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핑크는 빨간색보다 야하다. 훤히 드러낸 가슴보다 앙가슴에 더 두근대는 이유와 비슷하다.

    일본에서 '핑크'는 성적인 의미를 상징하는 에로틱 컬러다. 혹자는 '무릎과 무릎사이의 컬러'라고 핑크색을 규정하기도 한다. 그 애매모호한 경계를 지니고 있는 '핑크'가 영화와 만났다. 여성들을 위한 '핑크영화제'가 열린 서울 동작동 씨너스 이수점에서 6일 '일본 핑크영화계의 대부' 아사쿠라 다이스케(67) 국영영화사 프로듀서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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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크영화제 포스터

    아사쿠라는 "핑크 영화를 보면 힘이 난다"고 했다. 아사쿠라 다이스케는 남자 이름이다. 그는 일 외에 다른 곳에서는 그냥 사또 여사로 불린다. 그는 가볍게 친 쇼트머리에 앙다문 입술, 보라색이 들어간 안경을 쓰고 감색바지정장을 입은 노년의 커리어우먼이었다. 유달리 큰 귓볼에 단 귀걸이가 그나마 여성성을 상징해 준다는 것 외에는 영락없는 여장부 모습이었다.

    '핑크 대부' 아사쿠라 다이스케는 남자 이름쓰는 여자

    이름만 들었을 때 당연히 남자일거라 생각했는데 대면한 순간 당황해 준비해간 질문은 제쳐두고 다짜고짜 '여자가 어쩌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아사쿠라는 "그 얘기를 하자면 너무 길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그 궁금증는 얼마 안 가 풀렸다.

    아사쿠라는 "지금은 핑크영화가 어느 정도 대중성과 마니아층을 갖게 됐지만 내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여성이 이런 일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흉이 됐던 시절"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핑크영화 기획자 직함에 어울릴 가명으로 '아사쿠라 다이스케(아침부터 즐겁게)'라는 남자이름을 쓰게 됐다. 이 말에 그간 그가 핑크영화를 하면서 거쳤을 법한 세상의 모든 편견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려졌다.

    '핑크영화'는 정말 야했다. 속옷만 걸친 채 거실에서 누워있는 여성과 이를 훔쳐보는 이웃집 남성, 기모노 한쪽 어깨를 거의 반쯤 벗어내린 여성, 클로즈업 된 촉촉한 입술, 뱅글뱅글 돌아가는 카메라와 요란한 음악소리,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얼굴이 붉어져 혼자 보길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 정도. 상영작은 '새엄마는 동갑내기' '간다천 음란전쟁' '단지부인-불륜러브러브'' 다락방의 비밀' '치한전철-속옷검사'등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일지 대충 짐작이 갈 법도 싶다.

  • ▲ <span style=5일 서울 동작동 씨너스이수점에서 열린 핑크영화제 개막식 ⓒ 뉴데일리 " title="▲ 5일 서울 동작동 씨너스이수점에서 열린 핑크영화제 개막식 ⓒ 뉴데일리 ">
    5일 서울 동작동 씨너스이수점에서 열린 핑크영화제 개막식 ⓒ 뉴데일리

    총 제작비 300만엔(우리돈 약 3900만원), 촬영기간 3일, 35mm 필름촬영, 베드신 4∼5회, 러닝타임 60분이라는 이른바 '핑크영화룰'이다. '핑크영화'는 일본 저예산 성애영화를 지칭하는 용어다. 영화제 주최 측은 "포르노는 오로지 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반면, 핑크영화는 성이 영화 속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고 차이를 뒀다. 영화 '쉘위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박치기'의 이즈츠 카즈유키, '큐어' '도쿄소나타'의 구로사와 기요시, 2009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인 '굿바이'의 타키타 요지로 감독 등이 핑크영화로 데뷔했다.

    "편견 갖지 말고 그냥 영화로 즐겨줬으면"

    관객에게 한마디를 부탁하자 아사쿠라는 "뭔가 대단히 에로틱한 것을 기대하고 올 관객에겐 미안하지만 핑크영화라고 해서 미리부터 편견을 갖고 오지 말고, 그냥 영화로 즐겨줬으면 한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부드럽고 이해하기 쉬워서 옛날에 내가 영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봤던 순수한 영화의 느낌을 준다"고 평했다.

    사진을 한장 찍겠다고 청했더니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아직까지도 여자가 핑크영화를 한다는 것에 대한 선입견이 있기 때문에 굳이 얼굴을 알리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핑크색, 반평생을 성애영화 기획자로 살면서 세상의 편견 때문에 남자 이름을 택한 그의 뒷모습은 이런 색깔일까 싶었다.      

  • ▲ <span style=5일 서울 동작동 씨너스이수점에서 열린 핑크영화제 개막식 ⓒ 뉴데일리 " title="▲ 5일 서울 동작동 씨너스이수점에서 열린 핑크영화제 개막식 ⓒ 뉴데일리 ">

     

    자칫 '에로영화'나 '포르노'로 비칠 수 있는 핑크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역할은 중요하다. 실제로 핑크영화를 보다 보면 여성은 '건드리기만 해도 흥분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일본에서 남성을 위해 만든 영화를 한국에서는 '여성을 위한 영화'로 탈바꿈한 탓에 관객은 영화 속 여성의 지위에 모호함을 느낀다. '여성을 위한 영화라고 하던데 왜 보고 난 후 기분이 나쁜가'라는 여성들의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핑크영화 속 여자는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간다?

    하드코어적인 정사신도 보는 이에 따라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다. "'포르노'와 다른 점이 대체 뭐냐"고 따질 관객도 있을 수 있다. 이날 상영관에 온 영화평론가 김시무씨는 "핑크영화의 흥행은 사회적 체면 때문에 공공연하게 볼 수 없는 영화에 대한 수요층이 있다는 반증"이라며 "성과 관련해 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또는 포르노 그 전 단계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켜 준다는 점에서 핑크영화의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 ▲ <span style='OL러브쥬스' 한 장면 " title="▲ 'OL러브쥬스' 한 장면 ">
    'OL러브쥬스' 한 장면 

    로키 류이치 감독('우리들의 계절' 작)도 "'여자들은 저런 건 절대 안하지'라든가 '저런 건 이해못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멋대로 만들어 낸 여성상을 그리는 것은 싫다"며 "내가 만들어 내는 것보다 주변에 있을 법한 여성의 삶을 응원하는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개막작 'OL러브쥬스'를 만든 타지리 유지 감독은 '영화속 여성상'에 대해 "주로 내가 동경하는 여성상을 그린다"고 했다. 타지리 감독은 이날 개막식에서 "20대 시절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는 바람에 내리지 못하고 종점까지 간 일이 있었다"며 "종점에 내린 후 그 여성을 쫓아가서 말을 걸고 싶었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영화는 '만약 내가 그 여성을 쫓아갔었더라면…'이라는 실제 경험담을 담아 만든 작품"이라고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개막식에는 'OL 러브쥬스'의 타지리 유지 감독과 사토 마키오, '야리망'의 사카모토 레이 감독, '새엄마는 동갑내기'의 호리 테이츠 감독, '단지부인 불륜러브러브'의 이토 다케시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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