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운동권이 숭배하는 촘스키의 '위선·교활함'과 판박이북한 인권탄압 항의하면 창피한가···그런 '진보' 어디 없나
  • ▲ 지난 6월 국회 앞에서 열린 북한인권재단 출범 촉구 기자회견. ⓒ이종현 기자.
    ▲ 지난 6월 국회 앞에서 열린 북한인권재단 출범 촉구 기자회견. ⓒ이종현 기자.
    ■ 성추행하는 성직자?

    더불어민주당이 7년째 또 북한인권재단 구성에 응하지 않았다.
    파렴치하고 수치스러운 작태다.
    인권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왕년의 운동권.
    이들이 이제 와 인권을 마다하니,
    창피하지도 않은가?
    위선의 극치다.

    그들은 놈 촘스키(Noam Chomsky)란 미국 좌파를 필시 좋아할 것이다.
    그는 ‘자유사회주의자(libertarian socialist)’ 또는 '무정부주의자'라 자처한다.
    자유주의도 하고 국가통제도
    동시에 하겠다니,
    성추행하는 성직자가 되겠다는 뜻인가?

    미국의 한 평론가의 글에 의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서엔
    위선자에 관한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위선자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자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놈 촘스키 자신이 어쩌면 그런 위선자일 수 있다.
    [필자 註 ]
    Features, May 2003, The hypocrisy of Noam Chomsky, Keith  Windschuttle, on the philosopher’s record of defending authoritarian regime

    그는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 정권이 3백만 명을 학살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것(학살)은,
    폴 포트 새 정권의 긍정적인 성과에 따른 작은 비용(small price)일 것이다.”

    1967년에 중공 마오쩌둥의 실패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것들이
    대단히 찬양할 만했다(quite admirable).”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은,
    1958~1962년 사이에 3천만 명의 아사자를 냈는데도.

    더 심각한 사례도 있다.
    촘스키는,
    알카에다의 9.11 테러에 관한 자신의 저서의 제목부터
    “대안이 있었나(Was there alternative)?”라고 붙였다.
    대안이 없었으면?
    그래서 불가피했다 이 말인지?

    그의 어법은 늘 이런 식이다.
    전체주의자들의 인권유린을 나무라면,
    “부르주아 너희 인권유린은?”
    하고 되묻는 방식.

    어느 쪽에도 그늘이야 다 있겠지.
    그렇다고 고양이의 못된 짓을 탓하면
    “강아지의 못된 짓은?” 하고,
    반격 아닌 반격을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양쪽 다 나무라면 되지 않나?
    여기에,
    놈 촘스키의 위선과 교활함이 엿보인다.

    ■ 위선자들의 상투적 논리는?

    한국의 운동권도 꼭 그런 식이다.
    북한 인권을 비판하면 그들은 상투적으로 이렇게 반발한다.

    (1) 북한 정보를 몰라서 그쪽 인권을 거론할 수 없다.
    (2) 남·북 화해를 하는 마당에 북한 인권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남한의 인권은?

    (1)은,
    오늘의 정보화 시대엔 통용될 수 없다.
    이젠 북한의 인권유린을 모른다고 시침 뗄 수 없다.
    탈북동포가 3만 5천 명이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지!

    (2)는,
    “화해란 무엇이며 왜 화해하는가?”의 근본 이유를 몰각한 말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양쪽의 힘이 엇비슷할 때는 공존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 소련이 그랬다.

    그러면서도,
    미국과 소련은 피차 각자의 이념만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이겼다.
    소련의 공산주의는 망했다.

    대한민국도 전쟁을 억제하는 노력은 하고 있다.
    그렇다고 북한 전체주의와 맞서는
    자유민주 이념의 우월성과 정당성만은 포기·단념·양보할 수 없다.
    이 대원칙하에서,
    [화해]란 명분으로 북한의 인권참상에 침묵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저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대한민국을 ‘미제(美帝) 식민지’라고 비방한다.
    그런데 왜 우리만 일방적으로 북한 인권참상을 거론도 해선 안 되나?

    (3)은,
    권위주의 시대엔 해당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화 후로는 웃기는 소리다.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도 인권유린이 발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알려지는 순간부터
    우리 내부의 제재(制裁)로 응징당할 것이다.

    ■ 이래서 한국엔 '진보' 없다

    민주당 등 운동권이,
    자유주의의 부작용이 생길 때 그것을 치유할 ‘진보적’ 노선으로 나간다는
    그 동기는 굳이 나무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 발상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왜 굳이 북한 인권탄압 모르쇠인가?
    북한 인권 말살도 또렷하게 비판하는 진보로 가면 어디가 아픈가?

    한국 운동권은,
    왕년에 인권탄압에 항의한다며
    조앤 바이스의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계엄령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북한 인권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
    대체 무엇이 그들에게서 연민(憐憫)을 탈색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