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대결, 전쟁으로 확대‥6일 교전 "3,000명사망 1만2,000명 부상"
  • ▲ 당신 경기결과를 알리는 온두라스 신문.ⓒcuriosidadesdelmundo
    ▲ 당신 경기결과를 알리는 온두라스 신문.ⓒcuriosidadesdelmundo

    축구는 전 세계 인구중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이다. 축구는 격렬하게 신체가 부딪치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경기 방식 때문에 국가대표 축구 경기는 흔히 전쟁에 비유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서로 전쟁을 했던 경우는 축구가 일종의 전쟁의 대리전 양상으로 비춰진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또는 한·일의 경기가 대표적인 국제경기로 알려졌다.

    아예 국가 간의 축구 경기가 3,000명이 희생된 전쟁으로 확대된 사례가 있다.

    1969년 7월 중미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간에 벌어졌던 이른바 축구경기 결과가 전쟁의 단초가 됐다.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1970년 제9회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북중미 최종 예전 A조에서 대결한다. 1차전은 6월 8일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개최됐다.

    시합 전날 밤 엘살바도르 선수단이 묵고 있는 호텔 밖에서 온두라스 응원단이 밤새도록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고함등 소으을 내면서 엘살바도르 선수단에 대한 고의적인 행동을 한다. 소음에 밤새 시달렸던 엘살바도르 선수단은 그래서인지 다음날 경기에서 1대0으로 패배한다.

    그런데 이 경기 직후 엘살바도르에서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난다. TV로 이 경기를 지켜보던 엘살바도르의 한 소녀가 충격에 못 이겨 권총으로 자살한 것이다. 이 소녀의 장례식에 대통령까지 참석했고 장례식은 TV로 엘살바도르 전국에 생중계 됐다.

    ◇자존심 건 '살벌한 응원전' 장외서 폭력시위로 이어져

    1주일 후 이번에는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양국 간에 2차전을 앞둔 하루전 이번에는 온두라스 대표단이 묵고 있는 호텔 밖은 소란스러웠는데 엘살바도르 극성 팬들이 자동차 경적을 울려대고 폭죽까지 터트리면서 밤새 온두라스 대표 선수들이 잠을 잘 수 없도록 괴롭힌 것이다.

    다음날 경기결과는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를 3대0 으로 크게 이기고 이 경기로 두 나라 국민들의 감정이 극에 달하게 된다.

  • ▲ 온두라스 테구시갈파에 엘살바도르 선수단이 있는 호텔앞 상황.ⓒcuriosidadesdelmundo
    ▲ 온두라스 테구시갈파에 엘살바도르 선수단이 있는 호텔앞 상황.ⓒcuriosidadesdelmundo

    2차전 직후 살바도르까지 원정 응원을 왔던 온두라스인들이 심판의 편파 판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엘살바도르 사람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하고 2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 온두라스 응원단을 태우고 온 버스 100여대가 엘살바도르 사람들에 의해 불타는 일이 발생했다.

    이같은 소식은 온두라스 국내에도 그대로 전해졌고, 온두라스 사람들도 자국 내에 있는 엘살바도르인들에 대한 보복에 나서게 된다. 약탈과 방화에도 분을 삭이지 못한 온두라스 사람들은 살인도 주저하지 않았고 엘살바로르 사람 수십 명이 피살되는 최악의 사태가 빚어졌다.

    열광적인 축구 응원은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고, 온두라스 정부는 6월 16일 엘살바도르에서 생산된 물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시켰고 이틀 뒤에는 세계 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의 살상 행위를 제소하게 된다.

    이어 23일에는 마침내 국교 단절을 선언한다.이같은 극한 대립 상태에서 양국 대표팀은 제3국인 멕시코에서 마지막 3차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관중보다 경찰이 더 많이 배치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진다.

    경기에서 양 팀은 2대2로 비겼지만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의 로드리게스 선수가 결승골을 터뜨려 월드컵 본선 진출권은 엘살바도르가 차지하게된다. 그러나 엘살바도르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7월 14일 온두라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월드컵 본선 티켓 따낸 엘살바도르 '전쟁선언'

    양국간의 분쟁은 엘살바도르 공군이 국경 인근 온두라스 도시를 공습하고 기갑부대가 온두라스 국경을 침범하면서 시작됐다.

    전투는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6일간 계속됐고 엘살바도르는 60대의 항공기와 지상군 3000여 명을, 온두라스는 30대의 항공기와 4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가난했던데다가, 반군의 활동 등으로 국내 치안이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규모 지상전보다 전투기에 의한 공습과 공중전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양국은 잠시 동안 휴전에 들어간다.

    휴전 이유는 때마침 인류 최초의 달 착륙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발사 장면을 양국 국민이 지켜보도록 한 배려하자는 이유 때문이었다. 

  • ▲ 진격하는 온두라스의 군대.ⓒcuriosidadesdelmundo
    ▲ 진격하는 온두라스의 군대.ⓒcuriosidadesdelmundo


    아폴로 1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자 양국은 그 날 밤 전쟁을 재개했다. 결국 이 전쟁은 미주기구가 중재에 나서 같은 해 7월29일 엘살바도르가 무조건 철수에 합의함으로써 종료된다.

    비록 일주일간의 짧은 전쟁이었지만 양국에서 3000여 명이 전사하고, 1만2000 명이 부상을 당하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축구에서 지고 전쟁에서도 진 온두라스는 1976년 7월에도 엘살바도르를 징벌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지만 역시 일주일 만에 휴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티격태격하던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은 1980년 페루 리마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단락됐다.

    ◇골 깊었던 양국간 감정…월드컵 예선전이 도화선 

    서로 인접한 두 나라는 오래전부터 국경 분쟁으로 충돌이 잦았다. 1950년대 이후부터는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약 30만 명의 엘살바도르인이 국경을 넘어 온두라스에 무단 거주하고 있었다.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에 비해 6배나 큰 국토면적과 비교적 비옥한 농토가 있기 때문이다.

    또 이들 엘살바도르 사람들은 문맹률이 60%에 달하는 온두라스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터라 부를 빼앗긴 온두라스 국민들의 원성이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1969년 온두라스 정부는 농지개혁을 단행하고 자국의 영토에 무단 거주하고 있던 엘살바도르 사람 수만 명을 추방조치를 단행한다.

    이렇게 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하면서 월드컵 최종 예선은 폭탄의 불을 당기는 도화선 역할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