 내부 여론이 생긴다면 단숨에 불리하게 뒤집힐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