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연속 토론회
  • ▲ 자유경제원이 주최하는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 제6차토론회가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개최됐다. ⓒ뉴데일리 윤진우 기자
    ▲ 자유경제원이 주최하는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 제6차토론회가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개최됐다. ⓒ뉴데일리 윤진우 기자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활동을 벌였다는 국내 좌편향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이를 반박하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이승만 박사의 생애와 행적을 보면, 이승만 박사는 철저하게 반일 혹은 극일노선을 걸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친일파 매도는 역사적 진실을 왜곡한 좌편향 역사학자와 언론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비판했다.

    자유경제원은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이란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의 사회는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 발제는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이 각각 맡았으며,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이 토론자로 나섰다. 
     

  • ▲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류석춘 원장은 독립운동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기록물 중심으로 분석했다.

    류석춘 원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독립운동을 ▲일본의 군대, 경찰, 행정기관, 일본 제국주의 핵심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물리적 공격인 ‘무장투쟁’ ▲교육과 학술, 언론 분야에서 이뤄진 ‘실력양성’ ▲이승만 박사가 추구한 ‘외교독립’ 등 세 가지로 분야로 나눠 설명했다.

    특히 류석춘 원장은 위 세 가지 방향의 독립운동 방식 가운데, ‘외교독립 노선’이 가장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방법이었다고 강조했다.

    '무장(독립)투쟁'은 일제 강점 1년 전인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부터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무장투쟁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1920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등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장투쟁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됐고, 그 중 대부분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공산당에 소속돼 그들의 지휘를 받으며 이뤄졌다. 일본의 감시와 통제가 심했던 만큼 무장투쟁은 독자적인 활동이 어려웠다.

    ‘실력양성(론)’은 장차 다가올 독립에 대비해 교육, 학술, 언론 등의 활동을 강조했다.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를 세워 민족의 역량을 키운 김성수 씨가 이런 주장을 한 대표적 인물이다.

    실력양성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다는 현실 때문에, 해외에서 추구한 독립운동 노선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총독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을 가졌다.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외교독립(노선)'은 외교에 의한 독립을 추구해, 언론이나 출판, 대중집회, (외교적)로비 등을 통해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활동을 폈다.

    외교독립(노선)은 해외에 진출한 한민족 내부의 역량에 기초해 독립운동을 추구했던 만큼, 무장투쟁과 같이 한민족 외부의 지원과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장점, 일제나 총독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장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 ▲ 이승만 대통령 모습. ⓒ뉴데일리DB
    ▲ 이승만 대통령 모습. ⓒ뉴데일리DB


    류석춘 교수는 '외교독립'을 추구한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기록과 활동을 분석하며,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라고 밝혔다.

    류 원장은 “이승만은 초지일관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다만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빌미는, 건국 직후 진행된 친일청산 과정에서 반민특위 활동을 일부 견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류 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활동을 일부 견제한 것은 맞지만, 이는 “당시 준동하던 남한 공산화 책동에 대응해야 하는 이승만의 입장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는 “1948년 새로 탄생한 국가의 건설을 주도해야하는 이승만으로서는 이미 사라진 적인 일본을 따랐던 ‘친일파’를 정리하는 일보다, 새로 등장한 적 북한을 따르는 ‘공산세력’을 상대로 투쟁하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고 덧붙였다.그러면서 류석춘 교수는, 이승만이 남긴 '일기'와, 한성감옥 수감 시절 작성한 '청일전기'를 바탕으로, 일본에 대한 이승만 박사의 입장을 분석했다.

    일반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방대한 분량의 자필 일기를 남겼다. 그의 자필 일기는 1904년 11월 4일부터 1934년 12월 28일까지 만 30년과 1944년 1월 5일부터 같은 해 12월 31까지 만 1년, 합해서 총 31년간의 일기가 영문으로 남아있다.

    이들 일기는 서로 다른 크기의 수첩, 노트, 일기장, 그리고 타이핑한 B4 사이즈의 종이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묶은 편책 등으로 구성돼 있고, 현재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이 원본을 보관하고 있다.

    일기를 보면 일본에 관한 이승만 대통령의 기본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내용을 몇 가지 골라 이승만이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일기 모습. ⓒ자유경제원
    ▲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일기 모습. ⓒ자유경제원

     
    류석춘 교수가 예로 든 이승만 박사의 일기는 1933년 1월1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임시정부의 전권대사로 파견돼 활동할 당시,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은 류석춘 교수가 소개한 이승만 박사의 일기 내용.

    1910년 강대국들은 일본의 세계 정복 계획을 알지 못했다. 단지 한국을 희생하면 일본이 이에 만족하고 만주에서 개방정책을 펼칠 것이라고만 믿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전 세계가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한국은 일본의 침략 야욕의 첫 번째 단계이고 만주가 다음 단계이며, 이것이 결코 끝이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극동의 평화를 실현하고 국제연맹을 존속시키기 위해 강대국들은 서로 함께 모여 일본을 그들이 원래 속한 섬나라로 돌려보낼 것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나의 의견을 피력했다.

     
    류석춘 교수는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9월 1일,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쓴 일기 내용도 소개했다.

    1905년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과 카츠라 공작이 비밀 협정을 맺고 한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이래로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기다려 왔습니다.

    1919년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우리들의 결심을 입증하기 위해 수 천 명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일본은 그(루즈벨트 대통령)를 협박하였고, 그는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일본에게 중국 산동반도를 내줌으로써 일본과 유화정책을 맺고 한국의 정의를 바라는 호소는 묵살해버렸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이 곧 충돌하리란 걸 알고 있었으며 그 때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왔습니다. 진주만 공격이 있었을 때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우리 민족만 제외되어 "한국인들은 물론 우리의 많은 미국 친구들도 한국을 다른 강대국에 팔아넘길 또 다른 비밀 협약이 있지나 않은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 ▲ 이승만 대통령이 한성감옥에서 한글로 원고를 마무리한 책 '청일전기(淸日戰記)' 모습. ⓒ북앤피플
    ▲ 이승만 대통령이 한성감옥에서 한글로 원고를 마무리한 책 '청일전기(淸日戰記)' 모습. ⓒ북앤피플



    류석춘 원장은 이승만 박사가 집필한 ‘청일전기(淸日戰記)’ 내용도 공개했다. 이 기록은 청일전쟁 5년 뒤인 1900년, 만 25세의 이승만 박사가 한성감옥에서 한글로 집필한 책자다.

    류 교수는 ‘청일전기(淸日戰記)’ 가운데 전쟁의 원인에 관한 부분을 보면, 일본에 대한 이승만 박사의 평소 생각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대개 청일전쟁으로 인해 대한이 독립국임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대한의 독립을 세상에 선포한 것이 일본에게는 영광이지만, 우리에게는 수치다. 사람이 오죽 변변치 못하면 제 권리를 제 손으로 찾지 못하고 이웃 친구가 대신 찾아줄 지경이 되었겠는가.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몇 만 명의 목숨을 바쳐가며 잃었던 독립 권리도 찾아서 보호하는데, 우리나라는 그것이 당연한 권리라는 것을 애초부터 몰랐기 때문에, 대한의 독립을 한 번도 주장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일본이 우리 대신 일어나 싸워주고 세계를 향해 생색내며 자랑하자 남들이 모두 의로운 싸움이라고 일본을 칭찬했다. 이는 진실로 우리에게는 분하고 원통한 일이다.

    대한의 관리와 백성들이 이를 분하게 여겨, 내 나라 독립을 우리 손으로 떨쳐보기를 한마음으로 결심한다면 이 수치를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를 분하게 여길 줄 알려면 먼저 그 내막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될 수 있는 대로 이런 종류의 책을 많이 보아 외국의 형편과 내 나라 형편을 자세히 공부하는 것이 급선무다.

    일본이 대한 독립을 위해 청국과 싸운 것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였지 이웃 나라에 대한 의리 때문이 아니었다. (중략)

    만일 일본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자신들의 정책을 옳게 행사했다면 오늘날 동양 형편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만 뜻밖에 을미년 사변을 일으켜 감히 남의 나라 국모(國母: 명성황후)를 시해하여 신민의 공분(公憤)을 일으키고, 양국의 교제를 손상하여 대한의 형편이 크게 변했다.


    류석춘 교수는 위에서 소개한 이승만 박사의 자필 기록을 보고도, 그를 친일파라고 주장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면서, “이승만의 기록 어디에도 친일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류 교수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다른 노선이나, 다투던 노선을 따랐던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험담했을 뿐”이라며, “이승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집권한 기간 동안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반일정책을 남겼다. 1952년 선포한 평화선을 통해 이승만이 독도에 대한 주권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 ▲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이어진 토론에서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정세와 당시 조선이 처한 국내외적인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에 둔 독립운동을 펼쳤다”며, “이승만은 동학농민운동이 소수의 일본군에게 순식간에 대패를 당한 사실과 청일전쟁 결과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 국제정세와 조선의 현실을 깨달았다”고 평가했다.

  • ▲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은 “이승만의 항일투쟁은 다른 항일운동과 차원을 달리하는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항일투쟁은 반봉건, 반제국, 반전체주의적 바탕아래 이뤄졌으며, 근대적 보편가치를 구현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 ▲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는 일본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건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친일파 매도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학은 교수는 “당시 일본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는 현재가치로 약 1,000만 달러에 해당한다”며, “이런 모습만 봐도 일본이 이승만 대통령의 존재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 ▲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는 “이승만은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려 우리나라의 독립 필요성을 홍보하고, 그 결과 일본에 대한 세계적 비판여론을 조성한 큰 공로를 펼쳤다”며, “백 자루의 총보다 한 자루의 펜이 더 빛난 것이 이승만의 외교 독립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남 교수는 “중국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한 사람만 진짜. 나머지는 다 사기이거나 헛짓”이라는 좌편향 역사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무장투쟁이 의의가 있으려면 그것이 외교적인 활동과 연계돼야 한다. 무장투쟁만 있거나 외교만 있어서는 강대국들의 논의에서 제 몫을 주장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 ▲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은 “이승만 박사가 젊은 시절부터 평생에 걸쳐 조국 독립을 위해 분투, 헌신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라며, “이승만이 해방 후 좌파가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된 사실은 당대 조선인들에게 이승만의 독립운동 사실과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 중에서도 이승만이 뛰어난 존재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