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부터 원자력 기술 도입에 착수

       이승만 통치기에는 미국으로부터 과학 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그것 역시 한국 사회를 자유화(自由化)하는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실용주의와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이야말로
    불합리하고 인습적인 사고방식을 깨뜨리는 해방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 한국 최초의 원자력연구소 착공식에서 첫 삽을 뜨는 이승만 대통령.(1959)
    ▲ 한국 최초의 원자력연구소 착공식에서 첫 삽을 뜨는 이승만 대통령.(1959)
   일제 시대에 일본은 한국인들의 과학기술 교육을 심하게 억제했다.
그 때문에 해방 당시 한국인 이공계(理工系) 대학 졸업자는 40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후 미군이 들어오고 미국 원조가 시작되면서
미국의 과학과 기술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6 · 25 전쟁으로 유엔한국부흥위원단(UNKRA), 대외활동처(FOA), 국제협력처(ICA)의
활동을 통해 원조자금이 들어오면서 미국으로부터의 기술 도입도 크게 늘어났다. 

   1953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뒤이어
1954년에 한미합의의사록이 채택된 다음부터 미국의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가 크게 늘면서,
더욱더 많은 기술자와 과학자가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날과 관련해 가장 큰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원자력 기술의 도입이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7월 8일 미국인 전기 기술자 W.L 시슬러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시슬러를 통해 이승만은 장래의 에너지는 원자력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6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한미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농축 우라늄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즉각 문교부 안에 원자력과를 설치하고 기술훈련생 2명을
미국 아르곤 연구소에 파견했다. 그 후 몇 년에 걸처 100명에 가까운 연구생이 파견되었다.  
1957년 8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도 가입했다. 

   이승만 정부는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서울대학교에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했다.  

   그리고 미국 원조금 35만 달러에 정부 자금을 보탠 73만 달러로 연구용 원자로인
트리가마크2를 구입했다. 그리고는 1959년 7월 14일부터 설치에 들어갔다.  
   그 후로도 원자력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승만 정부는 기술자를 미국에 지속적으로 파견했다. 
   그들의 기술은 당장 원자력의 에너지화나 무기 생산에 활용되지는 못했지만,
 방사성 동위 원소를 이용해 의학, 농학을 발전시키는 데는 크게 공헌했다.
  • ▲ 공사중인 원자력연구소.
    ▲ 공사중인 원자력연구소.

  •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과의 문명적 결합    

       6 ․ 25 전쟁은 한국 사회에 엄청난 재앙(災殃)을 가져다 주었다.
    인명 피해만도 엄청나 군인과 민간인으로서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거나 다친 한국인은
     남북한 통털어 400만 명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은 재산 피해만도 2년간의 국민총생산액을 넘을 정도로 컸다.
    그것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회복될 수 없는 규모였다.

       그 때문에 미국의 원조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그래서 1950년대에 정부 예산에서 미국 원조가 차지하는 비율은
    연평균 86%의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전후 복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57년에 와서도
    미국 원조는 정부 예산의 53%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미국 원조에 힘입어 전후의 한국 경제는 안정과 자립을 향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1955년 내각에 부흥부를 신설하고,
    창경궁에서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를 열었다. 
  • ▲ 해방10주년 산업박랍회 팜플렛 일부, 텔레비전 화면을 상징했다.1955년 창경궁에서 개최.
    ▲ 해방10주년 산업박랍회 팜플렛 일부, 텔레비전 화면을 상징했다.1955년 창경궁에서 개최.
  •    뒤이어 1958년에는 거대한 충주비료공장 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호남비료공장,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을 세워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갔다.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강원도의 석탄을 수송하는 일이 시급했으므로
    철도의 보수와 신설에 집중했다. 대표적인 것이 함백선,영월선,영암선이었다. 
  • ▲ 이승만 정부의 경제부흥을 상징하는 인천 판유리공장.
    ▲ 이승만 정부의 경제부흥을 상징하는 인천 판유리공장.

  • 일본과 중국에 대한 경계

       이러한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문명의 전환’이란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대륙과의 연결선이 끊어졌기 때문에
    ‘대륙문명권’으로부터 ‘해양문명권(海洋文明圈)’으로 문명의 소속을 달리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해양문명권의 일부인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문제를 가져왔다. 
    실제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소련,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 자유중국(타이완), 한국을 하나의 지역공동방위체로 묶으려 했다.
    그 때문에 미국은 한국에게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강력히 권고했다. 

       그러나 일본의 압제 속에서 시달렸던 한국인들이 일본과 손을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승만은 대통령은 반공의 필요성에서 일본과 어느 정도 협조해야 할 필요성은 인정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역량이 어느 정도 일본과 경쟁할 수준이 될 때까지는 일본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게다가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계속 제기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일본에 대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함으로써 맞불을 놓기도 했다. 

       6 · 25 전쟁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불리한 상황에 놓여가던 1951년 초,
    미국은  일본군을 유엔군에 편입시켜 한국에 파견할 것을 검토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1951년 1월 12일에 그는 만일 일본군이 참전하면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 ▲ 진해회담을 마친 이승만이 대만 장개석 총통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1949년)
    ▲ 진해회담을 마친 이승만이 대만 장개석 총통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1949년)
  •    1953년 초에는 장개석의 자유중국(타이완)군의 참전 가능성이 논의되자,
    이승만 대통령 또다시 펄펄 뛰면서 반대했다. 
       이승만에게 중국은 한국을 오랫동안 지배함으로써 그의 발전을 가로 막고,
    특히 1882년의 임오군란 이후 10여년 동안 원세개가 직접 와서 지배함으로써
    한국의 개화를 방해한 수구반동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직후에 정부가 없는 혼란 상태에서
    화교들이 암거래, 밀수, 불법통화 거래 같은 비리를 저지른 데 대해 나쁜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데 대해서는 협조했다.
    그리하여 1949년 8월 장개석 총통을 초청하고, 1953년 11월에는 대만을 방문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가까운 나라들인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늘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독도와 수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평화선의 선포 
        
  • ▲ 일본 침략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낸 '평화선' 선포.
    ▲ 일본 침략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낸 '평화선' 선포.
  •    6 · 25 전쟁으로 한국이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일본인 어부들은 한국의 해안과 독도를 넘나들었다. 
       얼마 안 있어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샌프랜시스코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될 것이므로
    그나마 있던 맥아더 라인도 없어질 형편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어부들의 침범을 막을 수단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1952년 1월 18일 한국의 수자원과 독도를 보호하기 위해
    동해안에 평화선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것을 침범하는 일본 선박을 나포하고 일본인 어부들을 수용소에 감금하도록 했다. 

       그것에 대해 미국을 포함한 국제 사회가 맹렬히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平和線)을 수호하는 데 단호했다. 

      그러나 그는 장래를 위해 일본과의 협조가 불가피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51년 10월 일본과 처음으로 예비회담을 열 정도로 융통성을 보였다.
    그러한 모임은 몇 차례 더 계속 되었다. 

       그러나 1953년 일본 대표 구보다가 일본의 한국 통치가 좋았다는 망언을 하자,
    회담은 깨지고 말았다.
    따라서 한일 관계 개선 문제는 이승만 이후의 정부에게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승만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러므로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북쪽으로 중국,소련,북한과 같은
    공산국가들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남쪽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 ▲ "한미방위조약은 공산침략 방어뿐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막아줄 것이다"라고 이승만은 선언했다.(1953년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국무좡관이 서명하고 이승만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 "한미방위조약은 공산침략 방어뿐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막아줄 것이다"라고 이승만은 선언했다.(1953년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국무좡관이 서명하고 이승만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    그것은 그가 브릭스 미국 대사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오늘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방위조약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그것(방위조약)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 이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대외정책을 북한, 소련, 중국과 같은
    공산국가들의 침략에 대비하려는 반공(反共) 노선에 따라 일관성 있게 끌고 나갔다. 

       이승만은 1954년 2월 필리핀에서 아시아 반공회의의가 열리도록 주도하고,
    6월에는 진해에서 아시아 민족 반공대회를 열었다. 

       이승만은 1954년 7월 미국을 국빈 방문하는 기회에 미 양원합동회의에서
    북한으로 진격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공산 체제로부터 벗어나게 할 ‘해방전쟁’을 역설했다. 
       그러나 미국이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