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대통령이 중국판 ‘戰勝節’ 참석 결심에 앞서서 생각해야 할 일들

    그의 결정이 ‘한미동맹’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에 관하여
    면밀하고도 신중한 이해득실(利害得失) 판단이 선행되어야.

    이동복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오는 9월3일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제70회 전승절(戰勝節)’(‘항일전쟁 승리 기념일’)에 참석해 달라는 중국측의 초청에 응할 것인지의 여부를 놓고 장고(長考)를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언론은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이 행사 참가 여부를 놓고 신중히 검토 중”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의 움직임과 언론 보도의 흐름을 보면 박 대통령은 결국 이 행사에 참가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해지는 것 같다.   

    한국인들에게는 오랜 세월을 두고 회자(膾炙)되어 온 속담(俗談)이 있다.
    '장고 끝에는 악수(惡手)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번에 중국판 ‘항일전쟁 전승절’ 참가 초청 수락 여부에 관하여 박 대통령이 ‘장고’ 끝에 내릴
    결정이 ‘악수’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간절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필자의 상념(想念)을 글로 옮겨 볼 생각이 든다.  

    사실은, 중국이 어째서 9월3일을 특별히 ‘전승절’로 지정하여 기념하는지
    그 경위가 별로 석연(釋然)하지 않다. 태평양 지역에서 전개된 2차 세계대전의 ‘전쟁’의 주 당사국은 실제로는 미국과 일본이었다. 1937년 베이징 근교(近郊)에서 일본군이 도발한 ‘노구교(盧溝橋) 사건’으로 시작된 일본군의 중국 침략으로 중국 본토에서 중일(中日) 전쟁이 1945년까지 계속되었고 만주 쪽에서는 전쟁 종결에 임박하여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 최초의 원자탄을 투하한 다음다음날인 8월8일 소련이 돌연 대일선전포고(對日宣傳布告)를 하여 전쟁에 참가한 흔적(痕迹)을 남기기는 했지만 태평양 전쟁의 주전장(主戰場)은 어디까지나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형성되었었고 이 전쟁은 1945년8월15일 미해군 전함(戰艦) 미주리(USS Missouri)함(艦)의 갑판에서 일본정부 대표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er) ‘연합군’ 사령관 앞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로써 아시아 여러 나라를 무대로 하여 일본이 전개했던 전쟁은 일시(一時)에 중지되었다.
    다만 일본 본토 이외의 한반도와 만주 등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서 그 뒤에 지역별로 미국과 소련의 군 당국이 현지의 일본군 사령관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행정적 절차가 진행된 것이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현지의 중국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행위가 산발적으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일본 본토를 점령한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이 재중국(在中國) 일본군에게 항복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1945년 9월2일에, 다른 일부 지역에서는 9월9일에 일본군이 중국군에게 항복하는 절차를 이행했다. 아마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가운데 9월2일 다음 날인 9월3일을 택하여 이른바 ‘전승절’로 지정한 듯하다.   

    그런데, 9월3일을 <공산당>이 이끄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승절’로 기념하는 것도 사실을 따지고 보면 역사적으로 옳은 일이 아니다. 왜냐 하면, 이때 일본군이 항복한 것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이 이끌던 <중화민국>에게 한 것이었고 <공산당>이 이끄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중국 본토를 놓고 벌어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內戰)이 <공산당>의 승리로 막을 내려 <국민당>이 타이완(臺灣)으로 퇴각한 뒤인 1949년 10월10일의 일이었다.   

    실제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 본토에서의 중일(中日) 전쟁은 대부분 <중화민국>이 수행한 것이었고 이 ‘항일전쟁’에서 중국 <공산당>이 수행한 역할은 지엽적(枝葉的)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지금 베이징의 티에난멘(天安門) 광장에 위치한 <혁명박물관>의 ‘현대사관(現代史館)’의 전시 내용이 웅변해 주고 있다. 주로 기록사진들로 이루어진 이 ‘현대사관’ 의 ‘항일전쟁’에 관한 전시물의 압도적 다수는 장제스와 <국민당> 군대의 활동 장면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2002년 필자의 이 박물관 관람을 안내하던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의 한 부국장은 “사실은 중국의 항일 무장투쟁은 주로 <국민당> 정부가 수행한 것이고 <공산당>의 역할은 부차적(副次的)이었다”는 설명으로 <국민당> 위주의 전시 내용에 대하여 의아(疑訝)해 하는 필자를 거듭 놀라게 만들었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지금 중국의 공산당 정권이 9월3일을 ‘전승절’로 지정하여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로 기념하는 것은 사실은 몰염치(沒廉恥)하게 남의 공(功)을 가로챈 사기행위(詐欺行爲)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판 ‘전승절’에는 분명히 도덕적 하자(瑕疵)가 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특히 일본과의 전쟁에 관한 한, 장제스가 이끈 중국의 <국민당> 정권이 세계 각국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이 임시정부가 중국에서 그나마의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다양하게 지원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外面)해서는 안 된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직시(直視)하지 않을 수 없다. 사리(事理)에 따른다면, 만약 지금 타이완에 가 있는 <중화민국>이 ‘전승절’을 지정하여 '항일전쟁 승리'를 기념할 경우 대한민국 대통령이 여기에 참석하는 것은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성립될 수 있는 것이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지정한 ‘전승절’에 참석하는 것은 “엉뚱하게 남의 다리를 긁는 격”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판 <전승절> 행사에 과연 참석해야 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심사숙고(深思熟考)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밖에도 많다.

    첫째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지금의 중국은 1950〜53년의 ‘6·25 전쟁’ 때 북한 편에 서서 대규모의 병력을 참전시킴으로써 불법 남침으로 전쟁을 도발한 북한을 응징하고 대한민국 주도 하에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역사적 기회를 상실하게 했으며 그 결과로 유엔에서도 ‘침략자’로 낙인(烙印)이 찍혔던 나라라는 사실이다. 중국은 6·25 전쟁 후에도 한동안 일변도적(一邊倒的)으로 대한민국을 반대하고 북한을 지지했었다.   

    대한민국과 중국 간의 관계에는 1980년대 초 중국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기치로 내세운 덩샤오핑(鄧小平) 체제가 등장하고 이어서 미국과 소련을 양축(兩軸)으로 하는 동서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계기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일어났고 그같은 변화는 지금 현재도 진행 중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같은 변화의 결과로 1991년에는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이 실현되었고 199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관계가 정상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韓中) 관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같은 변화는 아직도 불충분하고 미완성형이다. 왜냐 하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문제에 관하여 중국이 보여주는 태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아직도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전통적 동맹관계의 틀 속에서 관리하는 입장을 완전히 정리하기 못하고 있고 그 결과로 대한민국과의 관계도 완성된 관계로 승화(昇華)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소가 한미관계다.

    1945년의 해방 당시는 물론 1948년의 건국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은 전형적인 미개발 국가의 그것이었고 계속되는 북한의 대남 적화 통일 기도로 6·25 전쟁의 참화를 감수해야 했을 뿐 아니라 1953년 휴전 이후에도 끈임 없이 계속되는 무력 및 폭력 도발로 상시적(常時的)인 안보불안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다. 그러한 역경(逆境)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해방 직후의 후진성(後進性)을 극복하고 6·25 전쟁의 잔해(殘骸)로부터 불사조(不死鳥)처럼 일어나서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인정받는 선진적인 시장경제를 육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한미동맹(韓美同盟)’의 건재(健在)를 통하여 안보 리스크(Risk)를 해소시킴으로써 가능해진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한미동맹’은 고대 그리스에서 아데네(Athens)로 하여금 도시국가들의 맹주(盟主)가 되어 100년간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게 해주었던 ‘델로스(Delian) 동맹’에 비견(比肩)되는 소이(所以)가 여기에 있다.  

    ‘한미동맹’은 그동안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많은 시련과 도전을 극복해 왔고 지금은 과거 북한의 남침에 대한 ‘전수방어(專守防禦)’라는 제한된 기능으로부터 “공동의 가치와 상호 신뢰에 기반한 양자(兩者), 지역 및 범세계적 차원의 미래지향형 포괄적 동맹”으로의 변신(變身)을 내용으로 하는 구조조정이 진행 중에 있다. 그러한 가운데 미국과 중국 간에는 지금도 갈등과 조화가 씨줄과 날줄로 교직(交織)되는 불안정한 관계가 진통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에 중국판 ‘전승절’ 참가를 결심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서 그의 결정이 ‘한미동맹’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에 관하여 면밀하고도 신중한 이해득실(利害得失) 판단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 같은 분석과 판단을 통하여 필요한 만반(萬般)의 사전 또는 동행(同行) 조치가 강구되어야 한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상황들이 박 대통령의 중국판 ‘전승절’ 참가에 대한 부정적 견해의 근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지향적인 차원에서, 필자는, 필요한 사전 및 동행 조치가 적절하게 강구된다면,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가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한 조치 가운데는 첫째로 중국 정부가 중국군을 6·25 전쟁에 참전시켜서 한반도 통일의 기회를 무산(霧散)시켰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천문학적인 피해를 끼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어떠한 형태로든지 유감의 뜻을 표명하게 하는 것과 아울러 두 번째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 시도를 저지, 와해시키려 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보다 적극적이고 단호한 방법으로 동참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와 아울러, 박 대통령에게도, 그가 하기에 따라서는, 이번 중국판 ‘전승절’ 참가를 통하여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호기(好機)를 포착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에 관하여 필자가 박 대통령에게 참고하도록 건의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은 베를린을 방문한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미국 대통령이 1987년 6월12일 동서독 분단의 상징적 장소인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문(門) 앞에서 행했던 연설과 1989년 11월28일 헬무트 콜(Helmut Kohl) 서독 수상이 '유럽과 독일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10개 항목 제의'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행한 연설 내용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달라는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의 연설 도중 레이건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체프(Mikhail Gorbachev) 소련 공산당 서기장(당시)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그에게 베를린 장벽 철거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고르바체프 당 서기장, 만약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만약 당신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누리기 원한다면, 만약 당신이 자유를 원한다면 이 문 앞으로 오시오. 고르바체프 서기장, 이 문을 여시오. 고르바체프 서기장, 이 벽을 허무시오”라는 레이건의 어록(語錄)은 그 뒤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두고두고 회자되었고 동독의 붕괴를 이끌어내는 촉매(觸媒)가 되었다.   

    1989년 후반에 와서 동독의 붕괴는 급격하게 가시화(可視化)되고 있었다.
    나라 안팎에서 궁지에 몰린 동독은 11월9일 ‘베를린 장벽’을 철거했고 콜 수상의 <기독교민주당> 정부가 이끄는 서독을 상대로 ‘통일’을 위한 ‘협상’을 애걸(哀乞)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독의 콜 수상은 이같은 동독의 애걸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콜 수상은 그해 11월28일 내용으로 보면 같은 해 대한민국의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발표했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유사(類似)했던 '유럽과 독일의 분열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10개 항목'이라는 명칭의 단계적 통일방안을 발표했지만 이와 동시에 동서 양독 간에 이같은 방안에 입각한 대화가 개시되기 전에 동독이 반드시 이행해야 할 ‘전제조건’을 아울러 제시했다.

    그것은 “먼저 동독이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산당과는 협상하지 않겠다”는 것이 콜 수상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이같은 콜 수상의 단호한 입장 표명 때문에 동독 공산당 정권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다음 해인 1990년 3월 다당제(多黨制)와 인구비례 원칙에 입각한 자유총선거의 실시를 감수(甘受)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총선거를 통해 공산당 지지는 10% 이내로 위축되고 보수·우파 정당들이 80% 이상을 득표(得票)하게 되자 서독의 콜 정부는 이 선거의 결과로 동독에 등장한 로타 디 메지에르(Rothar de Maziere)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당>의 ‘반공’ 정부와 비로소 통일 협상을 진행시켜서 같은 해 10월 독일의 통일을 이룩한 바 있다.   

    필자는, 이번 중국판 ‘전승절’ 참가를 결심할 경우, 박근혜 대통령이, 이같은 역사적 선례(先例)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서, 중국 방문 기간 중 적절한 기회를 만들어서 중국 현지에서, 가능하다면 가령 샹하이(上海)의 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방문과 같은 기회를 활용하여, 한반도 통일에 관한 대한민국의 의지와 기본입장을 내외에 천명(闡明)하는 것을 검토할 것을 건의하고 싶다.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다면, 필자는, 이 같은 기회를 통하여,
    박 대통령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그가 밝히는 기본입장에 포함시킬 것을 건의하고 싶다.

    첫째로, 분단 한반도의 통일은 경제의 선진화와 정치의 민주화에 성공하여 체제 경쟁력의 차원에서 세계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대한민국과 전근대적인 독재정치와 계획경제의 파산으로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한 북한간에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대한민국의 경쟁력이 북한 지역으로 파급(波及), 확산(擴散)됨으로써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국민이 이미 향유(享有)하고 있는 선진적 경쟁력의 혜택을 북한 주민들이 공유(共有)하게 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 및 경제의 발전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의하여 가능해진 것인 만큼 앞으로 한반도에 등장하는 통일국가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셋째로, 한반도의 통일이 실현될 경우 출현하는 통일국가는 지역과 세계적 차원에서 대립과 갈등, 그리고 블록화를 지양하고 분쟁 해결 방안으로 전쟁의 방법을 배제하고 대화와 타협의 방법에만 의존하며 오로지 평화와 안정 및 조화(調和)를 추구하는 외교정책을 추구할 것을 다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같은 통일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북한의 민주화가 절대적 선행조건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천명해야 한다. 이와 아울러 북한에게 핵무기 개발, 보유와 이른바 ‘선군(先軍)’ 정치 및 '핵개발과 경제건설의 병진(竝進)' 노력을 포기하고 최소한 중국식 ‘개혁·개방’을 본받으며 대한민국과 함께 한반도의 분단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데 협조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북한이 이같은 입장 변화를 진정으로 수용할 경우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와 더불어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의 지원을 과감하게 제공할 것임을 분명하게 천명해야 한다.  

    필자는 박 대통령이 대북 발언에서 또 다시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등 진부(陳腐)한 사안들을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박 대통령은 2000년 남북간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된 뒤 남쪽에서는 13만 명의 이산가족들이 ‘상봉’ 참가를 신청했으나 그 가운데서 그 동안 15년 사이에 이루어진 19회의 ‘상봉’을 통해 ‘가족 상봉’에 성공한 사람들의 숫자는 단 1956명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대부분이 고령자들인 이들 상봉 신청자들 가운데서 이미 절반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동안 이들 상봉신청자들의 고령으로 인한 연평균 사망률이 4000여 명이기 때문에 남아 있는 생존 신청자 6만6000여 명도 앞으로 16년 사이에 전원 사망할 전망인 반면, 그 동안의 규모와 빈도로 ‘상봉’이 계속 이루어진다고 가정할 경우, 그 16년 기간 중 ‘상봉’에 성공할 사람의 숫자는 2000명 전후에 불과할 것이라는 사실을 적시(摘示)함으로써 이산가족 문제 해결 방안으로써 ‘상봉’이 갖는 비효율성에 대해 세간(世間)의 관심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에 따라, 이번에 만약 중국 방문이 결정되고 중국 방문 기간 중 남북문제에 언급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필자는 박 대통령이 이산가족의 인도적 고통을 진정으로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상봉’보다는 이산가족 전원(全員)을 대상으로 하는 '생사와 주소의 확인 및 통보', 서신교환 허용 및 고령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 및 성묘(省墓) 허용이 시급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북한이 이에 호응할 것을 촉구함으로써 이 문제에 관한 국제사회의 올바른  관심을 유도하는 계기로 이를 활용하는 것을 적극 건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