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OI, 광범위한 피해자 증언 청취…2014년 3월 UN총회 보고 때 상당한 파문일 듯
  • ▲ 증언을 듣고 있는 UN 북한인권조사위 위원들.
    ▲ 증언을 듣고 있는 UN 북한인권조사위 위원들.

    지난 8월 18일 우리나라를 찾은
    UN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Commission of Inquiry).

    위원들은
    지난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연세대 신촌캠퍼스 새천년관에서
    북한에게 피해를 입은 탈북자-납북자-월북자 가족 등을 만나
    북한의 인권 실태와 우리 국민의 피해에 대해 조사했다.

    김정은 일가는
    식량권 침해,
    정치범 수용소에 의한 침해,
    고문과 비인간적 대우,
    자의적인 구금,
    차별,
    표현의 자유 침해,
    생명권 침해,
    이동의 자유 침해,
    납치 및 강제실종 등
    UN이 규정한
    9가지 유형의 인권 침해를 모두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 ▲ 탈북자가 그린 북한 강제수용소의 인권유린 그림 중 하나. 해외 위키백과에도 소개할 정도로 유명하다.
    ▲ 탈북자가 그린 북한 강제수용소의 인권유린 그림 중 하나. 해외 위키백과에도 소개할 정도로 유명하다.



    23일에는
    북한 정권이
    6.25전쟁 중 대규모로 저지른
    [조직적인 전쟁범죄]에 대한 증언이 있었다.

    [납북자] 문제였다.

    이날 증언에는
    <6·25전쟁 납북인사 가족협의회>(이사장 이미일, 이하 납북가족회)
    회원들이 나왔다.

    UN 북한인권조사위는
    [납북자 문제]를
    [외국인 납치를 포함한 강제적 실종]
    (Enforced disappearances,
    including in the form of abductions of nationals of other States)로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23일 UN북한인권조사위 공청회에 증인으로 나온
    <납북 가족회> 회원은,
    이미일 이사장을 포함 모두 4명.

    이미일 이사장 또한
    6.25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4일,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부친이
    서울 청량리 자택에서
    인민군 정치보위부 소속 [유 소좌]라는 이에게
    끌려갔다고 한다.
    그의 부친도 다른 [납북자]들처럼 생사확인조차 못하고 있다.
     
    이미일 이사장의 모두발언에 이어
    6.25전쟁 당시
    서울대 병원에서 압록강 인근까지 끌려갔다 탈출한
    <박명자> 씨의 증언이 있었다.

  • ▲ 23일 UN 북한인권조사위 공청회 증인으로 나온 박명자 씨.
    ▲ 23일 UN 북한인권조사위 공청회 증인으로 나온 박명자 씨.



    6.25전쟁 당시 <박명자> 씨의 집은 세종로,
    학교는 서울대 의대 부설 간호학교였다.

    <박명자> 씨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 맹장수술을 받았다.
    6월 25일은 실밥을 뽑은 날이었다.

    <박명자> 씨가 의사의 권유로 산책을 하던 도중이었다.
    6월 25일 오후 3시 무렵,
    [휴가 나온 군인들은 모두 부대로 복귀하라]는
    방송이 곳곳에서 들렸다.

    <박명자> 씨는
    이 방송을 듣고 학교에 갔다.
    마침 응급의료장비를 트럭에 싣고 있던 자원봉사자들을 만나,
    군인들을 돕기 위해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3대의 트럭 중 2대가 전복됐다.
    <박명자> 씨가 탄 트럭은 무사했다.
    박 씨 일행과 만난 한 군의관이
    [부상병들을 서울대 병원으로 보내주고 가라]고 부탁해
    부상병들을 트럭에 싣고
    다시 서울대 병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병원 주변에서 따발총 소리가 나면서 인민군이 쳐들어 왔다.

    당시 서울대 병원의 병상은 100여 개.
    여기에는 민간인과 한국군 부상자도 있었다.

    서울대 병원으로 쳐들어온 인민군들과
    한국군 부상자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한국군 부상자는 모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박 씨는 증언했다.

    박 씨는
    서울대 병원을 점령한 인민군이
    함흥에 [후송병원]을 만든다면서,
    서울대 병원의 의료 인력을 절반으로 나눠 보낼 때
    함께 북송됐다고 한다. 

    박 씨는
    서울대 병원 의료진과 환자들을 태운 열차를 타고
    철원으로 이동했다.

    인민군은 철원에서
    환자들과 서울대 의료진들을 북쪽으로 걷도록 했다.
    하지만 환자들은 무더운 날씨에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걷는 속도가 늦어지자
    인민군들은
    [걷기 힘든 사람은 나오라]고 한 뒤
    앞으로 나온 사람들을 한 데 모아
    모조리 총으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박 씨는
    철원 이북에서,
    평양에서,
    계속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

    결국 박 씨는 압록강 인근까지 끌려갔다.

    인민군은
    박 씨가 계속 도망치려 하자
    동료와 팔을 묶어 끌고 갔다.

    박 씨는
    압록강 근처에서
    함께 묶인 동료와 용변을 본다고 한 뒤
    묶은 끈을 풀고 탈출에 성공했다.

    박 씨와 동료는
    인민군 시체에 있던 비상식량과 피가 섞인 시냇물을 먹으며,
    우여곡절 끝에 평양까지 도착했다.

    평양에서
    한 수도원에 몰래 숨어 살다
    며칠 뒤 평양에 입성한
    국군 1사단을 만나 남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였다.

  • ▲ 23일 UN 북한인권조사위 공청회 증인으로 납북 가족회 회원들. 왼쪽부터 이미일 이사장, 박명자 씨, 감항태 씨, 김남주 씨, 최광석 씨.
    ▲ 23일 UN 북한인권조사위 공청회 증인으로 납북 가족회 회원들. 왼쪽부터 이미일 이사장, 박명자 씨, 감항태 씨, 김남주 씨, 최광석 씨.

    두 번째 증인은 <감항태>(85) 씨였다.

    <감항태> 씨는
    1949년,
    21살 때 결혼했다.
    6.25전쟁 때는 임신 중이었다고 한다.

    <김항태> 씨의 남편
    <김재봉(당시 30세)> 씨는
    6.25전쟁 당시
    금융조합원으로 일하다 납북됐다.

    감 씨의 집은
    강화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교동도였다.
    감 씨와 남편 김 씨는
    6.25전쟁 소식을 들은 뒤 피난을 가기 위해 인천으로 떠났다.

    하지만 인천에 도착해보니
    이미 인민군들이 항구를 점령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감 씨와 김 씨 부부는
    피난도 못가고 1달가량 인천에서 살다
    다시 교동도로 돌아갔다.

    감 씨와 김 씨 부부가 교동도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 김 씨가
    갑자기 누님 댁이 있는 섬에 내리자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누님 댁에 가니
    [빨갱이들이 너희 형을 때려서 잡아갔다. 너까지 잡혀갈라]라며
    뱃사람을 불러 먼 섬으로 보냈다고 한다.

    감 씨의 남편 김 씨는 도망치려 했지만,
    인민군에 부역하던 [내무서] 사람들이 쫓아와
    결국 잡혔다.

    모진 폭행을 당한 김 씨를
    [내무서장]이라는 사람이 풀어주며
    [일단 몸조리 하고 집에 있으라. 그리고 내가 부르면 와라]며
    풀어줬다고 한다.

    하지만 김 씨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청년들과 함께
    [대한청년단] 강화지부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몇 달 뒤,
    김 씨가 속한 [대한청년단] 강화지부 사람들은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했고,
    인민군이 곧 철수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에 흥분한 몇몇 사람들은
    인민군이 이미 후퇴한 줄 알고 태극기를 내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민군은 아직 섬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대한청년단] 강화지부 회원과 인민군 사이에
    교전과 추격이 벌어졌다.

    감 씨는
    그 뒤로는 남편 김 씨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소문으로 남편이 북한으로 끌려간 것만 확인했다고 한다.

    세 번째 증인 <김남주> 씨는
    6.25전쟁 당시 12살이었다.
    김 씨의 부친은 <서울전기주식회사> 사장으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산업박람회 감사장까지 받았던 실업가
    <김정기>(당시 41세) 씨였다.

    인민군은
    남침 직후부터 <김정기> 씨를 납치하기 위해
    이틀에 한 번 꼴로 집을 찾아와
    가족들을 폭행하고 괴롭혔다고 한다.
    이때 12살이었던 <김남주> 씨도
    인민군이 휘두르는 총 개머리판에 맞았다고 한다.

    1950년 8월 4일,
    결국 <김정기> 씨는
    인민군에 납치돼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갔다.
    그 이후의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한다.

    네 번째 증인 <최광석> 씨는
    6.25전쟁 당시 중학생이었다.
    그의 부친은 내무부 치안국의 <최홍식>(당시 38세) 경위였다.

    6.25전쟁 직후
    최 씨의 집으로
    [내무서] 사람들과
    좌익 성향 주민 5~6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들은 최 씨의 부친을 보고선
    [잠깐 물어볼 게 있으니 같이 가자]며 끌고 갔다.

    최 씨는
    부친이 마포경찰서로 붙잡혀 갔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어떤 소식도 못 들었다고 한다.

    이들이 증언하는 내내
    UN 북한인권조사위 위원들은
    진지하게 내용을 받아 적고 있었다.

  • ▲ 6.25전쟁 납북자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 이미일 이사장은 북한이 6.25전쟁 중 납북자 범죄를 인정하고 생존자와 유해송환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6.25전쟁 납북자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 이미일 이사장은 북한이 6.25전쟁 중 납북자 범죄를 인정하고 생존자와 유해송환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납북자 가족들의 증언에 앞서
    <이미일> 납북 가족회 이사장은
    UN 북한인권조사위 위원들에게
    지금까지의 활동 상황을 설명하며
    [이들 외에도 고통받는 납북자 가족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63년이 지나도록 납북된 가족의
    소식조차 모르는 고통이 얼마나 무거운지,
    부디 위원들께서는
    북한 정권의 반인도적 범죄의 시작이자 근원인
    [남한 민간인 납북범죄]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진행해
    진실을 밝혀주셨으면 한다.

    이번 공청회를 통해
    납북 희생자들이 겪는 상실의 아픔이
    UN 인권이사회에 생생하게 전달돼
    실효성 있는 결과물이 나왔으면 좋겠다.

    북한 정권이
    6.25전쟁 당시 민간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생존자는 돌려 보내주고,
    사망자는 유해라도 송환해 줬으면 좋겠다.”


    <이미일> 납북 가족회 이사장은
    이날 증언한 4명 외에도
    127명의 납북자 가족들 증언을 확보하고 있다면서,
    UN 북한인권조사위 측에서 요구하면
    언제든지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UN 북한인권조사위는
    공청회를 통해 모은
    북한 정권의 조직적인 범죄행위와
    기존에 수집한 자료 등을 취합해
    2014년 3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북한인권범죄 보고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외교부와 북한인권단체 등은
    UN 북한인권조사위가 만드는
    [북한인권범죄 보고서]가
    UN 안보리의 대북제재와 실행 방안,
    UN 회원국들의 결의 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