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 7만 명, 북한서 노예로 살다 비참하게 묻혀"… 손명화 포로가족회 대표"자녀들도 탄광서 강제노동… 배고프면 석탄덩어리 입에 넣고 물 마셔""국군포로 아버지 '통일 되면 내 묘를 파서 고향에 묻어 달라' 유언""목숨 걸고 유해 가져왔지만… 정부에선 국군포로로 추정만 할 뿐""피랍포로 모두 숨졌지만 유해는 송환할 수 있어… 원통함 풀어 달라"
  • ▲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단체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단체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올해는 1950년 발발해 1953년 휴전을 선언한 6·25전쟁 정전 70주년이다. 

    전쟁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뛰어든 군인 중 약 8만 명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국군포로가 돼 북한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14일 뉴데일리는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를 만났다. 1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국군포로의 삶을 돌아보고 그들의 영혼을 기릴 수 있는 방법을 들어봤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군포로를 잘 모른다. 그들은 누구인가?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당시 그들의 나이는 10대였다. 국가는 어린 그들의 손에 총을 쥐어주고 '나라를 지켜 달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전쟁터로 내보냈다.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국가는 그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1953년 정전협상이 이뤄졌고 끝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국군포로가 됐다."
  • ▲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단체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단체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국군포로는 북한에서 어떤 삶을 살았나?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 정전협상 당시 북한은 포로 송환을 요구하는 남한을 향해 '국군포로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주장했다. 10대였던 어린 포로들의 노동력을 부려먹기 위해서다. 그렇게 약 7만2600명의 국군포로는 포로수용소에서 안전성 건설대로 옮겨져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에 3년 동안 투입됐다. 포로들이 고향에 가 부모·형제를 단 한 번이라도 보겠다며 탈출을 시도하면 다른 포로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했다. 그것을 본 포로들은 무서워 도망치지 못했다. 그들은 아파도 옷을 갈아입지 못해, 잠을 자고 일어나 옷을 털면 이가 한 소쿠리씩 나왔다. 피부병에 걸렸고 잘 먹지도 못해 영양실조로 죽었다. '죽으면 개값'이라는 말처럼 그들은 그냥 땅에 묻혔다.

    북한은 3년 뒤 포로들을 국경지역 곳곳의 탄광으로 보냈다. 고향으로 가는 줄로만 알고 화물트럭에 콩나물처럼 실려 가던 포로들은 탄광에 도착하자 좌절감을 느끼고 반항했다. 그러자 북한은 '고향에 가고 싶은 이들은 좌측에 서라'라고 말하고는 그들을 향해 기관총을 쏴 죽였다. '살아야겠다' 싶어 우측으로 넘어간 포로들은 그렇게 잡혀 평생 광산에서 노예로 살았다. 그들은 새벽에 탄광 굴에 들어가 저녁 해질녘이 돼서야 밖으로 나왔고, 정해진 석탄을 채굴하지 못하면 훨씬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다. 또 전향서(정치 이념 변경)를 작성하지 않은 포로들은 탄광 굴에서 불에 타 죽었다. 무기값을 대신해 소련으로 팔려간 포로도 7000~8000명에 달했다.

    1976년 도끼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국군포로 숙청사업이 벌어져 모든 포로가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 그런데 포로를 다 수용할 수 없자 포로들의 눈을 가린 채 늪에 눕혀 총을 쏴 죽였다. 나중에 보안원(담당 경찰)이 말하기를, 북한 종성군 늪에서 국군포로 시체가 썩어 나온 탄을 캐 농장 밭에 비료로 뿌렸단다. 그것을 듣고 우리 자녀들은 가슴에 사무치도록 한스러워 통곡했다. 또 북한은 국군포로를 잡아가기 위해 당에서 작업반을 만들어 술자리를 마련했다. 술을 먹은 포로가 '고향 남한으로 가 부모·형제를 딱 한 번 만 보고 싶다'고 말하면, 그는 남조선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그날 새벽 없어진다. 자녀들은 밤을 지새며 아버지를 기다리는데 결국 영원히 볼 수 없게 됐다."
  • ▲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단체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단체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국군포로 자녀로서의 삶은 어떠했나?

    "자녀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대학을 가지 못했고 군대도 못 갔다. 연좌제 때문에 국군포로 아버지를 둔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를 따라 탄광으로 가야만 했다. 대한민국에서 석탄을 먹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정말 그랬다. 주먹밥 하나를 메고 탄광에 들어가 밤 늦게까지 석탄을 캐다 보면 배가 너무 고팠다. 그러면 찰진흙, 북한에서는 '떡탄'이라고 하는 석탄을 캐 입에 넣고 물을 들이켰다. 그러면 대변을 못 눠 항문이 찢어졌고 젓가락 같은 것으로 막 파내야 했다. 그저 '괴뢰군 43호'의 자녀라는 이유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채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괴뢰군 43호'의 의미는?

    "김일성은 1956년 5월11일 '정무원 결정 43호'를 내렸다. 정전협상 이후 1956년까지 안전성 건설대에서 강제노역을 당하던 국군포로들은 당시 신분 없는 10, 20대들이었다. '정무원 결정 43호'는 이런 포로들에게 공민증, 즉 신분증을 줘 정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국군포로들은 이 문서번호를 따 '괴뢰군 43호'로 불렸고, 평생토록 무거운 딱지를 어깨에 짊어진 채 인권 말살과 차별, 그리고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 고 손동식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있다던데.

    "아버지가 눈을 감으며 제게 한 말씀은 '앞으로 통일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통일이 되면 내 묘를 파서 고향에 꼭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다 51세에 폐암에 걸리셨다. 그런데도 높은 산에 올라가 통나무를 생산하는 일을 해야 했다. 시멘트 바닥도 없는 곳에서 가마니와 비닐막을 깐 막에서 평생 혼자 사셨고, 죽을 때까지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했다. 아버지가 더이상 나무를 베지 못할 만큼 거동이 힘들어졌을 때 맞은 편에 살던 다른 국군포로가 소달구지에 아버지를 실어 집으로 모셔왔다. 10일 동안 정신을 잃으셨던 아버지는 눈을 감으시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름, 그리고 아버지 군번이 'K'라는 것까지 말해 줬다."
  • ▲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단체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단체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손명화 대표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2005년 두만강을 건너 대한민국 땅을 밟았고, 2013년에는 아버지의 유해를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어떠했나?

    "우리는 북한에 이어 '아버지의 고향' 남한에 와서도 버림받았다. 대한민국이 '국군포로 손동식의 자녀'라며 따듯하게 안아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이곳에 왔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국방부는 '국군포로는 죽어도 된다'는 망언을 했고, 또 유해 송환에 대해 '본인들이 원해서 가져왔지 정부가 가져오라 했느냐'고 큰소리쳤다. 목숨 걸고 유해를 배낭에 넣어 탈북했는데도 국군포로의 자식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 유해를 가져온 것이 화근이 돼 형제 3명이 정치범수용소로 갔다. 유해와 가족의 목숨을 맞바꿨는데도 국가는 모른 척했다. 배가 고파 넘어온 일반 탈북자가 아닌, 고향을 찾아 내려온 대한민국 국민을 버린 것이다."  

    -호적상 국군포로의 자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아버지 병적증명서를 보면 국방부는 아버지를 '1951년 전사'로 적어놨다. 제가 62년생인데 아버지가 51년 전사라면, 그럼 제 아버지는 누구냐. 제 아버지는 없는 것 아니냐. 아버지와 제 DNA가 일치한다는 검사자료도 있는데 여태 정정해 주지 않고 있다. 행정서류는 오기가 있을 경우 증거자료를 대면 정정해주게끔 돼 있고, 가정법원에서 인지소송을 걸어 판결문을 받았는데도 그렇다. 우리는 국군포로 '추정' 자녀일 뿐이다. 또 국방부는 다른 서류에서 아버지가 1951년 5월18일 실종했다고 적어놓고는 그해 7월28일 하사로 진급했다고 해놓았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사로 진급할 수 있나. 자기들 입맛대로 실종 신고하고 진급시키고 그러는 거다. 국군포로 자녀로서 제가 살아 숨쉴 때 행정서류가 꼭 정정돼야 한다."

    -정부에 바라는 점은?

    "대한민국은 70년 분단 이래 국군포로 한 분, 유해 한 구 송환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국가는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데 70년 동안 사과 한 번 하지 않았다. 또 북한에서 연좌제로 고통받아온 포로 자녀들을 안아주지 못할망정 버렸다. 우리가 왜 이렇게 울분을 토하는지 들어 주고, 그런 삶을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으면 좋겠다. 억만장자가 와도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지금이라도 아버지들의 집단 퇴역식을 진행해 주고, 아버지들에게 훈장도 수여해 줬으면 한다. 10, 20대 청춘은 못 돌려줘도 명예는 회복시켜 줘야 하지 않나. 그러면 마음에 위안을 삼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국군포로가족회 대표로서 간절하게 부탁한다."
  • ▲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단체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단체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앞으로 6·25국군포로가족회를 어떻게 이끌어가고 싶은지?

    "국군포로는 이제 모두 사망해 안 계시지만 그래도 유해는 송환할 수 있다. 자녀들이 아버지 유해가 묻힌 장소를 다 알고 있어서, 이미 들여온 7구를 제외한 나머지 90구 정도를 가져올 수 있다. 죽기 전, 고향 땅 한번 밟고 싶다 하신 우리 10, 20대 아버지 영혼들을 모셔다 대한민국 땅에 묻어 드리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나가고 싶다. 또 젊은 청년들에게 국군포로의 아픔과 그들이 겪은 억울한 인생을 가르쳐 주고 싶다. 학교·군부대 등에 가서 '희생 없는 평화, 공짜 행복은 없다'는 사실과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하는 길'임을 알려주고 싶다. 그래야 청년세대가 나라와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결국 대한민국이 훨씬 더 건강하고 행복한 나라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껏 10년 동안 생계를 접고 국군포로를 위해 일해왔다. 이것을 '한 개인의 몸부림'으로 치부하고 포로의 존재와 상흔을 잊는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나서서 국군포로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그들의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기 바란다. 정전 70주년을 맞아 국군포로 문제를 잘 마무리해 줬으면 하는 바람을 마지막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