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또 다시 미치광이가 되어야겠구먼."

    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⑫
    수복된 북한지역 관할권을 한국에 주지 않은 데 분노한 老대통령
李東馥  

<1950년10월15일>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쓰는 일은 정말 어렵다.
대통령은 나에게 한 줄이라도 좋으니 날마다 간단하게 기록하라고 당부했다.
어제는 김광섭 비서가 연락도 없이 늦게 왔다. 대통령은 그에게 시킬 일이 많아서 아침부터 金 비서를 기다렸다. 대통령은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을 좋아 하지 않는다.
金 비서는 詩人이기 때문에 文人 기질이 있어서 자유분방한 면이 있지만 나와는 달리 대통령은 항상 그를 감싸 준다. 김 비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의 잘못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너그럽지 못한 성미 탓에 나는 부석해진 김 비서의 얼굴과 술 냄새로 “또 술을 마셨구나”라고 직감했다. 대통령도 기분이 안 좋은 음성으로 늦게 온 이유를 김 비서에게 물었다. 김 비서는 납북되었거나 죽은 줄 알았던 친구들을 만나 밤새껏 막걸리를 마셨다고 실토했다. 

이 말에 화가 풀린 대통령은 “절친한 친구들이 안 끌려가고 용케도 살아남아 있었으니 반가웠겠구먼. 그래 별다른 소식은 없었나?”하고 물었다. 金 비서는 많은 문인들이 敵 치하에서 온갖 고생을 다 견뎌냈으며 현재 확인된 바에 의하면 박종화(朴鍾和), 김동리(金東里), 유치진(柳致眞), 방기환(方基煥), 오종식(吳宗植), 양주동(梁柱東) 씨 등이 무사하다고 보고해서 대통령이 무척 기뻐했다.  

12일 유엔한국임시위원회는 비밀회의를 열어 유엔군이 점령한 북한 해방지역의 임시 민간행정권을 한국정부에 주지 않고 유엔군 총사령관의 관할 하에 둔다는 오스트레일리아 제안을 가결했다고 임병직 외무장관이 전화로 보고했다.
대통령은 공산당의 잔인무도한 통치 하에서 혼이 난 북한동포들이 이제는 유엔군 軍政 하에서 우방의 철부지들이 휘두를 총대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낼 비밀전문을 작성하여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로 보냈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의 결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한국 국민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협조 하에 자기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한다는 스스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는 평화와 질서회복을 위하여 2년 전에 임명한 이북 5도지사들을 파견함으로써 전투행위가 끝나는 곳마다 민간행정을 인수 중에 있습니다.
현지 사정이 선거를 치를 준비가 된다면 남한 국민이 누리고 있는 시민의 권리와 특권을 북한의 모든 동포들도 똑같이 누리는 자유 분위기 속에서 그들 자신의 도지사들을 선거하도록 허용될 것입니다. 유엔임시한국위원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본인은 장차 적당한 시기에 대통령직을 사임할 의사가 있으나 이번 전쟁의 유일한 목적인 공산당 문제는 그 전에 전적으로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북한과 남한 국민의 뜻은 소련이나 기타 어떠한 외부세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가운데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트루먼 대통령과 회합하러 웨이크도로 출발하기 직전에 대통령에게 보낸 회신이 왔다. 

“본인은 제 자신의 동정적인 확인과 함께 각하의 전문을 워싱턴에 보냅니다. 본인은 이 문제를 무쵸 대사와 의논했는데 그는 귀임하는 대로 그 문제에 관한 본인의 견해를 충분히 각하께 전할 것이고 본인은 그가 각하께 드리게 될 권고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바입니다. 한편 본인은 워싱턴에서 정세 검토를 위한 기회를 가질 때까지 각하께서 지나친 염려를 하시어서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하시는 것을 피해 주시도록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電文을 받아 쥐고 안면에 경련을 일으키며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한 동네에 사는 집에 난 불을 끄는 데 도와준 이웃 친구들이 그 대가로 불난 집 주인의 눈과 귀를 가리고 손발을 묶어 놓은 채 이제는 남의 집 살림까지 좌지우지(左之右之)하겠다는 경우가 아닌가? 대통령은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나에게 “이런 데도 가만히 앉아있을 집 주인이 어디 있겠느냐”면서 “도대체 이런 경우 어디까지 우방을 믿어야 한단 말이냐”고 한탄을 거듭했다.  

러-일 전쟁 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일본에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권익을 확인시키면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했었다. 그로 인하여 급기야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빼앗게 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제는 중공과 소련에 대한 유화정책의
제물로 한국의 통일을 희생시키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을 한다는 말인가.
2차대전 중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지지 못했던 미국의 세계정책 수립자들은 멀쩡한 한반도를 38선으로 분단하여 마침내 韓民族의 비극을 초래했다. 그나마 남한을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우선 國權을 회복하겠다는 대통령의 노력을 당시의 美 군정은 얼마나 백안시(白眼視)하고 탄압했던가?

그리고 신생 공화국의 자체 방위 노력에 그들은 얼마나 기여했다고 생각하며,
한국이 서태평양의 미국 방위권에서 제외된다는 미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장관의 지난 1월 연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던가?
지금은 애국하는 ‘우리 아이’들이 통일을 위하여 용약 북진하고 북한동포들이 우리를 환영하여
하나의 민족이 지난날의 울분을 씻어내려 하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한 판국에 한국을 알지도 못하는 여러 나라 군인들의 軍政이 가져올 혼란을 그들은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그들은 가까운 지난날의 역사나 경험에서조차 배우려 들지 않으며 또한 배우지도 않는다. 대통령은 오랜 독립운동 중 미국의 정책 담당자가 한국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노력해
왔으나 많은 경우 그들은 배우려 들지 않았고 결국에는 자타가 감당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희생을 자초한 일이 허다했다. 

이 어려운 때를 당해 대통령은 더욱 확고한 신념에 차 있는 것을 나는 안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대통령의 마음처럼 나의 마음에도 각오가 서는 것 같다.  

<10월16일> 

미 대사관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아침에 찾아왔다.
그는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남한에 국한시킨다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선언에 대항하는 어떠한 성명도 발표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대통령은 드럼라이트에게 “당신네들은 몇 개월 안에 전쟁을 통해 피 흘려 싸워서 얻은 것을 모두 잃게 될 것이고 한국사람들은 결코 그와 같은 조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된 민주정부 아래서 누리게 될 전체 한국민들의 자유와 행복이 대통령이 평생을 몸 바쳐 싸워 온 목적이었다. “자유국가의 자유민으로서의 궁극적 통일과 평화는 우리 민족 전체의 염원이기 때문에 어떠한 애나 어려움에 부딪치더라도 우리는 기어이 극복해 내고야 말 것”이라고 대통령은 힘주어 말했다.  

대통령은 “나라가 통일되면 그동안 겪었던 우리 민족의 고난과 불행이 덜어질 것이고
우리 국민은 전쟁의 고통과 파괴 속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이어서 드럼라이트에게 말했다. “피난민들은 모두 고향집으로 돌아가서 남북으로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나서 함께 살 수 있고, 같은 부모의 한 형제가 서로 총을 겨누는 비극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북한의 풍부한 전력과 함께 광물과 석탄을 캐내어 산업을 부흥, 발전시키면 통일한국은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국민과 장병들은 물론 부상병들까지도 불구의 몸이지만 통일전선에서 다시 싸우게 해 달라고 청원해 오고 있다.”
대통령의 열변에 감동한 드럼라이트는 조용히 돌아갔다.  

드럼라이트가 다녀가고 얼마 후에 <뉴욕타임즈>의 리처드 존스턴 기자가 찾아 왔다.
대통령은 존스턴과, 미 군정을 북한 지역에 설치하는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했다.
대통령은 존스턴에게 군정법령 사본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은 몹시 흥분하여
“이 사람들이 어떻게 공산당국을 인정하고 한국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대통령은 “지금 한 창 올라가 있는 미국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것이고 우리 국민들은 이러한 일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일 것이며 지금까지는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을 우러러 보았지만 앞으로는 크게 신망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미국은 언제나 전쟁에는 이기지만 평화에는 지고 있는데 왜 그런지 아느냐”고 따졌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새로 회의를 열고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남한 지역에 국한시키고
유엔은 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은 그것이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바라던 것이 아니며 하나의 타협안으로 제시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임시위원단의 결의는 북한의 모든 단체 조직을 존속시키겠다는 것인데 사실상 북한에는 공산당에 의하여 획일적으로 통제되는 조직체들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인도의 거중조정이 받아들여진 것임이 분명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세계대전을 회피하려면 소련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국무성의 유화정책을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다고 대통령은 우려했다.  

소련은 위성국가들 앞에서 체면을 유지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다. 소련은 직접 싸우는 것을 원치 않고 자기들의 괴뢰들이 싸워주기를 바라는데 북한의 괴뢰들은 이 싸움에서 패배했다.
이 사실은 철의 장막 뒤의 모든 공산국가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련은 “대한민국을 북한 땅에서 몰아내라, 북한의 권력기구와 법정을 온존(溫存)시켜라, 유엔이 북한에서 선거를 먼저 시행하고 나라는 나중에 통일시켜라” 하는 식의 제안으로
단일민족인 한국을 또다시 각각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갈라놓고자 책동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그들의 책동이 주효하여 이번의 戰亂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통일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여 외국의 한반도 재분할 목적에는 기여하겠지만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엄청난 비극을 치른 당사국인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희생이 없다.
대통령은 이 같은 민족의 비극을 넘어 서서 하나의 커다란 보람, 즉 통일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또 다시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미치광이’ 소리는 독립운동 때 듣던 말이었다. 대통령은 그러나 이번에 들을 ‘미치광이’ 소리는 소위 ‘우방(友邦)’의 정치지도자들로부터 듣게 될 것이라면서 “통일이 되기만 하면 그 같은 욕은 얼마나 감수하기 좋은 욕이냐”면서 웃었다.  

敵 치하에서 숨어 다니며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목숨을 건진 대통령의 가까운 친척들이 찾아 왔는데 너무도 반가워서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그들은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자기들을 숨겨주고 살려 준 恩人들이 공산당에 부역한 죄로 여러 수사기관에 끌려가서 곤욕을 치르고 석방되었었는데 이번에는 제일 무섭다는 특무대로 다시 끌려갔다면서 대통령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피난 갈 시간도 주지 않고 한강 다리를 폭파해 버려서 석달 동안 敵 치하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한 것도 억울한데 이제 와서는 죄인 취급을 받게 되었다고 서울시민들이 무척 분노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원성이 높다고 조카 심(沈) 씨가 대통령에게 이야기했다. 대통령은 몹시 침통한 표정으로 “서울시민들을 먼저 피난시키지 못한 내가 죄인일세. 아무튼 나를 찾아보러 와서 고맙네”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친족처럼 아꼈던 이선직 비서가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했다는 悲報를, 김정흥 총경이 전했다. 이 비서는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선생의 손자로 바르고 곧은 선비 집안의 품격과 고결한 면이 있었는데.... 대통령은 참으로 비통해 했다. 이유선 의원이 대통령의 문중 동생뻘이 되는 이승국 씨가 납북되어 소식이 끊긴 지 오래라고 알려 왔다. 양녕대군(讓寧大君)파의 도유사(都有司)로 있었던 이승국 씨는 대통령이 옛날부터 퍽 가깝게 지내며 좋아했던 학자로 정인보 씨와 함께 감찰위원장 물망에 오른 적도 있었는데 대통령은 정인보씨를 택했었다. 

신성모 장관이 김창룡(金昌龍) 장군과 이선근 대령을 대동하고 와서 북진 중인 국군이 곧 평양과 함흥에 유엔군에 앞서서 진입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김창룡 장군에게 경미한 부역을 했던 서울시민들이 수사기관마다 끌려다니며 곤욕을 여러 번 치르고 또 특무대에 대한 원성이 있다는데 어찌된 일인가 물었다. 김 장군은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과잉수사와 보복감정에 의한 여러 가지 불상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사례는 근절되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하루아침에 바보나 병신을 만들 수는 있지만 人材는 단시일에 만들 수 없으니 특히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욱 신중하게 다룰 것이며 처벌보다는 훈방 위주로 일을 처리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대통령은 또 “악질 부역자라도 회개하고 전행시켜 동포 한 명이라도 더 구해 주기를" 바랐다.  

이우익(李愚益) 법무장관이 와서 부역자 심사문제와 처리에 대해 대통령에게 긴 보고를 했다.
대통령은 억울한 사람들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해서 심사할 것을 당부하면서 김창룡 장군에게 했던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李 법무는 현재 부역자 심사를 맡고 있는 심사실장이 敵 치하의 서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정희택(鄭喜澤) 검사라면서 공정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10월17일> 

일기를 쓰는 일이 힘들기는 해도 쓰고 난 다음 대통령의 칭찬을 듣게 되면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된다. 대통령이 文人인 김광섭 씨를 비서로 기용한 것은 우리의 경무대 일기를 한글로 적도록 하고 대통령의 기념사나 축사 같은 연설문을 받아 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 비서는 우리의 일기를 너무나 시적(詩的)으로 아름답게 써냈기 때문에 대통령의 본 뜻에 맞지 않았다.
대통령은 그날그날 일어났던 일을 꾸밈없이 사실대로 적어두기를 원했는데 김 비서가 쓴 일기는 멋있게 표현된 서사시(敍事詩)에 가까웠다. 그래서 대통령은 할 수 없이 나더러 매일 일기를 기록하도록 했다.  

敵 치하에서 부역했던 일반시민과 사회지도급 인사의 대부분이 자술서만 쓰고 훈방되고 있으며 전원 불문에 붙이기로 방침을 세웠다고 오제도(吳制道) 검사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지난 일이지만 오 검사를 공산당이라고 모함하는 투서 등과 함께 그럴 듯 한 정보가 경무대로 전달되어서 6·25 두 달 전에 조사를 하게 되었었다. 그 정보를 날조하여 吳 검사를 제거하려 했던 치안국 중앙분실장 백형복 총경이 자신의 정체가 탄로될 것을 두려워하여 기밀문서를 훔쳐가지고 월북해 버려 배후를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었다.
오 검사를 없애려는 공산당의 밀고에 속아서 하마터면 독실한 교인이며 투철한 반공투사를 잃을 뻔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