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를 좌편향 시킨 사람들...서중석 그룹과 전교조 '전역모'
  • 한국사 교과서,
    언제 누가 어떻게 편향 시켰나

    정경희(아산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
  • Ⅰ. 머리말


   지난 2002년은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새로이 도입된 교과인 『한국 근·현대사』교과서가 출간된 해이다. 교과서 검정을 통과한 6종의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교과서 가운데 몇몇 교과서는 매우 편향된 이념 성향을 보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교과서는 극도의 편향성을 드러냈다. 금성교과서를 현재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는 국사 개설서인 『한국사신론』 이나 『다시 찾는 우리 역사』 와 비교해 보면 그 이념 성향이 지나치게 좌로 편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7차 교육과정 이후, 편향된 국사교과서를 통해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우리의 국사교육은 파행된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현재와 같은 편향된 국사교과서를 통한 국사교육이 계속해서 이루어진다면 지난 60여 년간 숱한 시련을 딛고 피땀 흘려 이룩한 대한민국이 바탕부터 송두리째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이념적 편향성이 심각한 교과서를 통해 국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우려스런 상황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매우 깊다는데 있다.

   본 발표에서는 7차 『한국 근·현대사』교과서 및 현행 일부 『한국사』교과서와 같은 이념적으로 편향된 국사교과서를 통해서 오늘날과 같은 편향된 역사교육이 이루어지게 된 역사적 연원을 밝혀보려 한다. 즉 최근의 국사교육, 특히 근현대사 교육이 이처럼 편향된 사관에 입각해서 이루어지게 된 경로를 추적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제기하는 의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오늘날과 같은 편향된 국사교과서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국사교과서 기술의 준거가 된 「국사교육 내용 전개의 준거안」을 비롯해서, 건국 이후 우리나라 국사교과서 기술과 개발에 영향을 미친 여러 서술지침은 누구에 의해서 작성되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198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한 민중사학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들의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서 민중사학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했는가?



Ⅱ. 민중사학의 대두


   국사교과서 서술에 영향을 미친 1980년대 말의 사회변화로는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대두했다는 것, 그리고 이들 민중사학자들에 의해 국사교과서 국정제에 대한 비판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먼저 민중사학의 대두에 대해 살펴보자.


  1. 민중사학이란 무엇인가?

   ‘민중사학’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선언적 명제에 기초하여 “역사를 민중의 주체성이 확대되어가는 과정으로 해석하고, 이를 토대로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변혁의 전망을 모색하는 실천적인 학문 경향”이라고 규정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중사학의 뿌리 가운데 하나인 1970년대의 민중론이 한국사회를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사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중론은 한국사회의 특수한 조건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한국사회는 식민지 혹은 신식민지사회라는 점, 이러한 조건에서는 서구와 같은 자립적 자본주의에로의 발전전망을 가질 수 없다는 점, 따라서 한국에서는 독자의 발전전망, 변혁의 전망을 세워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한국사회에서의 변혁이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양자를 통일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도달하였고, 그 극복의 주체로서 두 모순을 함께 지양해 나갈 ‘민중’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사학에서 말하는 민중이란 근대 역사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구도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도식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배계급과 기층 민중의 대립구도라는 도식으로 파악한데서 비롯된 용어이다.


  2. 민중사학의 성격과 문제점

   민중사학의 역사방법론과 사관은 마르크스-레닌의 사적 유물론(史的 唯物論)에 입각하고 있다. 또한 민중사학은 한국 근현대사를 기본적으로 반봉건의 근대화와 반제항쟁 과정으로 파악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민중사학자들은 ‘유물사관’이나 ‘사회 구성체 이론’과 같은 좌파 이론을 도입하는 실험도 서슴지 않았다.

   민중사학의 연구과제는 민주화, 자주화, 민족통일로 집약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과제는 통일이므로 민중사학의 첫 번째 과제는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이었다. 강만길은 1970년대부터 기존의 한국사 연구가 분단 현실을 외면하는, 따라서 분단체제를 정착, 지속시키는 데만 이바지하는 빗나간 학문이라고 비판했다. 대신에 그는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사론, 즉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지도 원리로서 올바른 민족주의를 수립하고 그러한 목적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하는 국사학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강만길의 이러한 제안은 역사학이 현재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통일에 도움이 될 사실(史實)만을 골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처럼 통일문제를 민족의 지상과제로 삼는 까닭에 민중사학자들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결정적인 결함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술한다는 역사학의 근본 목표로부터 크게 벗어남으로써 역사학을 명분 또는 염원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 위에 올려놓게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현재로서 통일은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의 대상일 뿐인 데, 그것을 향해 역사 연구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연구자의 희망에 따라 곡해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3. 민중사학 대두의 원인

    가.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의 증가

   그렇다면 민중사학이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대두한 주된 요인은 무엇인가? 우선 젊은 학자들의 상당수가 근현대사, 특히 현대사 연구에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연구풍토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민중사학자들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전반에 민중사학론을 제창한 주역들이 저술한 책들을 주로 읽으면서 대학시절을 보낸 세대이다. 이들이 대학생이던 시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분단시대의 역사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민족·민중주의 사관(史觀)에 입각해서 쓰인 현대사 책들이 널리 읽혔다. 이밖에 전 한양대 교수인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 1974), 『우상과 이성』(한길사, 1977),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 1977) 등도, 비록 역사책은 아니지만, 이들의 역사 인식을 형성하는데 한몫 했다. 이러한 대표적인 서적 이외에도 1982년 3월 정부의 이데올로기 금서 기준이 완화되면서 1983년 이후 수정주의적 입장에서 쓰인 한국 현대사 연구물이 국내 서점가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대학교 내 학생 동아리 등을 통해서 이러한 서적들을 탐독하는 이른바 ‘의식화 과정’을 거쳐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된 젊은이들은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 자연스레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직접 한국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면서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은 구한말과 일제시기로부터 해방이후의 현대사 연구로 옮겨갔다. 이들의 연구는 주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정 시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미군정 시기가 연구 초점이 되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분단 문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의 광주민주항쟁 이후 한·미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양된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나. 북한학계 연구성과의 남한 유입

   1980년대 후반부터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북한학계의 연구성과가 남한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이다. 1987년 10월부터 ‘6·29 민주화 선언’의 후속 절차로 북한 원전 등의 도서에 대한 해금 조치가 시작되면서, 북한 관련 서적의 출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북한의 역사서 원전을 비롯한 역사 관련 서적이 주를 이루었다. 북한의 역사서가 이때 처음으로 국내 국사학계에 유입된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 때 북한학계의 연구성과가 본격적으로 남한에 유입되면서 남한 학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들의 업적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띤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전 시기 연구성과에 대한 비판과 계승, 당시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문제의식 등이 ‘민중사학론’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사학은 마르크스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이 접목되어 나타난 것으로 설명된다. 식민주의 지배의 긴 터널을 벗어나자마자 맞이한 분단이라는 특수한 경험은 민족문제에 대한 감수성을 날카롭게 만들었고, 그 결과 한국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민족주의 사학과 접목되어 민중사학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민중사학은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가 남한에 유입되면서 대두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일종인 것이다.


  4. 민중사학 연구단체의 결성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사 연구자들 가운데 진보좌파 성향의 소장학자들이 1980년대 초반에 제기된 민중적 민족주의 사학론에서 한 걸음 나아가 실천적·과학적 역사학의 수립을 표방하고 나섰다. 이들은 망원한국사연구실(1984), 역사문제연구소(1986), 한국근대사연구회(1987), 한국역사연구회(1988),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1988) 등의 연구단체를 결성해서 이 단체를 기반으로 조직적인 학술운동을 전개했다.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민중사학 연구단체가 결성됨으로써 1980년대 말, 역사학계는 강단 사학과 반체제적 재야 연구소로 양분되었다.

   여기서 ‘민중사학’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연구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와 구로역사연구소를 비교해보자. 두 단체는 망원한국사연구실을 모태로 하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창립되어 민중사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엇비슷하다. 하지만 두 단체의 목표에는 차이가 있다. 한국역사연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역사적 과제로 파악하고 있다면, 구로역사연구소는 사적 유물론에 바탕을 둔 민중사학론에 입각해서 ‘사회 변혁’과 ‘민족 통일’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고 있다. 둘 다 좌파 성향의 단체이지만, 구로역사연구소가 좀 더 급진적인 단체임을 알 수 있다.



Ⅲ. 민중사학자들의 국정제에 대한 비판(1988)과
     대중용 '국사 교과서'의 발간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중사학 연구단체를 결성한 민중사학자들이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사교과서 국정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고 나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정 교과서를 대치할 대중용 교과서를 발간하는 것이었다.


  1. 국사교과서 국정제에 대한 집중적 비판(1988)

    가. 국사교과서 국정제에 대한 집중적 비판(1)

   국사교과서의 국정제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된 것은 1988년부터였다. 1988년 진보좌파 성향의 역사교사들이 모여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을 실현하겠다는 취지에서 창립한 <역사교육을 위한 교사모임>은 국정 국사교과서를 분석, 비판하는 것을 자신들의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그들은 「올바른 역사 이해와 '국정' 국사교과서의 문제점」이라는 글에서,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분장시키고, '국적있는 교육'을 통하여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하여 택한 수단”이 국사교과서의 '국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국사교과서의 '국정'이란 정부가 교과서를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단 하나의 교재로 한국사 교육을 실시 강화하여 과거를 통제하고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 선전장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국정 국사교과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글에서 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 및 사무국장을 지낸 박준성은 국정 국사교과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정을 폐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교과서를 독점적으로 장악하여 과거를 통제하고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장치인 ‘국정’을 폐지하고 검인정으로, 나아가 자유발행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정 국사교과서처럼 지배층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역사 변화·발전의 주체인 민중이 주인이 되는 역사를 서술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이 주인이 되는 역사를 서술하여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상 수준, 표현 양식 등을 달리하는 다양한 대중용 교과서를 편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박준성은 국정 국사교과서를 지배층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역사로 몰아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른바 ‘민중사관’에 따라 자신들이 쓴 대중용 교과서로 기존의 국정 교과서를 대치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 국사교과서 국정제에 대한 집중적 비판(2)

   박준성과 거의 동시에 남지대도 비슷한 내용의 논문을 내놓았다(박준성은 1988년 6월호, 남지대는 1988년 여름호). 주목할 것은 두 사람이 글을 쓴 시기만 같은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구로역사연구소의 편집위원을 역임한 남지대는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한 정권 측의 의도는 한국사를 ‘유신’독재를 합리화하는 유신 이데올로기의 보급·재생산 도구로 삼으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민중사관에 입각한 새로운 국사교과서를 써야한다고 주장한다. 반민중적 정권 위주의 역사인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적·사회적 모순을 둘러싼 대립·투쟁의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그 주체인 민중의 입장에서 제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와 자주의 원칙을 민중을 축으로 실현해 가려는 의지를 교과서에 반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국정 교과서의 형태를 떠나, 연구회나 연구소를 중심으로 집단적 공동노력을 기울인다면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남지대는 박준성과 마찬가지로, 한편으로는 국정교과서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회나 연구소를 중심으로 민중사관에 입각한 새로운 교과서를 서술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중사학자들은 왜 그처럼 교과서를 서술하는데 주력했는가? 남지대는 고등학생들이 곧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기간부대가 될 자원”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등학생이 시대과제를 바로 인식하고 성숙한 민중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정’의 틀을 깨뜨려야 하며, 나아가 새로운 역사 교재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홍순권과 김태웅이라는, 둘 다 구로역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인물이 주축이 되어 집필한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처럼, 연구회나 연구소를 중심으로 해서 써지게 될 편향된 국사교과서는 이미 1988년부터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2002년에 출현하게 될 좌편향 교과서의 준비 작업은 일찌감치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2. 민중사학자들의 대중용 '교과서' 발간

   1991년에 현재의 명칭인 ‘전국역사교사모임’(이하 ‘전역모’)으로 그 이름을 바꾼 ‘역사교육을 위한 교사모임’은 자신들이 주장한대로 실제로 대중용 교과서를 펴냈다. 전체 역사교사의 1/3 가량인 2천여 명의 역사교사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거대 조직인 ‘전역모’가 연대 단체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과 함께 제작한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전2권),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들이 실제로는 교과서가 아니라 단순한 개설서임에도 불구하고 책제목에 ‘교과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까닭이다. 국정 교과서에 대해서는 그토록 반대하면서도 자신들이 펴낸 청소년용 개설서의 제목에는 굳이 ‘교과서’라는 용어를 집어넣는, 모순된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국정 교과서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정 교과서를 대치할 대중용 교과서를 펴낸 것은 ‘전역모’만이 아니다. 구로역사연구소도 1990년에 중고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대중용 교과서 『바로보는 우리 역사 1·2』를 발간했다.

   ‘전역모’와 구로역사연구소 등의 역사 관련 단체가 국사교과서 국정제를 비판해댄 것은 국정 교과서를 대치할 대중용 교과서를 펴내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Ⅳ. 준거안파동(1994)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는 민중 중심의 역사인식을 내세우며 기존의 역사교육이나 교과서를 비판하는 이른바 민중사학에 대한 비판도 본격화되었다. 역사학계에서는 민중사관이 마르크스 사관에 입각한 편향된 역사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대두했다. 민중사학이 역사를 학문이 아닌 계급투쟁에 입각한 사회변혁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1994년의 ‘준거안파동’이다.

  1. 6차 준거안 보고서의 문제점

   1994년 3월, 교육부가 6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의 개정을 위해 마련한 「국사교육 내용전개의 준거안」 연구보고서 시안이 언론을 통해서 공개되면서 이른바 준거안파동이 일어났다. 논란의 핵심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가 내놓은 현대사 시안이다.

   시안의 내용 가운데 반대자들의 집중적인 성토를 받은 것은 주로 현대사의 용어였다. 언론은 이 시안이 ‘8․15광복’을 ‘8․15해방’으로, ‘6·25 전쟁’을 ‘한국전쟁’으로, ‘5·16군사혁명’을 ‘5·16쿠데타’로, ‘12․12사태’를 ‘12․12쿠데타’로, ‘대구폭동’과 ‘제주도 4·3사건’을 ‘항쟁’으로 기술한다고 보도하면서 현대사 부분의 편향성을 비판했다. 이 용어들은 민중사관에 바탕을 둔 것이며, 재야세력의 역사재조명 작업의 하나로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 정통성을 부인하고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6차 준거안 시안이 좌익운동사와 북한의 주체사상을 다루도록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당시 언론들은 국사교과서에서 이들 문제까지 다루는 것은 너무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이처럼 ‘10월항쟁’, ‘제주 4.3항쟁’ 등 서중석이 제시한 용어가 민중사관, 수정주의사관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여론이 일어나고, 준거안 보고서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듯한 ‘좌파적’ 시각을 언론에서 문제 삼는 등, 비난여론이 빗발치자 교육부는 언론에 발표된 내용은 발표자의 사견(私見)에 불과한 것이라는 공식입장을 긴급히 발표해 파문의 조기진화에 나섰다.

   교육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종래의 정통적 견해를 대폭 수용하는 최종 준거안을 마련했다면서 이를 1994년 11월에 확정·발표했다. 

   주목할 것은 서중석에 의해 작성된 준거안의 현대사 부분은 당시 언론에 의해 보도되면서 문제가 된 부분 외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큰 문제 몇 가지만을 추려서 설명하겠다. 논의를 쉽게 하기 위해서 문제가 된 내용이 5차 국사교과서, 6차 준거안 보고서 중 서중석이 작성한 부분,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확정된 6차 준거안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표로 만들었다.

  •   2. 6차 준거안(최종안)의 내용

       1994년 3월에 시작된 준거안파동은 교육부가 종래의 정통적 견해를 대폭 수용하는 최종 준거안을 마련했다면서 이를 11월에 발표함으로써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최종 준거안은 교육부 발표처럼 종래의 정통적 견해를 대폭 수용하는 내용이 결코 아니었다.
       용어문제로 처음부터 논란이 된 ‘대구항쟁’, ‘12·12쿠데타’가 준거안에서 아예 제외되고, ‘4·3항쟁’이 원래 5차 교과서의 용어인 ‘제주도 4·3사건’으로 돌아갔다. ‘6·25 전쟁’ 대신 서중석은 ‘한국전쟁’으로 부를 것을 주문했으나 최종 준거안에서는 원래 5차 교과서의 용어인 ‘6·25 전쟁’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용어는 서중석의 시안 거의 그대로 최종안에서 확정되었다. 5차 교과서의 ‘4·19 의거’는 최종 준거안에서 ‘4월 혁명’으로 확정되었고, ‘5·16 군사 혁명’도 ‘혁명’이라는 단어가 빠지고 ‘5·16 군사정변’으로 확정되었다. 서중석이 제안한 용어인 ‘5·16쿠데타’는 ‘5·16 군사정변’과 매한가지다. 5차 교과서의 ‘여수·순천 반란사건’도 서중석의 제안대로 ‘반란’이라는 단어가 빠지고,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확정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의 용어가 서중석이 작성한 시안대로 상당 부분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                

       6차 최종 준거안은 서중석의 시안이 아니라 정통적 견해를 대폭 수용했다고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용어뿐 아니라 역사 해석 문제에서도 별로 그렇지 못하다. 즉, 최종 확정된 6차 준거안 내용은, 몇몇 항목을 제외하고는, 용어 및 역사 해석에서 서중석의 시안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그리하여 문자 그대로 준거안을 준거로 삼아 서술된 6차 국정 교과서는 상당 부분 진보좌파의 역사 해석을 수용하였다. 



    Ⅴ. 『한국 근·현대사』 과목의 신설과
    7차 준거안의 편향성


      1. 『한국 근·현대사』 과목의 신설

       제7차 교육과정(1997년 고시)의 역사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고대에서 현대까지를 포괄하는 통사체제인 기존의 『국사』 과목을 그대로 두고, 11, 12학년 심화선택과목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신설하여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한국 근·현대사』 신설 이유를, 7차에 걸쳐 교육과정이 개정되는 과정에서 근현대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커지고, 그에 따라 근현대사의 비중도 점차 커져갔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이고, 『한국 근·현대사』가 신설된 실제적 배경은 아직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신설된 『한국 근·현대사』는 교과서 검정과정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더니 2004년부터는 아예 『한국 근·현대사』교과서를 둘러싼 기나긴 분란으로 비화했다. 이른바 ‘교과서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는 ‘교과서파동’을 불러온 7차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의 서술 준거가 된 「국사교육 내용 전개의 준거안(2000)」을 분석하여, ‘교과서파동’의 원인을 찾아보려 한다.


      2. 7차 준거안의 편향성

       역사교육학계 일각에서는 1994년의 ‘준거안파동’을 겪으면서 <7차 준거안>은 <6차 준거안>을 답습했으며, 그 결과 한국 근현대사의 새로운 연구성과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7차 준거안>을 <6차 준거안 보고서> 및 <6차 준거안(최종안)>과 세밀히 비교 검토해 보면 이 주장은 그릇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7차 준거안>은 <6차 준거안>을 답습한 것이 결코 아니다. 몇몇 주요 사항에서 <7차 준거안>은 <6차 준거안>을 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6차 준거안 보고서>의 내용 가운데 문제가 되어 <6차 준거안>에서 배제되거나 수정된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 <6차 준거안>이 작성되기 이전에 쓰인 <5차 교과서>, 서중석이 현대사 부분을 작성한 <6차 준거안 보고서>, 준거안파동을 거친 후에 수정·확정된 <6차 준거안(최종안)>, 그리고 <7차 준거안>이 주요 사안에 대해 각각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비교해보기로 한다. 주요 사안으로는 ‘해방 후 과제’, ‘신탁통치 문제’, ‘북한 정권 문제’, ‘6·25 전쟁 서술’의 네 가지를 선정했다.


         가. 해방 후 과제

  •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을 당면 과제로 꼽고 있는 <6차 준거안>과 달리 <7차 준거안>은 통일민족국가 건설 외에도 ‘식민지 잔재 청산’, ‘토지제도 개혁’을 해방 후의 시대적 과제로 꼽고 있다. ‘친일파 청산’, ‘토지 개혁’은 서중석이 작성한 <6차 준거안 보고서>에서 제시한 내용으로 <6차 준거안(최종안)>에서는 배제되었다. 하지만 <7차 준거안>은 이를 다시 수용한 것이다.

        나. 신탁통치 문제

  •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신탁통치’결정을 둘러싼 “좌우대립의 심화 등을 서술한다”는 <7차 준거안>의 내용은 모스크바 3상 회의의 내용을 “민족주의 입장에서 서술한다”는 <6차 준거안>의 모호한 구절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는 오히려 “우익의 반탁 운동과 좌익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지지 운동을 서술한다”는 <6차 준거안 보고서>와 그 내용이 유사하다.

        다. 북한 정권 문제

  •    <7차 준거안> 집필자들은 남한에 대해서는 ‘단정노선(=단독정부노선)’, ‘남한 단독선거’ 등의 표현을 서슴지 않으면서,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단독’이라는 단어를 뺐다. <6차 준거안>의 ‘공산화’라는 단어 역시 뺐다. <7차 준거안>은 북한 정권 문제에서도 <6차 준거안>보다도 서중석이 작성했던 <6차 준거안 보고서>의 내용에 훨씬 가깝다.
       라. 6·25 전쟁 서술

  •    <5차 교과서>는 6·25 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서중석이 작성한 <6차 준거안 보고서>는 ‘남침’이라는 단어를 빼버리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배경과 전쟁의 추이를 설명한다”라고만 서술되어 있다. 준거안파동이 나면서 이 보고서가 문제가 되자 <6차 준거안(최종안)>은 “6·25 전쟁이 북한의 ‘무력 남침’으로 시작되었음을 설명”하라고 명시했다. 하지만 <7차 준거안> 집필자들은 ‘무력 남침’이라는 단어를 뺐다.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킨 과정을 설명”하라는 <7차 준거안>의 내용은, 서중석이 작성했다가 최종 준거안에서는 수용되지 않았던 <6차 준거안 보고서>의 내용에 훨씬 가깝다.
       요약하면, <7차 준거안>은 서중석이 작성한 <6차 준거안 보고서>의 현대사 부분 가운데 ‘준거안파동’을 거치면서 <6차 준거안(최종안)>에서 배제되거나 수정된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다시 수용하고 있다.


    Ⅵ. 민중사학자들의 국사교과서에 대한 끝없는 비판(2001)

       2001년에 서중석, 지수걸, 이신철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국사교과서와 관련한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들은 모두 역사문제연구소 소속의 학자들로서, 약간씩 그 주장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국사교과서의 국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결같았다.

      1. 서중석의 국사교과서 비판

       성균관대 교수로 당시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이던 서중석은 「현행 중·고교 국사교과서 현대사 부문 분석과 개선 방향」이라는 논문에서 당시의 국정 국사교과서(6차)의 현대사 서술에 문제가 많다고 비판하였다.

       서중석의 주요 비판 내용은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이 두 정권을 ‘미화’했다는 것이다. 서중석은 국사교과서에서 극우적인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미화가 이루어져왔으며, 이것이 주로 국가주의의 과잉노출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처럼 국가주의에 노출된 국정 국사교과서를 검정으로 전환하는 것을 정부가 뚜렷한 이유도 밝히지 않고 계속 미루고 있다고 비판한다.

       서중석은 이처럼 국사교과서 국정제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써지게 될 국사교과서의 현대사 서술 전반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 특히 그는 교과서의 ‘한국전쟁’에 관한 구체적인 기술 방식을 제시한다. 요약하면, 서중석이 제시하는 서술방향은 한편으로는 6·25 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등 전쟁의 국제전적 성격을 부각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도연맹원 대학살’ 등 우리 국군에 의한 전쟁 중의 민간인 희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결과적으로 6·25 전쟁이 북한의 남침에 의해 발생한 참화라는 사실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서중석이 제시한 ‘한국전쟁’에 관한 서술방향은,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만 제외하고는, 이듬해에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2. 지수걸의 국사교과서 비판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이자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인 지수걸은 위의 서중석이 쓴 논문이 수록된 학술지와 동일한 학술지, 동일한 호(號)에 「제7차 교육과정 ‘한국 근현대사’ 준거안의 문제점」이라는 논문을 싣고 있다.

       지수걸은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교육하려면 현행의 교육과정을 대폭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이 최대 과제라고 믿는 그는 통일지향적인 역사교육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근현대사 교육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수걸은 이를 위해서는 국정 교과서 제도를 대폭 개선하여 역사교육의 국가독점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역사교육의 국가독점 해체란, 즉 국정제 폐지를 뜻하는 것이다.
     
       지수걸도 서중석과 마찬가지로, 통일지향적인 역사교육을 내세우면서 국사교과서 국정제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이신철의 국사교과서 비판

       서중석, 지수걸과 같은 해인 2001년, 이신철도 「한국의 교과서운동과 향후 전망」이라는 논문에서 국사교과서의 검정화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신철은 당시 성균관대 교수 겸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이던 서중석의 성균관대 사학과 제자로, 그 역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이었다. 이신철은 역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인 장신과 함께 쓴 이 논문에서 국사교과서에 내포된 본질적 문제의 해결은 국정제를 검정제로 바꾸고 「국사교육 내용전개의 준거안」과 같은 사전검열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그 출발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신철은 검정제도는 현재의 대안일 뿐, 장기적으로는 자유발행제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신철은 왜 국사교과서의 국정제를 검정제로, 나아가 자유발행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는 국사교과서 문제가 학자들만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시민단체, 사회단체들이 모두 교과서운동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검정제로 다양한 교과서가 나올 경우, 각 단체는 교과서에서 자신들의 이야기가 올바르게 서술되었는가를 검토하고, “자신의 계급 계층에 유리한 교과서를 선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사회단체의 일상적 투쟁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이신철이 국사교과서의 검정제를 주장하는 데는 국사교과서가 시민사회단체의 계급투쟁의 도구라는 그의 인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에게 국사교과서는 더 이상 학습을 위한 텍스트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도구인 모양새다.

       서중석, 지수걸, 이신철, 이 세 사람의 논문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우선 세 논문 모두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되었다. 서중석과 지수걸의 논문은 2001년 9월에 발표되었고, 이신철의 논문은 2001년 12월에 발표되었다. 또한 세 논문 모두 『국사』 교과서의 국정제 폐지와 검정제로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선 2001년에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는 이미 검정제가 도입되어 2002년 시행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 교과처럼 『국사』 교과도 국정제를 폐지하고 검정제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이처럼 나란히 『국사』 교과서의 국정제 폐지를 주장한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역사문제연구소 소속의 학자라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서중석은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당시 소장)이며, 지수걸은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고, 당시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이신철은 부소장을 거쳐 현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Ⅶ.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의 편향성

       위에서 보았듯이 2000년에 작성된 7차 교육과정의 『한국 근·현대사』 준거안의 현대사 부분은 상당히 좌편향 된 내용으로 채워졌다. 게다가 『한국 근·현대사』 과목은 『고등학교 국사』와 달리 교과서 검정제가 도입되었다. 국정의 제약이 사라지면서 그동안 누적된 국사학계 일각의 좌편향 성향이 한꺼번에 분출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2002년에는 지극히 좌편향 된 내용의 『한국 근·현대사』교과서까지 출현하는 사태를 맞이했다. 좌파의 시각이 국사교육계를 장악하여 역사를 제멋대로 정치도구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검정을 통과한 6종의 『한국 근·현대사』교과서 가운데 몇몇 교과서는 매우 편향된 이념 성향을 보였는데, 이 가운데서도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교과서는 극도의 편향성을 드러냈다. 금성교과서는 통일지상주의에 사로잡혀, 대한민국을 건설한 세력을 조직적으로 폄하한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1987년 이전의 모든 정권을 ‘독재’라고 비판하면서도 북한의 독재체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다. 이처럼 친북반미 서술로 일관하면서 국가의 정통성마저 부정하는 금성교과서의 내용이 발단이 되어 2004년 이후 이른바 ‘교과서파동’이 본격화되었다.

       ‘교과서파동’을 불러온 주역인 금성교과서는 왜 이처럼 극도로 편향된 이념 성향을 보이는 것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7차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의 편향성은 좌편향 역사학의 대두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6종의 『한국 근·현대사』교과서 가운데 금성교과서처럼 심한 편향성을 보이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집필진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금성교과서의 집필진은 아래 표와 같다.

  •    금성교과서의 집필자 여섯 사람 가운데 교수는 김한종, 홍순권, 김태웅의 셋이다. 이 가운데 홍순권과 김태웅은 둘 다 ‘민중사학’을 표방하는 단체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평가되는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했다. 금성교과서가 그토록 심한 좌편향 성향을 보이게 된 원인은 이처럼 집필진 가운데 구로역사연구소의 소장을 지낸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김한종과 김태웅은 서울대 역사교육과 선후배 사이로, 김한종은 역사문제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금성교과서의 집필자 가운데 교사는 이인석, 남궁원, 남정란의 셋인데, 이 가운데 이인석과 남궁원은 위의 김태웅, 김한종과 더불어 서울대 역사교육과 동문이고, 남정란은 김한종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교원대 졸업생이다. 교사 세 명 중 이인석은 전교조의 연계단체인 <전국역사교사모임> 소속이다.

    Ⅷ. 『한국사』교과서의 여전한 이념 편향성

       2011년부터 고등학교에서는 새로운 『한국사』교과서가 국사 교재로 쓰이고 있다. 교과서파동을 불러온 금성교과서를 비롯한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의 편향성을 바로잡는 차원에서 2009년에 새 교육과정이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2010년에 검정을 통과한 6종의 『한국사』교과서가 2011년부터 고등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이 새로운 『한국사』교과서는 얼핏 보면 7차 교육과정의 『한국 근·현대사』교과서보다는 일부 개선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1. 『한국사』교과서의 6·25 전쟁에 대한 편향된 해석

       하지만 새 『한국사』교과서에서 편향성이 더 심해진 부분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6·25 전쟁 중의 민간인 희생에 대한 서술이다.

       우리 국민이 겪은 6·25의 전쟁 피해 가운데 민간인의 희생으로 대표적인 것은 ‘인민재판’을 통한 처형과 ‘납북’이다. 하지만 최근의 국사교과서는 6·25 전쟁 중 민간인의 희생에 관해 서술하면서, ‘인민재판’, ‘납북’과 같이 대한민국의 전쟁 피해를 나타내는 용어의 사용을 꺼리고 있다. 대신에 남한과 북한 중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를 알 수 없는 용어인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남한이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 피해자라는 사실을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다. 금성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의 경우, 6·25 전쟁 중 아군에 의해 이루어진 민간인 희생을 ‘학살’이라는 용어를 써서 부각시키면서도 적군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훨씬 적게 기술하고 있다. 교과서의 이러한 편향적 서술은 현행 『한국사』교과서에서는 더욱 심해졌다.


      2. 민중사학자들의 6·25 전쟁 해석, 연구목적 및 서술내용

       현행 『한국사』교과서 가운데 6·25 전쟁이 남침에 의한 것임을 기술하지 않는 교과서는 삼화와 천재인데, 이들 교과서는 바로 6·25 전쟁 중의 민간인 희생을 ‘학살’이라며 강조하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국사』교과서 중 일부가 6·25 전쟁과 관련해서 7차 금성 『한국 근·현대사』교과서보다 더욱 편향된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이른바 ‘민중사학자’들이 종래 대한민국의 건국을 둘러싼 해석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 쪽으로 바꾸는데 주력했다면, 최근에는 6·25 전쟁에 관한 역사해석의 방향을 바꾸고, 그것을 국사교과서에 기술하는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인 6·25 전쟁을 어떻게 파악하느냐가 오늘날의 한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리고 앞으로의 한국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 민중사학자들의 6·25 전쟁 해석

          (1) 6·25 전쟁의 용어와 해석 - “남북전쟁”은 “미국과 북(北)이 벌인 싸움”

       민중사학자들은 6·25 전쟁을 어떻게 해석하려 하는가? 먼저 6·25 전쟁을 어떻게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자. 국사교과서의 공식 용어는 5차 이후 줄곧 ‘6·25 전쟁’이지만 1980년대 이후 민중사학자들은 6·25 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불렀다. 이는 ‘6·25’라는 용어가 전쟁의 기원을 1950년 6월 25일의 무력충돌로 단순화시키고, 전쟁에 대한 논의를 전쟁책임론으로 환원시킨다는 이유에서 당시 소장학자들이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6·25’라는 용어에는 6월 25일에 북한이 남침을 해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는 ‘6·25 전쟁’이라는 용어보다 친북적이다. 그럼에도 이 친북적인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도 마다하고 ‘남북전쟁’으로 부르는 학자들도 있다. ‘남북전쟁’이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쓴 것은 ‘내재적 발전론’의 주창자인 김용섭으로 알려져 있다.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인 김용섭에 이어 그의 제자인 김성보도 역시 ‘남북전쟁’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김성보와 함께 오랫동안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해 온 이신철도 6·25 전쟁을 ‘6·25 남북전쟁’으로 부른다. 이신철은 2000년에 이미 남북의 두 국가와 두 정부를 인정해야 한다면서 북한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6·25 전쟁을 ‘남북전쟁’으로 지칭한 바 있다.

       놀라운 것은 이신철의 6·25 전쟁 해석이다. 그는 “6·25 남북전쟁이 미국이라는 이민족과 북이 벌인 싸움인 동시에 우리 민족 내부에서 벌어진 적대적 이데올로기간의 투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6·25 전쟁 해석이 얼마나 급진적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이신철은 미군의 통제 하에 있던 지역에서 벌어진 대량학살과 무자비한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 미국이 전쟁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신철의 6·25 전쟁 해석은 그가 집필에 참여한 천재 『한국사』교과서가  ‘신천학살’에 대해 서술하면서, 피카소의 선동적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을 싣고 있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2) 학살에 대한 강조 - “집단학살(genocide)”

       1999년 9월말,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인 최상훈이 이른바 ‘노근리’ 사건을 보도한 이후 민중사학자들의 6·25 전쟁에 대한 연구는 6·25 전쟁 중의 이른바 ‘민간인학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민간인학살’에 대한 연구를 앞장서서 진행하면서 동시에 이 연구의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사람은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서중석이다. 6·25 전쟁 시기뿐 아니라 정부수립 직후부터 민간인 희생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그는 정부수립 직후부터 한국전쟁 시기에 걸쳐 군·경 및 미군에 의해 대규모 ‘민간인 집단학살’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제주 4·3사건, 보도연맹원 사건과 더불어 여수·순천사건까지도 ‘민간인 집단학살’로 규정하고 있다.

       이 ‘민간인 집단학살’과 관련한 연구의 방향으로 서중석이 제시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 ‘민간인 집단학살’을 나치의 유태인 집단학살과 비교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민간인 집단학살’을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부의 일반적인 불법·폭력성과 연관짓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민중사학자들의 6·25 전쟁 연구목적

       서중석 등은 6·25 전쟁을 전후한 민간인의 희생을 유태인 집단학살에 견주어 그 잔혹성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불법·범법행위를 넘어선 국가폭력이요 정치적 집단학살임을 강조한다. 즉 민간인 집단학살을 전쟁범죄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6·25 전쟁 전체를 재해석하고, 나아가 우리나라 근현대사 전체를 재해석하려고 한다.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당시의 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민간인 집단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극우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었더라면 제주 4.3사건이나 여순사건, 6·25 전쟁 시기에 인명희생이 훨씬 줄었을 것이라는 게 서중석의 주장이다.

       서중석의 또 하나의 목표는 민간인 집단학살 문제와 관련해 미국에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미국이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 집단학살을 잘 알고도 묵인하고 조장했으며, 노근리에서처럼 한국의 민간인을 집단학살했다는 것이다. 즉 6·25 전쟁 전후의 학살에는 미국 측의 묵인과 적극적인 시행 등이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을 폄하하는 동시에 분단의 최종적인 책임을 미국에 지우려는 민중사학자들의 시도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둘러싼 해석에서뿐 아니라 6·25 전쟁을 둘러싼 해석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민중사학자들에 의한 국사교과서 편향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민중사학자들은 6·25 전쟁에 대한 좌파 수정주의적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좌편향 된 역사관과 역사해석이 오늘날과 같은 좌편향 된 국사교육을 초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 민중사학자들은 국사교과서 제작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문서인 「국사교육 내용전개의 준거안」을 작성했거나 또는 직접 교과서를 집필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교과서 관련 활동과 관련 단체 활동을 간략히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   3. 『한국사』교과서의 집필진

       2009년에는 편향된 교과서를 바로잡겠다는 목적으로 새 교육과정이 만들어졌다. 이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기존의 국사 과목은 『한국사』로 과목명이 변경되었다. 그에 따라 2010년 검정을 거쳐 『한국사』교과서 6종이 최종 선정되어 2011년부터 고등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 『한국사』교과서는 『한국 근·현대사』교과서보다 그 편향성이 더욱 심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7차 교육과정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민중사학자들과 전교조 및 전역모 교사들이 문제의 『한국사』교과서에 집필진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현행 『한국사』교과서 가운데 삼화교과서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삼화교과서는 천재교과서나 미래엔교과서 못지않게 편향된 서술을 하고 있는 교과서이다. 삼화는 『한국사』 6종 가운데 유일하게 5·10총선거를 여전히 ‘남한만의 총선거’로 평가하고 있는 교과서이다. 또한 삼화는 6·25 전쟁이 남침에 의한 것임을 기술하지 않는 『한국사』교과서 2종 가운데 하나이다(삼화, 천재). 삼화는 6·25 전쟁 중의 민간인 희생을 ‘학살’이라며 강조하는 『한국사』교과서 3종(천재, 삼화, 미래엔) 가운데 하나로, 전쟁 중의 민간인 희생을 아예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는 표현을 써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삼화 『한국사』교과서의 집필진 6명은 전원 고등학교 교사인데, 이 가운데 5명이 전교조와 전국역사교사모임(전역모) 회원이다. 특히 이인석은 전교조의 연계 단체인 전국역사교사모임 소속으로, 교과서파동을 불러온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과 같은 편향된 국사교과서의 출현이 민중사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한 민중사학자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전교조와 전역모 교사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이러한 현상은 특히 현행 『한국사』교과서에서 두드러진다. 6차까지의 국정 국사교과서 집필자 가운데는 교사가 아예 없다. 7차 『한국 근·현대사』교과서만 하더라도 6종의 집필자 총 32명 가운데 전교조나 전역모 소속 교사는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 집필자인 이인석 한 명이었다. 그런데 『한국사』교과서 집필자 가운데는 전교조나 전역모 소속 교사가 자그마치 10명이나 된다. 『한국사』교과서 집필자 가운데 교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한국 근·현대사』교과서보다 두 배 가까이 커지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사』교과서 집필자 전체에서 전교조나 전역모 소속 교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9배로 커졌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이는 시간이 가면서 훨씬 더 많은 전교조나 전역모 소속 교사가 적극적으로 국사교과서의 집필에 가담하고 있음을 뜻한다(아래의 분석 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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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Ⅸ. 맺음말

       국사교과서가 국정으로 바뀐 3차 이후 민중사학자들은 국사교과서는 정부가 교과서를 독점적으로 장악하여 과거를 통제하고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 장치라고 줄기차게 비판해왔다. 국정 국사교과서가 지배층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역사가 정치에 복무했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역대 정권들이 모두 교육적 관점에서 역사를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역사교육을 정치의 도구로만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중사학자들도 역사를 정치화하기는 군사정권과 다를 바 없다. 7차 『한국 근·현대사』교과서 가운데 민중사학자들이 집필한 교과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체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친북반미 성향을 보이는 ‘정치화된 교과서’였다. 이 교과서가 교육현장에서 10년 가까이 사용되다가 현행 『한국사』교과서로 바뀌었으나 역사를 정치화하기는 『한국사』교과서도 마찬가지다. 민중사학자들에 의해 집필된 일부 『한국사』교과서가 6·25 전쟁과 관련해서 매우 편향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을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에 비견되는 “집단학살(genocide)”로 인식하고 있는 일부 민중사학자들이 6·25 전쟁을 전후한 이른바 민간인 집단학살의 잔혹성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이 국가폭력이요 정치적 집단학살이라고 강변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당시의 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민간인 집단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학살과 관련해 미국에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6·25 전쟁이 북한의 남침에 의해 발발했다는 것을 기술하지 않는 『한국사』교과서일수록 6·25 전쟁의 민간인 희생을 ‘학살’이라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 교과서는 한편으로는 6·25 전쟁이 북한의 남침에 의해 발발했다는 사실을 희석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인 희생이라는 전쟁 피해를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전체적으로 6·25 전쟁이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참화라는 사실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역사의 정치화’는 그것이 군사정권에 의한 것이든 좌파 인사들에 의한 것이든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역사를 왜곡하기는 우편향이든 좌편향이든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 시점에서 좌파에 의한 ‘역사의 정치화’가 훨씬 더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는 까닭은 민중사학자들이 어린 학생들이 배우는 국사교과서에서조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