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학문 통달-인격-지도력의 카리스마..美 지도층 끝내 굴복 "대한민국 건국 승인"
  • <제12회 이승만포럼>
    2012. 2. 9(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유영익 (柳永益, 한동대 T.H.Elema 석좌교수, 전 연세대 석좌교수) 

    1. 머리말

  • ▲ 우남 이승만ⓒ
    ▲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Syngman Rhee, 1875~1965)은 우리에게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로 비춰지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한반도의 통일국가 건설을 저해하고 민주주의의 발달을 억압한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는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元勳)이자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國父)로 숭앙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이 대통령과 그의 업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수를 웃도는 형국이다.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유아독존적이고 독선적이며 이기적인 독재자라고 비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승만을 “권력욕에 눈먼 미국의 앞잡이”(공산권 정부 및 언론), “독재적이고 야심에 차고 반동적이며 무책임하고 잔인한 인물”(영·미의 진보적 언론), “희대의 협잡꾼, 정치적 악한”(장준하,張俊河), “교활하기 짝이 없는 철저한 에고이스트”(신상초,申相楚), “독립운동도 제가 대통령을 해먹으려고 했고 또 건국도 제가 대통령 해먹으려고 했던 인물”(송건호,宋建鎬), 그리고 “장제스(蔣介石)의 아류(亞流)”(오언 래티모어,Owen Lattimore) 등으로 묘사했다.
    이승만에 대해 최초의 비판적 평가를 시도한 인물은 리처드 알렌(Richard C. Allen)이라는 가명(假名)으로『한국의 이승만: 허가받지 않은 그의 초상(肖像)』(Korea's Syngman Rhee: An Unauthorized Portrait)을 저술한 젊은 전기작가 존 테일러(Jhon M. Taylor)였다. 그는 4·19학생의거 직후에 발간된 그의 전기에서 이 대통령이 ‘부산정치파동’이라는 폭거와 ‘사사오입’이라는 기상천외의 계산법을 동원하여 두 번 개헌을 감행,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진 후 진보당(進步黨)을 탄압하고 ‘3·15 부정선거’를 실시한 끝에 기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4·19에 의해 곧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던 경위를 상술하고, 아울러서 그의 대일(對日)관계 정상화 실패와 거창양민학살사건 및 국민방위군사건 등 실정(失政)을 상술함으로써 이승만을 “평생 자기 조국에 봉사한 대가로 국민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권력에 의해 타락한 애국자”라고 낙인찍었다.
    4·19 이후 이승만 비판에 앞장섰던 언론인·사학자 송건호는 알렌의 전기를 원용하면서 이 대통령은 “외세의 국가이익 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 데 앞장섰고, 일제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 역적들을 싸고돌아 민족정기를 흐려놓았으며, 12년의 통치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 아닌 열강 예속으로 전락”시키는 등 ‘민족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이와 같은 알렌 및 송건호의 이승만 비판론을 계승한 일군의 ‘진보적’ 연구자들은 1981년에 발간된『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수정주의적 현대사 해석에 영향받아 이승만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한층 더 높였다. 그 결과 1995년에 이르러 언론인·사학자 김삼웅(金三雄)은 저간의 이승만 비판론을 총합하여 이승만의 ‘죄악상’으로서 ① 분단 책임, ② 친일파 중용, ③ 6·25전쟁 유발 내지 예방 실패, ④ 독립운동가 탄압, ⑤ 헌정 유린, ⑥ 정치군인 육성, ⑦ 부정부패, ⑧ 매판경제, ⑨ 양민 학살, ⑩ 극우반동, ⑪ 언론탄압, ⑫ 정치 보복 등 12개 조목을 제시했다.

    이상과 같은 주장과는 정반대로 이승만의 위인(爲人)과 업적에 대해 호의적 평가를 내리면서 그를 극구 옹호하는 인사들이 있다. 이들은 이승만을 가리켜 “희세(稀世)의 위재(偉才)”(김인서, 金麟瑞), “외교의 신(神)”(조정환, 曹正煥), “대한민국의 국부, 아시아의 지도자, 20세기의 영웅”(허정許政),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김활란, 金活蘭), "한국의 조지워싱턴;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가, 애국자 중 한 사람;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제임스 밴플리트, James A. Van Fleet)이라고 칭송했다.
    이승만 옹호론의 대변자는 미국 시러큐스(Syracuse)대학교 및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주립대학교의 언론학 교수로서 1942년부터 1959년까지 이승만의 자문·홍보 역을 맡았고 1954년에『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이라는 최초의 본격적 이승만 전기를 펴낸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박사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승만의 애국심, 학문적 실력, 역사적 혜안, 정치적 투지, 종교적 초월성 등을 높이 사면서 이승만을 “한국 역사상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획득한 (중략) 다른 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그의 이름은 위인을 많이 배출한 한국 역사에서 단연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평했다. 그는 1995년에 발표한「세계적 정치가 이승만」(Syngman Rhee-A World Statesman)이라는 논문에서 이 대통령이,

    ① 여수·순천반란사건과 같은 위기로부터 신생 대한민국을 구출하고 국가 존립에 필수 요건인 안보를 확보했다.
    ② 6·25전쟁 중 남한 국민의 충성을 확보하고 미국으로부터 한국군의 훈련과 장비 현대화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냄으로써 막강한 군대를 육성했다.
    ③ 공산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조봉암(曺奉岩)을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한 다음 지주 출신 의원들로써 채워진 국회에 압력을 가하여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켜 전 국민의 75%에 해당하는 남한 농민들을 위해 농지개혁을 완수했다.
    ④ 건국 초 열악한 재정 여건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우선순위를 배정하여 각급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교사들을 재훈련하여, 한글로 쓰여진 교재들을 개발함으로써 국민교육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고 동시에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경제개발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했다. 이로써 그는 후세의 한국인들로부터 ‘교육대통령(The Education President)’으로 기억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⑤ 신생 대한민국은 군사, 경제면에서 미국과 유엔의 원조에 매달려야 하는 일개 속국(client sate)에 불과했지만 그는 [자신의 출중한 외교역량을 발휘해] 미국과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진정한 주권 국가로 대접받게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라고 논파했다. 요컨대 올리버는 이 대통령이 대한민국 초창기에 미증유의 혼란과 6·25전쟁이라는 재앙을 극복하면서 국가 안보, 외교, 군사, 경제,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룩하여 신생 공화국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결과적으로 1960년대 이후 남한의 눈부신 번영에 근원적으로 기여했다고 본 것이다.

    올리버류의 이승만 옹호론은 4·19 이후 한국 지성계에 만연한 반(反)이승만 정서 때문에 최근에 이르기까지 학계나 언론계에서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다만 예외적으로 기독교 목사 출신 언론인 김인서가 1963년『망명노인 이승만박사를 변호함』(독학협회출판사)이라는 저서를 펴냈고, 1975년에는 한국일보사에서 이승만을 호의적으로 소개하는「인간 이승만」이라는 연재물을 게재했으며, 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정치학자 몇 명이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이 대통령 집권기에 고위직을 맡았던 일부 군장성과 고위 관료들이 자신들의 회고록을 통해 이 대통령을 직간접적으로 옹호해왔다.

    4·19 이후 학계를 지배한 반(反)이승만적 분위기는 1989년 동서 냉전의 종식과 함게 바뀌기 시작했다. 냉전의 종식은 무엇보다도 이승만이 주창했던 자유민주주의와 반공(反共)주의의 종국적 승리를 의미했기 때문에 일부 현대사 연구자들 간에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유발시켰다. 특히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공산권의 현대사 관련 사료(史料)가 속속 공개됨으로써 이승만 재평가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밖에 1961년 이후 1993년까지 남한을 다스린 군인 출신 대통령들의 강도 높은 ‘군사독재’는 이승만의 ‘문민독재’를 상대화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변화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탈(脫)수정주의(post-revisionism)를 표방하는 사회과학자, 역사학자 및 언론인들 간에 이승만을 새롭게, 긍정적으로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을 태동시킨 것이다.

    발표자는 이 대통령이 12년간의 장기 집권을 통해 허다한 과오와 실정(失政)을 저질렀음을 인정한다.
    이 대통령은 건국 초에 친일파 문제를 시의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커다란 후환을 남겼다. 또한 이 대통령은 6·25전쟁 발발 직후 영부인과 함께 수도를 남몰래 탈출하면서 정부의 그릇된 전황(戰況)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을 안심시켜 그들의 피난 기회를 박탈했고, 국군이 예고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함으로써 다수의 무고한 인명 피해를 발생시킨 것에 대해 국가 최고 통치자로서 책임이 있다. 그는 전쟁 중에 발생한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 등 일련의 대규모 참사와 군의 비리, 부패에 대해서도 책임이 막중하다고 할 것이다. 1954년에 ‘사사오입’이라는 억지 논리로써 개헌을 강행하여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1960년에 자유당(自由黨)과 경찰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자행 혹은 묵과한 사실 역시 용서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의 집권기간에 자유당 정권과 신흥재벌 간에 정경유착 현상이 심화됨으로써 부정부패가 나타난 사실 또한 묵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집권 말기에 그의 자유당 정권이 반공(反共)의 명분하에 조봉암과 진보당에게 가한 가혹한 탄압이 역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있다. 이밖에도 이 대통령의 통치행적 가운데 필자가 미처 모르는 하자가 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발표자는 이승만이 남북분단이나 6·25전쟁 발발 등 중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한민족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외세의 국가이권 추구에 편승했다.”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발표자는 4·18 이후 이승만을 다룬 국내외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그의 치적(治績)을 논함에 있어서 그가 범한 과오를 파헤치는 데 열중한 나머지 그의 공적을 살피고 인정하는 작업을 등한시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지금까지의 이승만 연구는 비판일변도(批判一邊倒)로 흘렀으며 따라서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발표에서 발표자는 그동안 이승만 연구자들이 등한시했던 이 대통령의 업적들을 간추려 살핌으로써 이승만 담론에 균형을 잡고 나아가 그의 통치에 대한 공정한 역사적 평가에 기여하고자 한다.

    2.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이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남한을 통치하면서 해방 전후에 그가 미리 준비했던 건국 구상에 따라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획기적 업적을 달성했다. 그 중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골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 정치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 통치체제를 확립했다. 그는 1948년 제헌국회(制憲國會)의 의장으로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기초(起草)한 내각책임제 헌법 초안을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도록 압력을 가하여 자기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 후 그는 제1차 개헌(1952)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제2차 개헌(1954)을 통해 국무총리제를 폐지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의 대통령제를 도입한 나라로 만들었다. 이승만의 ‘고집’으로 인하여 남한에 고스란히 도입된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는 4·19 이후 10개월간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유지되면서 한국이 1945년 이후 독립한 전 세계 140여 개 신생국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성취할 수 있는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대통령은 제1차 개헌 당시 발족시킨 자유당이라는 관제 여당을 앞세워 8년간 ‘거의 전제적(專制的)인’ 권위주의적 통치 내지 ‘문민독재’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집권기간에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고, 국회의원 선거를 중단 없이 실시하면서 의회제도를 존속시켰다. 또한, 양당(兩黨)제도의 발달을 조장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는 등 적어도 형식상 민주주의의 외피(外皮)를 유지하고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적 자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나. 외교 분야에서 그는 대한민국 수립 후 유엔과 미국을 위시한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했다. 그리고 그는 1952년에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일명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을 일방적으로 선포함으로써 독도(獨島)를 포함한 한반도 해역의 어족 및 해저자원을 보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특히 6·25전쟁 막바지에 미국이 북진통일을 원하는 대다수 한국민의 소원을 무시하고 공산군과 휴전을 모색하자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 행정부에 협박과 회유를 동반한 ‘벼랑 끝 외교전술’을 동원하여 미국으로 하여금 1953년 10월 한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The R.O.K.-U.S. Mutual Defence Treaty)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 이 조약이 성립됨으로써 19세기 후반 이래 14년에 한 번 꼴로 전화(戰禍)에 휩쓸렸던 한반도에는 장기간의 ‘긴장된’ 평화가 깃들었으며, 남한은 미국의 군사 보호 우산 아래 정치, 안보,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공전(空前)의 비약적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킴으로써 한국의 안보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한국이 태평양권에 속한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급속히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조성했다.

    다. 군사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대미 외교를 통해 미군의 참전을 유도하고, ‘대전협정’(1950. 7. 14)을 통해 국군과 유엔군 간의 긴밀한 공조체제를 형성, 유지하며 동시에 남한 국민 대다수의 충성을 확보함으로써 북한 침략군과 중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쟁기간 끈질기게 미국에 대하여 국군의 증편과 장비 현대화를 요구한 결과 전쟁 발발 이전 10만 명에 불과했던 한국군의 규모를 1954년에 65만 명 이상으로 대폭 증원하면서 그 질 역시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대한민국을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질 높은 상비군을 보유한, 동아시아에서 무시 못 할 군사강국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라. 경제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집권기간에 일반 서민의 생활수준을 현격히 향상시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의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미국으로부터 20억 달러 이상의 무상 원조를 받아내어 전후(戰後) 경제복구에 성공했으며, 수입대체산업(輸入代替産業)을 육성함으로써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특히 그는 6·25전쟁 발발 이전에 농지개혁을 개시하여 총 소작지 면적의 40%에 달하는 58.5만 정보의 땅을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소작농들에게 분배하는 혁명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개혁을 통해 해방 당시 전체 경작 면적의 35%에 불과했던 자작지의 비율이 92.4%에 달하게 되었다. 요컨대, 이 대통령은 구래(舊來)의 지주 토지 소유제를 청산하고 자작농적 토지 소유제를 확립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농지개혁은 대다수의 농민을 지주제의 속박과 착취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과거에 농노(農奴)에 불과했던 대다수 농민을 주권의식을 가진 자립적 국민으로 탈바꿈시키고, 남한의 농업 생산성을 높이며,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태동시키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농지개혁은 지주제를 붕괴시켜 전통사회의 지배계급인 양반의 몰락을 초래하고 6·25전쟁 중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부화뇌동하는 현상을 예방하는 등 여러 가지 경제외적(經濟外的) 부수효과를 수반했다.

    마. 교육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 실시하고 성인 위주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한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령아동의 취학률을 95.3%로 높이고 해방 당시 80%에 달했던 문맹률을 22%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그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해외 유학을 적극 장려함으로써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고급인재를 양산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대학과 전문학교는 통틀어 19교, 학생 수는 약 8,000명에 불과했는데 1960년에는 초급대학·대학·대학교가 68교, 학생 수는 약 10만 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동시에 해외 유학생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었는데,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정규유학생’으로 출국한 학생은 4,884명(그 중 미국 유학생은 89.9%), ‘기술훈련 유학생’으로 출국한 학생은 2,309명이었다. 이들 이외에 1950년대에는 9,000여 명의 군장교들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았고 또 원자력 기술을 배우기 위해 약 100명의 연구생이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요컨대, 이 대통령 집권기에 한국에는 ‘교육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적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는 민주주의가 발달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경이적’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적자원이 조성되었다.

    바. 사회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통하여 지주제를 붕괴시킴으로써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양반제도에 종지부를 찍고,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 및 취업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한국 여성은 초등학교에서 남자와 똑같은 의무교육을 받고 중·고등학교 및 대학에 대거 진학하기 시작했다. 1958년 각급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의 수를 해방 직후와 비교해보면, 초등학교의 경우 약 3.1배, 중·고등학교의 경우 약 6.1배, 사범학교의 경우 약 2.5배, 그리고 대학(교)의 경우 약 8.5배로 늘었다. 또 교육기회의 확대와 함께 여성의 취업기회가 확대되어 그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졌다. 저학력 여성들을 타자수, 교환수, 섬유노동자, 직조공, 피복공 등 직종에 취업하는가 하면 고학력 여성들은 교원, 의사, 약제사, 경찰관, 공무원, 여군 장교, 판·검사 등 과거 남성들이 독점했던 직업 분야에 침투했다. 나아가 국회의원 및 장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이래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차별대우를 받던 한국 여성들은 이 대통령 집권기간에 “가정의 깊은 장막 속에서 벗어나 눈부신 각광을 받으면서 사회의 밝은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사. 문화·종교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한글전용 정책을 채택해 여행(勵行)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글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그는 전통문화의 계승 및 보존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사실상 무시하면서 기독교(주로 개신교)의 보급을 배타적으로 장려한 결과 원래 유교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그는 ① 국가의 주요 의례를 기독교식으로 행하고, ② 국기(國旗)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대체하며, ③ 군대에 군목제(軍牧制), 그리고 형무소에 형목제(刑牧制)를 도입하며, ④ 정부의 주요 부서에 기독교인을 대거 등용하고, ⑤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언론매체의 발달을 지원하며, ⑥ 6·25전쟁 중과 그 후에 외국(특히 미국)의 기독교 구호단체들이 보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친(親)정부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통해 배분하도록 조처함으로써 기독교 교세의 신장에 기여했다. 그의 집권기에 정부의 19개부 장·차관 242명 가운데 38%, 그리고 국회의원 200명 가운데 약 25%가 개신교 교인이었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정책에 힘입어 남한의 기독교 교세는 아래의 <표>에 보는 바와 같이 1960년을 전기로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표> 1910~1980년간 한국 기독교 교인 증가 추세

                 연도                  교인 총수          
                 1910                  200,000
                 1930                  372,000
                 1950                  600,000
                 1960                1,140,000
                 1970                2,200,000
                 1980                7,180,000

     

    3. 맺음말

    이승만 박사는 해방공간의 대혼란을 수습하고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건국 후 채 2년도 되지 않아 6·25전쟁에 직면한 그는 3년간 지속된 전란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아 전쟁 기간에도 계속 신생공화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한 결과 정치, 외교, 군사, 교육, 사회,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그가 이룩한 여러 가지 업적 가운데 ① 미국식 대통령중심제의 확립, ②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③ 65만 명 수준의 국군 육성, ④ 농지개혁 실시, ⑤ 국민교육 수준의 획기적 향상, ⑥ 양반제도의 근절과 남녀평등의 실현, ⑦ 기독교의 확산 등은 그가 아니면 이룩할 수 없었던 그 나름의 고유한 업적들이다. 이 대통령은 집권기간에 이러한 제도적 개혁을 달성함으로써 대한민국이 근대적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요건을 구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의 집권기에 형성된 제도적 기반에 입각하여 1961년 이후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약적’인 경제 및 문화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 대통령은 ‘건국’ 대통령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대한민국의 국기(國基)를 튼튼히 다져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들은 조선왕조의 제도적 기반을 다진 제3대 왕 태종(太宗, 이방원, 李芳遠), 터키의 서양화 개혁을 주도한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크(Kemal Atatürk), 고대 중국의 문자와 제도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고 그들에게 율법을 전수한 모세(Moses) 등 일련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업적들에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자신의 업적들을 ‘시대착오적인’ 독재와 무리한 장기집권을 통해 달성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최고 가치로 받드는 현대인들로부터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이 대통령의 치적을 논함에 있어 그의 공(功)에서 과(過)를 감산(減算)하기 마련이다. 1950~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 정치평론가 신상초는 1965년에 발표한 그의「밖에서 본 이승만 박사」라는 글에서 이 대통령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점한 바 있다.

    이 박사는 오늘날 우리 사회 우리 국가를 요 모양 요 꼴로 썩게 만들고 비뚤어지게 만들고 빈사에 가까운 절망상태를 조성한 데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할 정치인이다. (중략) 총체적으로 이 박사를 평가한다면 정치가로서 보기 드문 행운아였으나 영화와 집권의 망령 때문에 만년(晩年)을 망쳐버린 독재자이다. 그러나 그는 ‘현대판 파시스트’는 못 되는 위인이었고 권모술수에 능한 궁정(宮廷)정치적인 음모가였다. 그가 이 민족 이 국가에 남긴 공과(功過)를 따진다면 필자는 ‘공3 과7(功三過七)’로 채점하여 조금도 각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신상초의 이 대통령 공과론은 4·19 이후 남한의 대다수 지식인이 공유했던 부정적인 이승만관(觀)을 대변한 감이 있다. 그런데 신상초의 ‘공3 과7’론은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 성격과 정치 스타일에 초점을 맞추어 내린 평가였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전체적인 업적은 간과되고 말았다. 신상초는 위에서 발표자가 제시한 이 대통령의 획기적인 제도적 업적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논급하지 않았다. 그가 이 대통령이 집권 당시 이룩한 다방면의 제도적 업적과 그 업적들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 내지 가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의 평점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 점에서 1965년 신상초의 이 대통령 업적 평가는 지나치게 근시안적이고 이상주의적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 민족이 조선왕조(대한제국)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물려받은 인적·물적·지적 유산은 지극히 빈약했다. 그리고 해방 후 남한은 유사 이래 보기 드문, 극심한 정치·사회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다 대한민국은 건국 후 겨우 2년 만에 6·25전쟁이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겪었으며 그 후 계속 동서 냉전의 틈바구니에 끼어 북한과 군사적·이념적 대결을 지속했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1948부터 1960까지 이 대통령이 성취한 여러 가지 제도 창출/개혁의 업적과 그가 범한 실정들을 종합하여 총체적으로 평한다면 그의 치적은 적어도 ‘공7 과3’으로 채점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