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핵상과 협상학(24)… 중재자-촉진자 보다 '조정자 역할'에 주력해야
  • 북한 비핵화를 위한 미북, 남북, 한미 등 3국의 협상 수싸움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적어도 미국과 북한 협상 담당자들의 기싸움은 금방이라도 협상을 깰 듯 팽팽하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는 지난주부터 느닷없이 스스로 ‘촉진자’라며 기능인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협상의 핵심 당사국으로서 스스로를 낮추는 표현이다. 잘못된 견해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만큼 정확한 인식과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흔히 협상은 둘 사이에서 이익을 다툴 때 발생한다. 이때 둘 사이에 논의가 원할하지 않으면 제3자가 도움을 주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 유명한 1993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중재자로 나선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아라파트 의장의 평화협상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중간에서 팔을 벌리고 서고, 두 나라 대표가 악수하던 그 장면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경우 클린턴처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나라를 압박하는 카드가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중재자’라는 표현은 사실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이었다. 법적으로도 ‘중재’라는 의미는 둘 사이 협상이 원활하지 않을 때 둘의 위탁으로 강제력이 있는 대안을 내는 것을 말한다. 즉, 중재자의 대안은 구속력이 있어 설령 당사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반드시 수용해야 하는 만큼 미국과 북한에 우리의 중재안이 그런 구속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가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중재자와 촉진자가 아닌 ‘조정자’ 역할이 더 정확하다. 즉, 중재자처럼 대안을 내긴 하지만 당사자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구속력을 갖지 않을 경우를 일컫는다. 당사자들도 강제로 따를 필요는 없어서 오히려 더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최근 분쟁 해결에서 더 선호하는 방식이다. 

    조정자로서 우리나라가 현 단계에서 갖춰야 할 두 가지를 든다면 첫째, 공개적 ‘침묵’이다. 민감한 시기 상대국에 오해를 줄 수 있는 표현을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다. 일부 여당 중진의원들의 제재 완화 주장은 상대국들에 오해를 줄 수 있다. 북한은 이미 최선희 부상이 한국은 중재자가 아니라고 거부했다. 상대의 이익을 수면 아래에서 활발히 파악하되 공개적으로는 ‘침묵’하는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 따라서 협상에서 종종 ‘침묵’은 최고의 무기로 평가된다. 

    둘째, 인류 보편적 가치에서는 양보 없는 조정안이어야 한다. 자칫 둘의 이익을 동시에 감안한다는 명분하에 국제사회가 공통으로 문제삼는 북한의 핵 보유와 인권탄압마저 북한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은 금물이다. ‘용서’로 유명한 남아공 만델라 대통령의 통일정부 사례를 들 수 있다. 

    1980년 후반 남아공은 악명 높은 ‘인종차별(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제제재를 받았다. 당시는 남아공 데클레르 정부에 대한 아프리카민족전선(ANC)의 무력을 포함한 강력한 투쟁으로 일촉즉발의 관계였다. 만델라는 그 사이에서서 자신이 속한 ANC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가면서 중간 역할을 했지만, 정부의 ‘인종차별’ 철폐 문제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기에 감옥에서도 세계인의 지지와 보호를 얻을 수 있었다. 만델라는 수십 년 가해자인 백인들을 용서하자는 파격적 주장을 관철시키며, 한편으로는 수십 년 기득권을 가진 백인정부의 포기를 얻어낼 수 있었다.  

    본격적인 힘겨루기에 들어간 북한 비핵화 협상이다. 우리 정부도 유사한 사례를 토대로, 인류보편적 가치를 담은 대안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그렇지 않은 조정안이나 협상안은 해당 국민은 물론이고 세계인의 지원을 얻지 못해, 언제고 국가분열과 세계인의 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

    / 권신일 前허드슨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