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과서에서 왜 대구폭동을 빼버렸나?

  • 대구폭동은 민족반역의 同族학살일 뿐 아니라
    소련의 자금지원과 지령 하에서 이뤄진 폭동임이
    소련 측 자료에 의하여 드러나 있다.

趙甲濟

2014년 3월1일에 출간된 5種(종)의 좌편향 한국사 교과서들은
1946년 10월에 발생한 대구폭동을 다루지 않았다
(교학사 교과서는 다룸).
대구폭동은 남로당이 본격적인 폭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 계기이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최초의 집단 학살이며,
美 군정이 남로당을 진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만든 역사적 사건으로서
교과서에서 뺄 수 없는 비중을 지닌다.

좌편향 교과서들이 남로당 주도의 4.3 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그에 못지 않는 역사성을 가진 남로당 주도의 대구폭동을 뺀 것은
여기에는 좌익에 불리한 사실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反대한민국적 계급투쟁史觀(사관)에 의하여 써진 교과서는
북한정권과 공산주의에 불리한 사건은 은폐, 축소하고
유리한 사건은 침소봉대하는 성향이 뚜렷하다.
대구폭동은 민족반역의 同族(동족)학살일 뿐 아니라
소련의 자금지원과 지령 하에서 이뤄진 폭동임이 소련 측 자료에 의하여 드러나 있다.
2011년 한국사 교과서의 관련 기술을 조갑제닷컴이 비판한 내용을 다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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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전후 북한 최고 실력자였던 스티코프의 일기
(이지영 기자) 
   
  해방 직후 남한 전역에서 조선공산당과 좌익세력이 일반대중을 선동하여 전개한 대규모 폭력투쟁이 잇따랐다. 특히 1946년 남한을 뒤흔들었던 9월 총파업 당시 북한의 소련軍政(군정)은 조선공산당측에 200만엔을, 이어 발생한 10월 대구 폭동 기간 중에도 세 차례 추가자금(300만엔 이상)을 지원했으며, 파업투쟁에 대한 행동지침까지 지시했다.

이는 당시 소련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 겸 군사평의회위원이었던 테렌치비치 스티코프(1907∼1964년)가 작성한 일기에 나타나 있다. 

  스티코프는 1945년 4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하면서 한국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47~1948년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이면서 북한군정청의 사실상 총사령관역할을 했고, 1948~1951년에는 북한주재 초대 소련특명전권대사를 지냈다.

 그는 북한정권수립(1948년)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정권수립 후에도 특명전권대사를 맡는 등 북한의 최고 실력자였다.
스티코프는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될까 개인적 기록을 남기지 않은 다른 소련 지도층 인사와 달리 60권의 일기를 남겼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 북한정권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니콜라이 레베제프(예비역 소장)는 후에 ‘그(스티코프)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북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스티코프 일기’는 1995년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이 발굴해 일부 내용이 일간지에 연재됐다. 1996년 연재물을 묶어《발굴자료로 쓴 한국 현대사》를 출간했다. 10년 뒤인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스티코프 일기 중 한반도 관련 내용을 발췌 번역하여 《쉬띄꼬프 일기(1946∼1948)》를 냈다. 
   
  ‘스티코프 일기’ 무시하고 10월 대구폭동을 ‘10월 봉기’로 왜곡한 교과서
   
   2011년에 나온 천재교육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1995년에 발굴된 ‘스티코프 일기’라는 중요한 史料(사료)를 무시하고 10월대구폭동을 ‘민중봉기’ 및 농민 ‘저항운동’으로 기술해 사실을 왜곡하였다.
  <한편 일부 상인과 지주의 매점매석으로 식량 위기가 오자 미군정은 강제로 쌀을 사들이는 수매제를 시행하였다. 농민들은 강제 수매를 공출로 받아들였고, 이는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와 같은 저항 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314페이지)> 
  이 교과서는 9월총파업과 10월대구폭동이 미군정의 수매제 때문에 자연 발생한 것처럼 썼다. 
   
  삼화출판사의 2011년 교과서는 9월총파업과 10월대구폭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미군정의 미곡 수집제 실시 설명) 그럼에도 경제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노동자들도 열악한 노동 조건과 빈곤에 허덕이는 가운데 미 군정의 정책에 불만이 커져갔다. 이는 미곡 수집제 폐지, 토지 개혁 실시, 식민지 교육 철폐, 미 군정 퇴진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 (314페이지)>며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하였다. 
  
   
  법문사 교과서의 경우, 본문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남북한의 정치적 혼란’이라는 지도(315페이지)에서 10월대구폭동을 ‘대구10·1사건’으로 썼다. 2003년도까지 고등학교에서 사용된 국사 교과서(국사편찬위원회 편찬)에 법문사 교과서의 것과 거의 같은 지도가 ‘반공 의거와 공산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 지도에는 ‘대구 10·1 폭동사건’으로 명시되어 있다. 
   
   
  *9월총파업·10월폭동, 蘇군정 지시 받은 조선공산당의 유혈폭력투쟁 
   
  9월 총파업과 10월대구폭동은 1946년 7월 조선공산당(후에 남로당)이 미군정에 타협적이었던 자세를 철회하고 채택한 유혈폭력투쟁 노선, ‘신전술’의 결과물이다. 7월 중순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는 ‘신전술’에 따라 ‘보다 조직적이며 집단적인 대중적 파업투쟁’을 10월에 전개하기로 계획했으나, 조선공산당은 이 계획을 바꿔 총파업을 9월로 당기라고 지시한다. 이는 조선공산당이 그해 8월말 美軍政 운수부가 운수부 노동자 25%를 감원하고, 나머지 직원에 대해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기로 한 구조조정을 호기로 인식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왔으나 스티코프의 일기는 이것이 소련군정의 지시였음을 말하고 있다. 
   
  스티코프의 1946년 9월9일자 일기에 따르면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소련당국에 문의했다. 스티코프는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을 9월11일, 9월16일 두 차례에 걸쳐 지시했다. 이때는 10월로 예정됐던 총파업을 1개월 당기도록 조선공산당이 전평 지도부에 지시한 무렵으로, 파업시작 단계에서부터 조선공산당이 소련당국의 지령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46년 9월23일 부산 철도 노동자 7000여 명이 일급제 반대 등을 요구하며 계획대로 파업에 들어갔다. 24일 조선공산당은 ‘남조선 노동자 제군에게’라는 제목의 파업선동전단을 살포했다. 이날 전국의 철도 종업원도 파업에 들어간다. 26일 전평 산하 출판노조가 철도 총파업에 동조하여 ▲좌익계 신문의 복간, ▲좌익인사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한다. 이를 기점으로 29일까지 전평 산하의 전국 각 산업별 노동조합들(전신, 전화, 전기, 운수, 섬유, 금속, 화학, 신문 등)이 전평 주도하에 파업에 들어가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파업으로 확대됐다. 
   
  *9월 총파업, ‘스탈린-소련군정-조선공산당-전평’의 지휘계통에 의해 발생 
   
  이 기간의 스티코프 일기에는 소련군정이 9월26일, 28일 두 차례에 걸쳐 파업의 투쟁 방향을 지시하고 투쟁기금 200만엔을 지급했음이 기록되어있다. 일기에서 드러난 소련군정의 파업투쟁 지시사항과 남한 파업 시위자들의 요구사항이 일치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9월총파업이 스탈린-소련군정(스티코프)-조선공산당-전평의 지휘계통에 의해 발생된 사건임을 확인할 수 있다.
     
  <9월26일 
  
  로마넨코(평양주재 소련군 민정부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령의 취소, 좌파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9월28일 
  
  로마넨코가 보고하다. 남조선에서 파업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파업투쟁에 합류했다. 요구조건 및 요구조건의 관철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묻다. 경제적인 요구들,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권력의 양도 요구를 잠시 철회해도 되는지 묻다. 500만엔을 요청하고 있다.
재정지원을 위해 200만엔을 지급하다. 
  
  회담에는 로마넨코, 샵쉰(前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 부영사), 여운형, 김일성, 문일(김일성의 부관)이 참석했다.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다. 
  경제적인 요구들,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들이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한다. 이 요구들이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이다. 인민위원회로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한다. 파업투쟁의 조직자들과 참가자들은 미군정이 탄압하지 말도록 요구한다. 여운형과의 회담 및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스탈린 동지에게 암호전문을 보낸다>
   
  파업투쟁 지침 내용까지 지시
   
  소련군정이 지시한 파업투쟁 지침 내용에는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 정치적인 사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관철할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들의 지침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후 남한 정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조선공산당 간부를 포함한 당원 16명을 체포하고 전국의 공산당 본부를 수색했다. 정판사는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인쇄소인데 일제 때 조선은행의 지폐를 찍던 조폐공장이었다. 경찰은 조선공산당이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찍어 유포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에서 ‘공산당 활동 불법화’를 공표하고 공산당 간부들(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리는 한편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현대일보>의 3개 좌익신문을 폐간, 10여명의 신문사 간부들을 체포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공산당이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태도를 바꿔 ‘신전술’을 선언하고 소련군정의 지시로 9월총파업을 계획·실행한 것이다. 
   
  9월총파업은 10월대구폭동으로 연결됐다.
10월1일 대구에서 1000여명의 부녀자가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파업 노동자 등이 가세해 시위가 확대되자 경찰이 진압을 위해 위협발사하는 과정에서 군중 한 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사망자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고 사망 사실조차 확실치 않다). 다음 날 조선공산당은 좌익학생들을 동원해 시체 한 구를 전날 경찰의 총탄에 사망한 학생의 시체라고 주장하며 들것에 싣고 각 학교를 돌며 학생들을 선동했다. 학생과 시민 등 흥분한 시위자들은 대구경찰서 등 26개 지서와 파출서를 습격, 무기를 탈취했다. 무기를 탈취한 폭도화된 시위자들은 경찰관과 행정관리, 우익인사의 집을 습격해 방화하고 그 가족들을 학살했다. 
   
  미군정은 2일 오후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병력을 파견해 소요를 진압했다. 그러나 폭동은 대구 인근지역으로 번졌고, 12월까지 경북 全지역과 경남, 강원, 전남, 서울 등에서 계속됐다. 폭동이 끝난 후 각 농촌지역의 좌익분자들은 산악지대로 잠입, 게릴라화됐다.
   
  *박헌영, 10월폭동기간 중 소련군정에 향후 투쟁 방침에 대한 ‘교시’ 요청 
   
  스티코프 일기는 10월대구폭동 역시 조선공산당 지도부와 소련군정이 직접 관여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10월대구폭동이 계속된 약 3개월 동안 소련군정이 남조선 투쟁기금으로 조선공산당에 보낸 돈은 300만엔(10월2일), 39만엔(12월6일), 122만 루블(12월7일)이었다. 10월 대구폭동이 한창이던 10월 일기에는 조선공산당 및 전평이 소련군정의 ‘투쟁방침’을 받아 폭동에 개입했음이 분명하게 기록되어있다. 소련군정의 ‘지시’를 얻기 위해 전평 의장이 방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과 박헌영 역시 향후의 투쟁 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10월8일 
  
  남조선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의장 허성택이 도착했다. 김일성이나 로마넨코와 회견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지시를 내리다.(注: 허성택은 10월7일 평양에 나타나 이그나찌예프와의 회담에서 파업투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자신이 동지들과 접촉하여 지시를 얻기 위해 방북했다“고 설명했다)
   
  10월21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이 향후의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문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빨치산 부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 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 할지를 문의하고 있다. 
  박헌영과 대화하다.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해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들의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
   
     李知映(조갑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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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1] 스티코프 일기 중 9월총파업·10월대구폭동 관련 부분 발췌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9월9일 
  남조선 정세를 검토하고 [남조선 좌파에 대한] 지원 대책을 강구한다. 박헌영(조선공산당 당수)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 
  1946년 9월 8일자 서울의 라디오방송 보도에 의하면 박헌영과 이주하(공산당 제2비서) 및 이강국(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은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注: 미군정이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사회교란 및 폭동 음모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을 가리키는 듯)
   
     9월11일
  로마넨코(소련군 민정부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다.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조직한다.
   
     9월16일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로 출판물의 반입을 늘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를 조직하고, 북조선에서 개최된 미군정과 남조선 반동파의 행동을 폭로하는 시위를 어떻게 보고있나 점검한다.
   
     9월26일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령의 취소, 좌익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한다.
로마넨코가 4만명의 철도 종업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고 보고하다.
남조선에서는 파업투쟁이 진행중이다. 철도 종업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9월25일 오후부터 출판인쇄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됐다.
      
  9월28일
  로마넨코가 보고하다. 남조선에서 파업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파업투쟁에 합류했다. 요구조건 및 요구조건의 관철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묻다. 경제적인 요구들,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권력의 양도 요구를 잠시 철회해도 되는지 무다. 500만엔을 요청하고 있다. 재정지원을 위해 200만엔을 지급하다. 회담에는 로마넨코, 샵쉰, 여운형, 김일성, 문일이 참석했다.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다.
  경제적인 요구들,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들이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한다. 이 요구들이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이다. 인민위원회로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한다. 파업투쟁의 조직자들과 참가자들에 대해 미군정이 탄압하지 말도록 요구한다. 여운형과의 회담 및 남조선 파업투쟁 상황에 대해 스탈린 동지에게 암호전문을 보낸다.
      
  9월29일
  남조선 파업투쟁의 진행과정에 대한 전문을 스탈린 동지에게 보내다.
      
  10월1일
  로마넨코가 보고하다. 남조선에서 공산당 기관지를 제작하는 노동자들이 넘어왔다.
그들은 파업투쟁이 지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남조선 사태에 대한 북조선의 반응은 어떠한가?
남조선 인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집회 개최와 남조선 인민을 지원하기 위해 매일 2시간씩 노동시간을 늘려 그 임금액을 남조선 지원기금으로 공제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서울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다. 300만엔을 더 요청하고 있다. 불가닌에게 전화하다. 우리의 (남조선) 동지들에게 300만엔을 지원하는 문제 및 집회개최와 공제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듣다.
   
     10월2일
  김일성과 통화하다. 300만엔의 지원과 집회개최를 허용하는 지시를 내리다.
   
      10월7일
  이그나찌예프가 보고하다. 1946년 10월6일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해 북조선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월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는데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했다.
      
  10월8일
  남조선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의장 허성택이 도착했다.
 김일성이나 로마넨코와 회견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지시를 내리다. 
  
  (注: 허성택은 10월7일 평양에 나타나 "파업투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자신이 동지들과 접촉하여 지시를 얻기 위해 방북했다"고 설명하고 로마넨코나 김일성과의 회담도 요청했다. /러시아연방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 문서군 142, 목록 540935, 문서철1, 116~122페이지에 수록된 대담 기록)
      
  10월21일
  부산에서는 농민들의 진출이 시작됐다. 지금 파업운동은 어느 정도 축소됐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은 향후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문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빨치산 부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 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 할지 묻고 있다. 
  박헌영과 대화하다.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전환됐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들의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
      
  10월22일
   
  발라사노프(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관 정치고문)와 샵쉰(前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 부영사)을 호출해 남조선 정세에 대한 정보보고를 청취하다.
   
     11월4일
  김일성(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박헌영과 회담하다. 회담 때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제반 사태에 대한 평가를 전달한다.(파업, 시위, 무장투쟁)
   
     12월6일
  로마넨코에게 전화하다. 박헌영에 대한 재정지원을 신속히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문일(김일성 비서)은 박헌영에게 39만엔이 지출됐다고 보고하다. 더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박헌영과 김일성이 가깝게 지낼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다.
      
  12월7일
  로마넨코를 접견하다. 그의 구좌에 있는 돈 122만 루블에 대해 논의하다.
그 돈을 박헌영에게 전달하고 구좌를 정리하라고 명령하다. 박헌영에게 지출된 돈의 총계를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하다. 특별히 필요한 곳에 122만 루블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전문을 박헌영에게 보내라고 지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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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경무부장 조병옥, 소요사건 진상과 수습방안에 관해 담화 발표 
  게재지명 조선일보,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6년 10월 16일 
  날짜 1946년 10월 15일 
  
  大邱에서 야기된 불상사에 대하여 7일 경무부장 趙炳玉은 상세한 보고를 발표한 바 있었는데 15일 同氏는 거듭 전국적 폭동사건 진상과 수습방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치안은 착착 복구중에 있다고 발표하였다. 

  “금반 돌발된 대구 및 접근지역의 폭동사건에 대하여는 去 10월 7일 상세 발표한 바이거니와 其後 동 지역 기타 경상북도내에는 斯鍾 사건이 전무하고 치안이 착착 완전 복구중에 있는데 인접지역인 경상북도내에는 대구폭동사건에 連하여 10월 3일 統營을 비롯하여 마산 진주 창녕 양산 의령 하동 고성 동래 각지에서 民靑·農組·노조원을 주로 한 暴民이 成群 作黨하여 경찰관서 기타 府·邑·面 등 일반관공서를 습격하여 건물파괴 무기탈취 구타 살상 등의 폭거에 이르렀는데 엄중 경비 중이던 무장경찰대의 신속과감한 활동으로 인하여 즉시 其 대부분을 퇴각시키고 통영경찰서 외 지서 2·3개소만은 일시 폭도에게 접수 당하였으나 이것 역시 완전히 탈환되고 치안이 복구되었다. 그리고 충청북도 永同·충주·전라남도 화순지방에서 폭동사건이 발생되었으나 경찰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즉시 퇴각시키고 치안이 복구되었으며 경찰관의 사상자도 극히 소수인데 또 사전 사찰경계의 적절함으로 인하여 폭동을 계획중 또는 실행직전에 探知 검거하여 미연에 방지한 것도 사건에 달하는 상태이다. 그런데 금반 폭동에 관련한 자 총 검거수는 무려 3, 782명(폭도의 사상자는 조사미료로 미분명)인 바 其中 일부는 이미 군정재판에 회부하고 기타는 엄중 취조 속행중에 있다. 그리하여 현재 전국적으로 치안이 복구 평정된 상태에 있으나 경찰당국은 이 현상수습에 만족할 뿐 아니라 기동작전의 원칙에 의하여 더욱 경찰력을 강화하여 치안유지의 만전을 기하는 바이다. 바라건대 일반 사회인은 우리 민족이 현하 건국상 시련기에 있음을 다시 자각하여 오로지 노력과 건설로서 애국의 지성을 발휘하기를 거듭 기망하여 마지 않는 바 이다. 그런데 근자 본 폭동사건에 관한 신문기자 중에는 왕왕 진상과 상위한 점 특히 과대한 기사가 있어서 일반 사회 민심에 미치는 악영향이 不尠하니 斯種 사건 보도는 관계당국의 발표에 의하여 특히 정확을 기하기를 요망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6년 10월 16일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