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로대중의 어려운 처지를 아는 시장경제론자

       이승만은 일찍이 1904년에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당시로서는 드믈게 상업과 무역을 강조한 시장경제론자였다.

       나아가 그는 국가 간의 경쟁이 존재함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해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강조한 자유방임주의자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랜 동안 그의 측근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그를 가리켜 자유방임의 이론을 신봉하는 제퍼슨적 자유주의자로 정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1948년 건국 당시의 한국 사회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그의 이념은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국민의 다수가 사회민주주의나 공산주의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는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리고 이승만 자신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기간 동안에
언제나 가난한 교민들 속에서 살면서 그들과 호흡을 같이한 경험이 있었다.

   다시 말해, 주요산업 시설에 대한 국유,공유,국영,공영을 포함하는
국가통제의 개념이나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이 건국헌법에 스며들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주의자인 이승만도 시대적 분위기를 타야했으므로 자본과 노동이
공평하게 이익을 누리게 해야 한다는 수정자본주의적인 입장을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그의 입장은 그의 집권초기인 1948년 10월 일민주의(一民主義)의 이름으로
 처음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것은 빈민과 부자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자본가와 노동자가 협조해서 같이 이익을 보게 할 것이라는 4대 정강의 하나로 제시되었다.
  •    그러한 그의 입장은 당시 최대의 문제였던 농지개혁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났다.

       당시 농지문제에 있어서는 좌익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대지주의 농지를 몰수하여 빈농에게 대가없이 나누어주는
    무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었다. 김구의 한독당도 찬성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경자유전 원칙의 농지개혁에 찬동하면서도,
    농지를 잃은 지주에게는 적정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한 생각은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에 발표된 ‘과도정부 당면정책33항’에서 나타났다.
    거기서 그는  일본인과 민족반역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경작하게 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토지를 받은 농민은 토지가격을 여러 해에 걸처 지주에게 갚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농민이 자기 땅을 직접 경작하면 소출을 많이 늘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농사를 직접 짓지 않는 대지주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국유화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농지개혁을 통한 사회의 자유화

       인구의 73%가 농민이고 그 가운데 절반이 소작농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농지개혁이 이승만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민주주의 제도를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가난한 농민들을 경제적으로 자립하도록 만들 획기적인 조치가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농지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민당을 비롯한 국회의원의 대다수가  지주세력에 속했기 때문에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 때문에 농지개혁 법안은 수정을 거듭하다가 6 · 25 전쟁이 나기 3개월 전인
    1950년 3월에 가서야 겨우 확정될 수 있었다. 

       농지개혁법에 따르면,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매년 생산의 3분의 1을 토지대금으로 3년 동안 정부에 납부해야 했다.
    그러면 정부는 그 액수에 해당하는 지가증권(地價證券)을 이전의 지주에게 지급했다.  

       농지를 잃은 지주들을 돕기 위해 정부가 접수한 일본인 공장들을 불하받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국유화한 일본인 재산을 민영화(民營化)하는 데 이전의 지주들을 참여시키려한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에 따른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지가증권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그 때문에 정부가 의도한 원래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은 토지 소유권 이동을 자유롭게 만들므로써
    장기적으로는 한국 땅에서 자유기업(自由企業) 체제가 뿌리를 내리는 데는 기여하였다.


  • 농민들이 북한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았다
       
       농지개혁이 공식적으로 막 시작된지 몇 달 뒤에 6 · 25남침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개혁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겉 보기와는 달리 농지개혁의 심리적 효과는 아주 컸다. 
       농지개혁법안이 국회를 완전히 통과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승만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실질적으로는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농지개혁법이 확정되면 농민들이 어떤 농지를 분배받게 될 것인지를
    면사무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    그러므로 북한이 남한을 정복했을 때 농민들은
    이미 충분한 소유의식(所有意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소유권이 없이 경작권만 주는
    북한식의 토지개혁에 흥미를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농민들은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을 지킬 수 있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1950년대의 한국 사회구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오랫 동안 내려오던 지주 계급을 해체시킴으로써
     자작농 사회를 형성시키는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사람을 양반과 상민으로 차별하는
    불평등한 봉건적 신분제를 무너뜨리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농지개혁은 시장경제의 발달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민들은 생산한 농산물을 마음대로 팔게 된 것은 물론,
    토지를 팔고 도시로 나갈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농지개혁은 한국의 사회적 유동성을 촉진시키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