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종삼과 박철균이 쓴 제주4·3사건의 진실"김익렬 '유고', 박진경 '악마화' 기름 부어""'美 군정'에 '4·3사건' 책임 전가하려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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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빈약한 참모 조직을 정비한 뒤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작전 체계를 구축한 박 대령은 '공산 폭도 100명을 놓치더라도 무고한 주민이 한 명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민 보호 지침을 하달했다.
한마디로 주민을 보호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효과적으로 진압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는 평가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박 대령에 대한 왜곡된 사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박 대령의 강경 진압에 반발해 연대병력이 탈영했다는 등 여러 가지 왜곡된 주장들이 무분별하게 퍼졌다. 마타도어식 왜곡이 확산되면서 어느덧 박 대령은 '4·3사건' 학살의 주범이 돼 버렸고, 포로를 고문하거나 무차별 살상 명령을 내린 비인도적 지휘관으로 매도됐다.
특히 "박진경 대령이 취임식에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발언했다"는 왜곡된 주장은 지금도 박 대령이 '4·3사건'의 학살자로 비난받는 주된 이유가 되고 있다.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 - 그들은 왜 진실을 은폐했나?(도서출판 '프리덤칼리지장학회' 刊)'는 나종삼 전 4·3전문위원과 박 대령의 유족인 박철균 예비역 장군이, 1948년 5월 6일부터 6월 18일까지 박 대령이 제주도에서 근무했던 기간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사실대로 정확히 밝힘으로써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기획·제작된 책이다.
박 대령에 대한 역사왜곡은 1948년 5월 10일 있었던 '남로당 대책회의' 사실을 '4·3사건'의 공식기록물인 '4·3정부보고서'에서 빠뜨린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박 대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미 군정의 추천과 경비대 총사령부의 명에 따라 '4·3사건' 이후 제주도 상황을 안정화하기 위해 1948년 5월 6일 부임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남로당 중앙당의 정치지도원이 제주도에 도착했고, 5월 10일 남로당 대책회의가 열려 그 자리에서 박 대령의 숙청이 결정됐다. 이 명확한 증거가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폭도(인민유격대)의 내부 기록,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누락은 남로당의 지시로 직속 상관 박 대령을 암살한 남로당 프락치 암살범 일당들이 마치 정의를 구현한 '열사'로 둔갑하거나, 해당 사건을 둘러싼 제주도 내 여론을 오도하는 바탕이 됐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여기에 더해 1988년 공개된 김익렬의 '유고(遺稿)'는 박 대령을 '악마화'하는 데 기름을 부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김익렬은 '4·3사건' 직후인 6월 '동족의 피로 물들인 제주 참전기'를 쓰고 8월 초 국제신문에 기고했는데, 40년이 지난 후 '기고'의 내용과 엄청나게 달라진 내용의 '유고'를 공개함으로써 역사를 철저히 왜곡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김익렬이 유고 앞 부분에선 "'민중폭동'이 '공산폭동'으로 발전했다"고 썼다가 유고 말미엔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4·3사건'에 대해 상충된 기술을 하고, 월북·남파·빨치산 활동 사실이 확인된 김달삼의 이력을 '부대장이나 정보관들이 공명을 노리고 꾸며낸 것'으로 치부하는 등, 객관성과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어처구니없게도 문제의 '정부보고서'가 김익렬의 '언론 기고문'를 묵살하고, 내용상 일관성이 결여된 '유고'를 원전으로 삼아 '소설 같은 기록'을 만들었다"고 개탄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 대령이 취임사에서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제주도의 폭동을 진압하겠다'고 말했다는 소위 '30만 제주도민 희생설'을 탄생시킨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1980년 8월 15일 '창군동우회'가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고(故) 박진경 대령, 장군 추서 건의서'에 김익렬이 서명을 했다는 점이다. 당시 창군동우회는 박 대령이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전사 일자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두 달 전이라, 사후 '장군 추서'가 안 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해 이를 건의하는 문건을 이희성 대장에게 보냈다. 저자는 김익렬 등이 서명 날인한 해당 건의서 사진을 이 책에 실었다.
사실 '제주도민 30만 희생설'은 범행 후 피신했다가 극적으로 체포된 '하극상의 암살범'이자 '반란범'들의 구차한 자기변명에서 비롯됐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이들 중 그 누구도 박 대령이 취임사에서 '도민 30만 희생설'을 언급했다고 증언하지 않았다. 조선중앙일보에 따르면 암살 주범인 문상길 중위는 1948년 법정에서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 사령관)김달삼이 '제주도민 30만을 위해 박 대령을 살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저격범 손선호 하사는 "박 대령이 작전 시 '우리나라 3000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켜도 좋다'는 방침을 내렸다"고 허위 진술했다.
저자는 "이처럼 이들의 진술 내용은 일관성도 없고 서로 어긋난다"며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눈앞에 둔 주범 문상길과 손선호가 최후 진술로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제주도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우려는 자신들이야말로 30만 제주도민의 편에 서 있고, 30만 제주도민을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사도'라고 자신들을 포장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가 파악한 박 대령을 아는 지인 또는 함께 일했던 부하들은 누구나 그를 성실하고 말수가 적은 데다, 술도 마시지 못하고 부하와 주변 지인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했던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같이 근무했던 채명신·이세호·김종면·유근창도 각자의 증언을 통해 "30만 희생설은 들은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또 채명신 장군은 "박 대령의 작전은 제주도민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반란군의 입을 통해 박 대령에게 뒤집어씌워진 '30만 제주도민 희생설'은 날개를 단 듯 확대·재생산됐다. 최근에는 박 대령이 '4·3사건'의 학살자, '4·3사건'의 원흉으로까지 언급되는 상황이 됐다고 저자는 통탄한다.
박 대령이 제주도에 부임해 암살당하기까지는 한 달 반이 채 안 되는 기간이다. 부임 후 부대 정비를 하고 작전 임무를 수행하기도 빠듯한 그 기간에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고, 그 증거 또한 어디에도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당시 경비대의 작전은 총사령관인 브라운 대령이 지휘하고 있었고, 박 대령이 브라운 대령 모르게 주민을 학살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박 대령의 제주도 재임 기간인 1948년 5~6월은 '4·3사건' 초기 단계로, 남로당 무장세력의 공세기였다. 정부보고서에 기록된 월별 희생자 신고 현황에 따르면 5월엔 289명, 6월엔 157명이 희생됐는데, 1948년 10월 이후부터 1949년 1월까지 희생자가 매월 2000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박 대령의 부임 기간 교전 중에 숨진 사망자 수는 25명이었다.
저자는 "정부보고서는 물론 4·3연구소나 평화재단 등도 제주 민간인 희생자 대다수가 1948년 10월 이후 발생했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박 대령이 재임한 5~6월에 '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것처럼 왜곡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박 대령이 '4·3사건' 역사왜곡의 표적이 된 이유가 미 군정에 '4·3사건'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 미 군정 당국의 '과실'이 인정되면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에게 온전한 정당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48년 초 우리 모두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마지막 과정에서, 사활을 건 이념 대립과 피비린내 나는 폭력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4·3사건은 이러한 격동기에 벌어져 1만4000여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된 우리 근현대사에 되풀이돼서는 안 될 매우 눈물겹고 가슴 아픈 사건이다.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제주도를 안정화하고 대한민국을 탄생시키기 위해 땀과 피를 흘린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 국방경비대와 박 대령을 왜곡하고 매도해서도 안 된다"며 "이들도 '4·3사건'의 똑같은 희생자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저자 소개
나종삼(羅鍾三) = ▲전북 김제군 죽산면 죽산리 죽동 출생 ▲죽산초등학교, 김제중학교, 죽산고등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졸업(제21기, 학사, 육군소위) ▲육군대학, 국방대학원, 경희대경영대학원 졸업(석사) ▲전차소대장, 장갑차소대장(월남), 전차중대장, 전차대대장, 육대교관, 기갑학교전술학처장, 학군단반월분단장(예편) ▲전사편찬위원회편찬위원, 국방군사연구소연구위원(전사부장) ▲제주4·3위원회전문위원(진상조사보고서작성팀)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고문
박철균(朴哲均) = ▲홍익초등학교, 숭문중학교, 경성고등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졸업(1986년 제42기, 학사, 육군소위) ▲美 Georgetown 대학대학원 국가안보학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박사 ▲영국 JSCSC(합동참모대학) 고급과정 ▲7사단작전계획장교, 한미연합사부사령관전속부관, 작전처작전계획장교 ▲보병3사단중대장, 28사단대대장, 53사단연대장 ▲합참군사전략과전략기획담당, 국방부정책실미국정책과장·국제차장 ▲국방부군비통제검증단장 ▲한국국방연구원 연구과제평가위원-글로벌국방연구포럼 안보전략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