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한민국을 만나는 특별한 공간, ‘파독근로자기념관’
  • ▲ 1964년 독일 방문 일정 중 파독광부들을 찾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찰 모습.ⓒ 사진 제공, 권이종 파독근로자기념관장
    ▲ 1964년 독일 방문 일정 중 파독광부들을 찾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찰 모습.ⓒ 사진 제공, 권이종 파독근로자기념관장
      

    “나라가 못살아
    여러분들이 이국땅 지하 수 천 미터에서 이런 고생을 합니다. 
    여러분들의 새까만 얼굴을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외교관이란 마음가짐으로 독일국민의 근면성을 배우고
    한국에 돌아와 우리나라가 발전하는데 힘을 보태 주십시오.

    지금은 못살아도 우리 후손들에겐 부강한 나라를 물려 줍시다”

    자그마한 체구의 대통령은 중간 중간 말을 끊어서 해야 했다.
    목이 막히는지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눈가에는 어느덧 물기가 고였다. 

    대통령의 말을 듣는 광부들의 어깨도 조금씩 들썩였다.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시꺼먼 얼굴을 주먹으로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잠시 후 대통령과 광부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에 묻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위 내용은 <파독근로자기념관> 권이종(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원장이,
    1964년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독일 방문 당시를 회상하며,
    기자에게 전한 체험담 중 일부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났다.
    24살의 앳된 청년의 머리에는 검은 석탄가루 대신 하얀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았다.

    1960년대 초반, 한국은 비참했다.
    여인들이 자른 머리로 만든 가발,
    뇌졸중 치료제의 원료가 된 오줌,
    페인트 칠붓을 만들던 돼지털이 주요수출품이었다.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힘들게 대학을 나왔어도 일거리가 없었다.
    천행으로 일자리를 구하고 한 달 꼬박 일을 해도
    식구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족들의 배라도 채우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꽃다운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은,
    이름만 겨우 들어본 멀고도 먼 나라의
    광부가 되고 간호사가 됐다.

    그들은 악착같이 일했다.
    아파도 참았고 배가 쓰리도록 고파도 참았다.
    그렇게 모은 돈은 매달 그들이 떠난 나라에 남은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독일로 건너간 이들은 공식 집계로만 2만1,000여명.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었지만,
    덜 먹고 덜 입으며 고국의 가족에게 목돈을 송금했다.

    이들이 한국의 가족에게 송금한 금액은 무려 1억 달러가 넘었다.
    1960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연 평균 69달러.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이 모은 돈은 한국을 살린 [종잣돈]이 됐다.

    그리고 한국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됐다.
    북미대륙과 서구를 제외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일궈낸 유일한 나라가 됐다.
    전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가 됐다.

    꽃처럼 아름다웠던 대한민국 청년 광부와 간호사의 눈물이 베인 돈은,
    그렇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 ▲ 파독광부들의 기념촬영.ⓒ 권이종 관장 제공.
    ▲ 파독광부들의 기념촬영.ⓒ 권이종 관장 제공.




    “동생 보내녹코 집에서 얼마나 우런는지 몰라”
    ..
    절절한 사연 담은 전시품, 눈길 사로잡아



  • ▲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파독근로자기념관에서 열린 기념관 개관식에서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기념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권이종 파독근로자기념관 관장, 박찬호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 송영중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 권광수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회장, 김병연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부회장. ⓒ 연합뉴스
    ▲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파독근로자기념관에서 열린 기념관 개관식에서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기념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권이종 파독근로자기념관 관장, 박찬호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 송영중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 권광수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회장, 김병연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부회장. ⓒ 연합뉴스
    이제는 [파독(派獨)]이란 말 자체가 낯설어진, 
    2013년 5월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서 작은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 ▲ 파독근로자기념관 전경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파독근로자기념관 전경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파독근로자기념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조무)사들의 청춘과 그 생애를 기념하는 공간이다.
    기념관은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의 염원이었다.
    이들이 기념관 건립을 간절하게 소원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 ▲ 지하 1층에 마련된 파독 광부 기념관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지하 1층에 마련된 파독 광부 기념관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만들어진 나라인지를 
    젊은 세대가 한번이라도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왜 그들이 고국을 떠나야했는지를,
    왜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두고 멀고 먼 나라의 막장을 선택해야만 했는지를,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 ▲ 기념관 지하 1층에는 당시 파독광부의 탄광 막장 작업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기념관 지하 1층에는 당시 파독광부의 탄광 막장 작업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그 상처와 비애를 생생하게 기억함으로써 
    다시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같은 아픔을 겪지 말라는 것이었다.
  • ▲ 기념관 1층에 있는 파독 간호사, 간호조무사 전시관.ⓒ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기념관 1층에 있는 파독 간호사, 간호조무사 전시관.ⓒ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1층에 들어서자마자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실제 사용한 흔적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 ▲ 당시 파독 광부들이 입었던 속옷과 작업 도구들.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당시 파독 광부들이 입었던 속옷과 작업 도구들.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막장에서 입었던 작업복은 물론이고
    이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각종 작업도구와 수첩-편지-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 ▲ 파독 광부의 급여명세서.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파독 광부의 급여명세서.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한 광부의 급여명세표도 눈길을 끈다.
    기념관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는 당시 독일 탄광과 병원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도 마련돼 있다.
    권이종 관장이 직접 쓴 일기장과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준 <동백아가씨> 레코드판 역시
    흥미로운 전시품이다.
    이 가운데 [파독]으로 헤어진 형제가 나눈 편지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동생 보내녹코 집에서 얼마나 우런는지 몰라.
    하늘에 비향기가 지날 때마다 동생 생각해“

    “비행기가 뜰 적마다 가고 싶은 내 고향…형님 다음 만나 웃어 봅시다”
  • ▲ 파독광부에 대한 설명자료.ⓒ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파독광부에 대한 설명자료.ⓒ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전시실에 붙어 있는 글귀는, 
    당시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이 처한 상황을 극적으로 대변한다.
    “당시 파독 광부의 선발 조건은 20~35세 남성이며,
    1년 이상 탄광 경력이 있는 자였으나 실제 경력은 거의 없다”


  • ▲ 파독광부들이 쓰던 '광부수첩'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파독광부들이 쓰던 '광부수첩'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실제 파독광부 출신자들의 학력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대부분 대학 재학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파독 전 이들의 직업도 마찬가지였다.

파독광부 중에는 교사와 국회의원 비서관을 그만두고 지원을 한 이들도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이 땅의 젊은이들은
독일인들이 기피하던 광부와 간호사가 되기 위해 10대 1이 넘는 경쟁을 치렀다.

"현지인들이 멸시하는 광부지만
당시 한국임금의 최대 10배가 넘는 급여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아주 높았다"

   - 권이종 관장



교수가 된 광부, “우리의 땀방울 기억해 달라”


광부와 간호사로 시작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이들도 수없이 많다.
광부와 간호사 생활을 끝내고 독일에 남아 공부를 계속한 이들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는 교수가 된 이들도 20여명이나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도 있지만,
자신이 [파독광부]였음을 숨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죄로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대우받으며,
묵묵히 지하 갱도를 파내려가야 했던 그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가 겪은 가난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
그리고 그들에게 앞으로의 미래를 맡겨야만 하는 나라,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통과 아픔은 안중에도 없는 나라.

이 작은 기념관은 바로 지금을 사는 대한민국의 주인인 청년들에게,
과거의 한국인들이 걸어 온 발자취를 알려주는 살아있는 역사속의 공간이다.



  • ▲ 기념관에 전시된 파독광부들의 작업도구들은 독일에서 직접 가져온 물건들이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기념관에 전시된 파독광부들의 작업도구들은 독일에서 직접 가져온 물건들이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단했던 그 때,
    우리는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전해주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꿈과 희망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꿈과 희망]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겨 주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이룩한 나라인지를,
    자라나는 세대들이 한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 권이종 관장 
    [Mini Interveiw]


    외국인근로자, 
    1960년대 독일로 떠났던 바로 우리의 모습


    권광수 (사)한국파독협회장

  • ▲ 권광수 한국파독협회장.ⓒ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권광수 한국파독협회장.ⓒ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지난 21일 문을 연 <파독근로자기념관>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 이주 노동자의 삶을 택해야만 했던
    우리 아버지-어머니들의 생애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는 그 가족을 모두 더한다면 줄 잡아 5만 명.
    <파독근로자기념관>은 독일로 간 광부들과 간호사들,
    그리고 그 가족과 이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를 위해 문을 열었다.
    기념관에서 (사)한국파독협회 권광수 회장(70)을 만났다.
    그는 2008년 협회가 생긴 이래,
    <파독근로자 기념관> 건립을 위해 궃은 일을 다 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이다.
    권 회장은 1970년 12월 파독광부가 되기 위해 서울을 등졌다.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한양공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9남매의 맏이였다.
    당시 교사 월급은 3만원.
    온 가족의 생계를 잇기에는 너무 적었다.
    결국 그는 [독일행]을 택했다.
    그가 독일에서 광부로 일해 받은 돈은 한 달에 15만원.
    교사 월급의 5배나 됐다.
    권 회장은 3년으로 정한 탄광 생활을 마친 뒤 그대로 독일에 머물렀다.
    1973년 명문 아헨공대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아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1984년, 마침내 그는 [암석역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권 회장은 그해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금의환향해,
    청주대-한양대 교수를 거치면서 후학을 길러냈다.

    기자:

    간절히 염원해 온 <파독근로자기념관>의 문을 열었습니다.
    먼저 축하드립니다.
    지난 2011년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기념관 건립을 간절히 원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권광수 회장:

    20~30세 젊은 나이에 독일로 일하러 떠났던
    우리가 모두 70세를 넘겼습니다.

    우리의 꿈이었던 기념관 건립이 드디어 결심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이제 출발입니다.

    1960~70년대 독일로 갔던
    7,968명의 광부, 1만2,000여명의 간호사·간호조무사들 대부분이
    칠순을 넘긴 나이라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일한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보낸 돈이
    한국 경제발전에 초석이 됐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1960년대 초,
    한국의 경제상황은 암울했습니다.
    보릿고개로 많은 국민들이 헐벗고 굶주림 속에서 생활했습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로 간 우리들은
    그곳에서 번 돈을 국내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했습니다.

    가족들이 그 돈을 사용했고,
    이로 인해 한국의 경제가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자:
    <파독근로자기념관>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권 회장:
    사실 기념관을 연 것은...
    우리를 알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독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같은 민족-국민들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파독근로자기념관>은
    고단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 속에서 경제성장을 이뤘는지,
    또 그 안에 앞선 세대들의 눈물과 땀방울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것을 알게 되면,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근로자를 바라보는 시각부터 변할 겁니다.

    대한민국도
    한때는 해외로 나가 돈을 벌어야 했던 나라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다문화가정에 대한 오해와 편견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1960년대 독일로 떠났던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시는 길]

    파독기념관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일 문을 연다.
    단체관람을 신청하는 경우는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 마련된 전시실을 관람하고
    지상 2층에 마련된 강의실에서 영상물도 관람할 수 있다.

    주차공간은 차량 6대, 될 수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신분당선 양재시민의 숲(매헌)역 3번출구에서 도보로 15분 거리다.

    주소 : 서울시 서초구 강남대로6길 77(양재동 342-5)
    전화 : 02) 581-7891
    홈페이지 : www.kdg.or.kr

    ***************************************************************************************
    [관련기사]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교수가 된 광부, 
    ‘파독광부’를 아십니까?


    서울대 나와도 일자리 없던 시절, 
    너무도 배고파 ‘너도 나도 광부 지원’

    “목욕은 하느냐?” 독일인 첫 물음, 
    막장 환경 열악 “매 순간 죽음과 싸워”


  • ▲ 파독광부들의 기념촬영 ⓒ뉴데일리
    ▲ 파독광부들의 기념촬영 ⓒ뉴데일리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다. 12월 18일 박대통령 내외는 광산을 방문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기 위한 자리였다. 

    박 대통령은 이들을 보자마자 울먹였다. 당시그 자리에 있었던 한 광부는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나라가 못살아 여러분들이 이국땅 지하 수천미터에서 이런 고생을 합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여러분들의 새까만 얼굴을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겨우 마음을 진정한 대통령은 당부했다. 
    “외교관이란 마음가짐으로 독일국민의 근면성을 배우고 한국에 돌아와 우리나라가 발전하는데 힘을 보태 주십시오. 지금은 못살아도 우리 후손들에겐 부강한 나라를 물려줍시다”

    함께 애국가를 부르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대통령 내외와 광부들 모두 부둥켜 안고 울었다.

    고희를 넘긴 한 대학 교수가 46년 전 가슴 아픈 추억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부가 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다. 이른바 ‘파독광부’,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이 땅의 젊은 이들은 독일인들이 기피하던 광부와 간호사가 되기 위해 10대1이 넘는 경쟁을 치렀다.

    그렇게 독일로 건너간 이들은 공식 집계로만 2만1천여명. 재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 후손을 합치면 파독광부와 간호사 가족은 5만여명에 이른다. 

    권 교수 처럼 광부와 간호사로 시작해 교수가 된 이들도 20여명이나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도 있지만 자신이 ‘파독광부’였음을 숨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죄로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대우받으며, 묵묵히 지하 갱도를 파내려가야 했던 그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을까? 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울림은 과연 무엇일까? 
    교수가 된 파독광부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파독광부 총연합회 부회장).ⓒ 뉴데일리
    ▲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파독광부 총연합회 부회장).ⓒ 뉴데일리


    기념관 건립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현재 부유함의 바탕에는 기성세대의 땀방울이 있다. 이것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상상할 수없을 만큼 가난해고 배고팠던 그 때 우리는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전해주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꿈과 희망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꿈과 희망’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겨 주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이룩한 나라인지를 자라나는 세대들이 한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경험을 통해 근검과 절약의 가치도 다시금 생각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광부로 독일을 간 이유는 무엇인가

    1963년 첫 파독당시 한국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수출품이라고 해야 고작 가발과 봉제완구 정도였고, 봄이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을 해야 했다. 서울대를 나와도 직장을 구하기 힘들었다. 굶는 것이 제일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행을 선택했다. 독일이라는 선진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있었다.


    경쟁률이 상당히 높았다고 들었다. 

    광부를 신청한 이들 중 상당수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이었다. 공무원과 교사들도 있었다. 광부라지만 당시 한국임금의 10배를 넘는 급여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계약조건은 어땠나?

    정해진 근무기간은 3년이었다. 나머지는 그 당시 독일 근로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당시 한국의 실정에 비한다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 ▲ 1964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의 파독광부 시찰 당시 모습 ⓒ뉴데일리
    ▲ 1964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의 파독광부 시찰 당시 모습 ⓒ뉴데일리


    일하기가 쉬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처음 갔을 때 독일 사람들이 목욕은 자주 하느냐는 말을 했다. 그만큼 우리를 후진국의 미개인으로 여기는 듯 했다.

    말도 다르고 음식도 달랐다. 광부와 간호사는 당시 독일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직업이었다. 모든게 어려웠다.

    특히 막장의 환경은 열악했다. 지하 1,000미터를 내려가 작업을 했는데 100미터 내려갈 때마다 지열이 1도씩 올라갔다. 때문에 막장 내부온도는 35가 넘었다. 너무 덥고 습해 옷을 거의 벗고 일을 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장화속 양말이 흥건히 젖어, 신고 있던 양말을 짜낸 후 다시 신어야 할 정도였다. 막장에 내려갈 때 6~7리터들이 큰 물통을 가지고 내려가는데 일을 하다보면 물통이 비곤 했다.

    광산 일을 끝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모은 돈의 대부분을 송금하다보니 독일에서도 늘 배고픈 생활을 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인가? 

    매 시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일을 했다. 막장이 무너져 내려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가스폭발이나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가는 사고로 평생 장애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매일 죽음이란 두려움과 싸워야 했다. 석탄가루가 폐에 쌓이는 진폐증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더위도 정말 참기 힘들었다. 


    독일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숙소 근처에 고사리가 지천으로 널려있어, 그것을 뜯다 ‘자연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힌 일이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청국장과 김치를 정말 좋아했는데 한번은 숙소에서 청국장을 끓여먹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일도 있었다. 악취가 난다는 이유였다.

    광부생활을 그만 둔 후 아헨대 사범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마늘을 먹은 다음날이면 같은 과 동료들이 냄새가 난다며 전부 자리를 피하곤 했다.  
      

    광부생활을 그만 둔 후, 독일에 남아 대학을 진학했다

    3년이 지나 광부 일을 그만두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짐도 모두 한국에 보낸 뒤였다. 비행기를 타러 공항까지 갔는데 독일에서 나를 보살펴 주던 현지인 수양어머니께서 나를 붙잡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남아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말씀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한국행 비행기를 그대로 보내고 결국 독일에 남기로 했다. 
    수양어머니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국립 아헨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을 말해 달라

    독일에 남기로 했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려면 다시 체류허가가 필요했다. 내게 공부를 권유했던 현지인 어머니의 소개로 당시 독일에 주둔해 있던 벨기에군 PX에 임시로 일자리를 마련해 겨우 고비를 넘겼다.

    어려서부터의 꿈이 초등학교 교사였다. 자연스럽게 사범대학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다른 나라 사람이 독일 국립대학의 사범대에 입학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입학허가를 받는 것이 정말 어려웠는데 사범대학장께서 내 딱한 사정을 듣고 특별히 입학을 허가해 줬다.

    그렇게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광산에서 일만 한 사람이 어떻게 대학수업을 따라 갔겠는가?

    사전을 씹어 먹으면서 공부했어도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을 따라가기가 정말 힘들었다.
    고향이 너무 그리웠다. 배고픔도 고통스러웠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 걸고 울기도 여러번이었다. 우울증에 자살을 생각해 본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도교수님께서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해선 안된다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장학금도 알아봐 주시고 일자리도 소개해 주셨다.

    그렇게 조금씩 적응해 나가면서 주말에는 한글학교에서 동포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고 직업학교 교사도 잠시 했다. 67년 입학해 79년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았다.


    결혼을 독일에서 했다

    대학에 입학해보니 한국인 여학생이 있었다. 나와 같은 파독 간호사 출신이었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 출신 대학생 커플이 결혼을 한다고 현지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 출신으로 교수가 된 이들도 있다던데 

    나를 포함해 모두 20여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안다. 국내에는 15명 정도가 있다. 그러나 광부출신임을 밝히지 않는 이들도 있어 정확한 집계는 아니다. 대부분 자연과학이나 공학계열을 전공했고 인문사회분야를 전공한 이는 내가 유일한 것 같다.


    파독광부들의 현재 생활수준은 어떤가?

    소재가 확인된 국내 거주 파독광부 중 연합회에 가입한 이들은 채 5백명 안 된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연 1만원인 회비를 납부하기 어려울 만큼 생활이 곤궁하다. 아직도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황식 총리가 취임해 가장 먼저 만난 외부단체가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김황식 총리께서 취임한 후 총리공관으로 우리를 초대해 만찬을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정부에 파독광부 간호사 기념관 건립, 공무원 및 학생 등 국민에 대한 강연 및 홍보지원,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예우 등 세 가지 안을 요구했다.

    총리와 정치권 일각에서 이 문제를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 ▲ 파독광부총연합회 정기총회. ⓒ뉴데일리
    ▲ 파독광부총연합회 정기총회. ⓒ뉴데일리


    파독광부총연합회에 대해 말해 달라. 어떤 일을 하는가?

    파독광부와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약 2만1천여명에 이른다. 광부는 8,968명, 간호사는 약 1만2천여명이다.

    이들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고, 그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진 존재가 돼 가고 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애환이야 말 할 것도 없지만 이 사업이 당시 우리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영향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체계적인 연구가 없다.

    자라나는 세대가 모르고 지나쳐쳐 좋을 단순한 옛 추억이 결코 아닌데 소홀이 다뤄지는 측면이 있다.

    연합회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자 2008년 10월 결성됐다. 파독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백서를 발간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해 보급 중이다. 각급학교 학생과 군부대 장병, 지역주민들을 위한 강연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국내 거주하는 파독광부, 간호사들의 소재를 확인해 정보를 교류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기념관 건립 추진 상황은 어떤가? 

    연합회 차원에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예산 마련에 어려움이 크다. 국가에 관련 예산 25억원을 신청해 놓은 상태지만 반영될지 불투명하다.

    유명한 체육선수나 연예인을 위해서도 수십억 이상의 예산을 들여 공원이나 기념관 등이 만들어지는 현실을 보면 마음이 더욱 착잡하다.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가 자기들의 조상들이 왜 먼 타국땅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일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