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등장하자, 엄숙함 감돌아…참석자들 오찬도 함께해
  • ▲ 새정치민주연합 권노갑 상임고문(오른쪽)이 3일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권노갑 상임고문(오른쪽)이 3일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1. 11월 3일 오후 2시, 국회 헌정기념관

    "새정치민주연합이 정권교체를 이뤄 반드시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민주주의와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의 길을 활짝 여는데 마지막 여생을 바치고 싶다."

    지난 3일 헌정기념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연 권노갑 상임고문의 일성(一聲)이다.

    이날 권노갑 고문의 출판기념회에는 많은 여야 정치인들이 운집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축사에서 "우리 모두의 큰 형님이신 노갑이 형님"이라고 외쳤다.

    야당에서는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해 안규백 원내수석부대표·조정식 사무총장·윤관석 수석사무부총장 등 핵심 당직자들과 김한길·박지원·이해찬·전병헌·추미애·한명숙 의원 등 전직 당대표·원내대표 그리고 김영환·문재인·설훈·이종걸·한정애 의원 등이 참석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권노갑 고문을 중심으로 하는 동교동계 원로들의 영향력이 심상치 않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주는 '훈수 정치'를 뛰어 넘어섰다는 게 정치권 안팎의 평가다.

    지난 9월 비상대책위원장과 원내대표를 겸하던 박영선 위원장의 '탈당' 발언으로 새정치연합이 대혼란에 빠졌을 때, 박 위원장을 설득한 인물도 권노갑 고문이었다.

    위기 때마다 후배 정치인들은 동교동계의 문을 두드린다.
    오랜 정치인생에서 묻어나는 경험을 빌려 해법을 구하기 위해서다. 오는 2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각 계파별 갈등 구조는 더욱 다변화되고 있다. DJ식 화합의 정치를 추구하는 원로들의 '메시지'에 힘이 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 ▲ 국립현충원 DJ 묘역에서 11일 열린 화요 추도 모임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권노갑 상임고문이 한정애 대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립현충원 DJ 묘역에서 11일 열린 화요 추도 모임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권노갑 상임고문이 한정애 대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2. 11월 11일 오전 10시 30분, 국립현충원 DJ 묘역

     

    '동교동계' 명칭은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사저가 오랫동안 동교동에 있었던 데서 출발한다. DJ가 타계한지 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동교동계의 구심점은 DJ다. 5년 동안 매주 화요일이면 국립현충원 DJ 묘역에서 추도식이 열리고 있다.

    11일 오전 10시 30분. 국립현충원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역대 대통령 묘역에는 이미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추도식이 시작되기 1시간 전인데도 '동교동계' 원로들로 묘역은 북적였다. 김옥두·박양수·윤철상·이협·이훈평 전 의원 등이 눈에 띠었다.

    추도모임이 시작되는 오전 11시 30분까지 인사들은 각자 참배를 한 뒤 흩어져 담소를 나눴다.

    자주 보는 얼굴들인 데도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오늘 점심은 어디로 가느냐" 등의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보통 추모식을 마친 뒤 참석자들은 점심식사를 함께한다. 이날은 권 고문의 부인이 대치동에서 운영하는 비빔밥집 '예촌'에서 이뤄졌다.

    참석자는 매주 변동이 있어도  DJ의 배우자인 이희호 여사와 아들들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추도 모임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날도 DJ의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과 삼남인 김홍걸 씨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참석자들을 맞았다.

    어느덧 이날도 30~40명이 모였다. DJ가 타계한지 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매주 계속되는 행사에 이 정도의 인원이 항상 모인다는 것이 놀라웠다.

    자신을 '민주당 지킴이'라고 소개한 한 참석자는 "(국립현충원에) 전직 대통령 세 분이 모셔져 있지만, 추도 모임이 매주 빠짐없이 열리는 곳은 이 곳 뿐일 것"이라며 "(김대중) 선생의 8·18 서거 직후부터 한결같이 이런 모임이 열렸던 것은 자발적인 존경과 흠모의 뜻"이라고 자부심을 내보였다.

    권노갑 상임고문도 어느 새 나타나 김방림 전 의원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지난 출판기념회에서 "내 묘비에는 '김대중 선생의 영원한 비서실장'이라고 적히면 족하다"고 밝히며 영원한 DJ맨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날 <뉴데일리> 기자에게 "남은 여생을 새정치연합의 정권교체에 바치겠다는 게 내가 항상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당에 대해 항상 애정과 관심을 갖고, 또 우려하고 있다"면서 "오늘은 반기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슬며시 웃어 보였다. 지난 번 출판기념회 때 파문을 의식한 처사였다.

     

  •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배우자인 이희호 여사가 11일 오전 11시 40분 무렵 양쪽에서 부축을 받으며 국립현충원 DJ 묘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배우자인 이희호 여사가 11일 오전 11시 40분 무렵 양쪽에서 부축을 받으며 국립현충원 DJ 묘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3. 11월 11일 오전 11시 40분, 국립현충원 DJ 묘역

    오전 11시30분을 넘어서자 기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몰렸는데 추도식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40여명의 참석자들은 여유가 넘쳤다. 도착하는 대로 속속 묘소에 향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이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대화를 나눴다.

    추도식은 이희호 여사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다.

    이 여사가 양팔을 비서진에게 의지한 채 힘겹게 들어서자 묘소는 순식 간에 숙연해졌다. 이 여사의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참석자들은 마치 DJ를 만난 듯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희호 여사가 묘소 정 중앙에 자리하자 진행자는 서둘러 '일동 묵념'을 호령했다. 참석자들은 일제히 눈을 감았다. '바로' 외침으로 공식 추도 행사는 마무리됐다. 이 여사의 등장부터 단 몇 분이었지만 묘역 일대에는 엄숙함이 감돌았다.

    최근 이 여사는 건강이 좋지 않은 편이다. 

    지난 3일 권노갑 상임고문의 출판기념회도 갑작스런 감기로 참석하지 못했다. 92세 고령이지만 화요 추모식은 거른 적이 없다. 이날도 이 여사가 10분 가량 늦었지만 그의 '불참'을 예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참석자는 "이번에도 방북 하시겠다고 하지 않느냐"며 "연세가 아흔 둘이신데… 오로지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닌 나라 위한 정신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자리가 다음 주에도 다다음 주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 ▲ 국립현충원 DJ 묘역에서 11일 오전 이희호 여사가 자리한 가운데 매주 화요일마다 열리는 추도 모임이 엄수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립현충원 DJ 묘역에서 11일 오전 이희호 여사가 자리한 가운데 매주 화요일마다 열리는 추도 모임이 엄수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4. 11월 11일 오전 11시 55분, 국립현충원 대통령 묘역 구역

    이날 이 자리에는 현역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새정치연합 한정애 대변인이 참석했다. 한 대변인은 오는 12일 오후 5시에 있을 서울 강서구 자신의 지역 사무소 개소를 화제로 권노갑 상임고문과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이후 권노갑 고문은 〈뉴데일리〉 기자, 한정애 대변인과 함께 DJ 묘소에서 차량 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최근 야당의 현안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간략히 밝혔다.

     

    ◆"계파는 문제 아냐… 지도자가 잘 조정하면 돼"

     

    권 고문은 같은 동교동계인 정대철 상임고문의 최근 '신당 창당' 발언과 관련해 "정대철 고문이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라고 묻더니 "그것(신당 창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특히, 신당론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불가' 입장을 밝혔다.

    권 고문은 "우리 '민주당'이 지금 어려운 시점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있는 당에 각계각층을 망라해 나가야지, 당을 쪼개 신당을 만든다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당내 계파 갈등에 대해서도 "어느 정당에나 계파는 있기 마련이며, 지도자가 계파를 균형 있게 잘 조정하면 된다"며 내년 2월에 있을 전당대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내년 전당대회에서 대의원들이 (지도자를) 잘 선택하면 당은 충분히 크게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

     

  • ▲ 국립현충원 DJ 묘역에서 11일 열린 화요 추도 모임에서 한 참석자가 참배를 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립현충원 DJ 묘역에서 11일 열린 화요 추도 모임에서 한 참석자가 참배를 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민주당으로 당명 회귀해야… '새정치'는 정책으로"

     

    권 고문은 은연 중에 '민주당'이라는 당명을 사용했다. 정대철 고문도 4일 YTN라디오 인터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꾸는 게 급선무"라고 밝힌 바 있다.

    권 고문은 "(당명을 민주당으로 되돌리는 것은) 나도 찬성"이라며 "안철수 씨가 들어올 때 전통이 있는 '민주당' 당명으로 그대로 갔어야 했는데…"라고 탄식했다.

    그는 "미국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민주당과 공화당이 있고, 영국에는 보수당과 노동당이 있다"면서 "민주당은 정통 야당이고, 중산층을 대변하는 역사적 명칭인데 왜 당명을 바꾸나"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민주당도 새정치를 하려는 정당인데 구태여 당명을 바꾼 것은 잘못됐다"며 "명칭은 민주당으로 되돌리되, 정책위나 민주정책연구원에서 시스템적으로 새정치를 정책화해서 정책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강조했다.

     

    ◆"특정 계파가 독식을 하려 한 것이 당의 폐단의 시작"

     

    권 고문은 당이 전당대회 규칙을 두고 계파별 주장이 엇갈리는 것과 관련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없다"며 "비대위(전대 준비위)에서 잘 알아서 결정할 사안"이라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단일 지도 체제나 집단 지도 체제나 우리 민주당이 과거에 다 해봤었던 방식이고 일장일단이 있다"며 "중요한 것은 (지도 체제보다도) 우리 당의 전통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밝힌 전통은 당내 민주주의를 뜻한다. 권 고문은 "특정 계파가 독식하지 않고 주류와 비주류가 공존하면서 당내 민주주의를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야당의 전통은 주류가 60%만 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친노가 집권한 지난 19대 국회의원 공천 당시, 신진세력으로 대거 친노계 의원들이 등용된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비례대표와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세대교체 명분 하에 동교동계는 공천에서 번번이 미끌어졌다.  

    오는 전당대회에서 선출될 차기 지도부가 2016년 총선의 공천권을 행사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 조언이었다. 이는 정대철 상임고문이 지난 총선에서 당 지도부가 강경파를 지나치게 공천했다고 비판한 것과 같은 선에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권노갑 고문은 "특정 계파가 독식을 하려 한 것이 당의 폐단의 시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