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로 가는 길- 제주도 ‘서복공원’도 있다

    이현오 /뉴데일리 객원기자, 칼럼니스트

     정부차원에서의 대중외교도 강화해야 하지만 ‘서복공원’ 조성 과정에서처럼 민간차원에서의 교류와 협력과 같은 민간외교력 발휘 또한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 보통 진시황(秦始皇)으로 불리는 정(政)은 진장양왕의 아들로 기원전(BC) 259년에 태어났다. 지금으로부터 2272년 전이다. 그는 중국 전국(戰國) 말기 4분5열 돼 있던 중국을 평정, 통일대업을 완수하고 최초로 ‘황제’에 등극한 최초의 통일 전제군주, 통일 정복자다. 

  •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바라다보면 맨 마지막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장대한 지구촌 유적이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그 규모의 어마어마함은 이미 확인된 바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만리장성을 중국통일의 상징물로, 또 진시황이라는 전제군주의 거대한 권력의 상징물로 바라보는 이유도 무관치 않으며, 당대 진 나라 시황제 입장에서 볼 때 만리장성의 완성으로 중국통일의 과업 또한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지난 3월 어느 날 서울 송파구 한 호텔에서 열린 국제외교안보포럼 정례 조찬포럼에 체육부장관을 역임한 이세기 전 통일부장관이 참석했다. ‘시진핑 시대의 한중관계 변화 전망’을 주제로 한 강연을 위해서다.

     이 날 주제 강연에 앞서 이 전 장관은, 참석자 중에 제주도에서도 올라온 회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발표에 앞서 제주에서 오신 분이 계신다고 하니 잠시 제주도 얘기를 하겠다”며  또 다른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진시황과 불로초, 그리고 제주도에 공력을 기울여 건립한 ‘서복공원’에 얽힌 유래와 오늘의 중국 실력자들과 연계된 흥미로운 이야기 였다.

     특유의 정제되고도 구수함이 담긴 말투에 옛날이야기라도 하듯 술술 이어지는 얘기에 빠져들면서 불현듯 우리의 원대한 목표인 통일대장정에 중국과 중국인들과의 이런 인연(因緣)의 연결고리를 잇대게 한다면 후일 결정적 시기가 도래할 시 얼마나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목표달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  한중친선협회장으로 중국을 잘 알고, 폭넓은 인맥구축으로 중국의 최고 실권자인 시진핑(당총서기) 국가주석과도 연을 쌓아 개인적 교분을 나누고 있는 이 전 장관은 제주도에 ‘서복공원’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전개해 나갔다. 

     보따리를 풀어가면서 우스갯소리이기도 하겠지만 이 전 장관과 인연을 맺은 현 중국의 실력자 중 한국을 방문하고, 제주도 서복공원을 다녀간 사람치고 중앙의 고위 공직으로 등용되지 않는 이가 없다고 말해 한바탕 웃음이 일기도 했다.

     진시황, 그는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의 황제로 당대 최고의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로 정복(征服)의 절대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왕들과는 달리 여자를 멀리하고 자신을 절제하면서 초인적인 일을 처리한 불세출의 황제였다. 하지만 공과(功過)가 있게 마련이듯 그   또한 한편으로 신하에 대한 의심과 폭정으로 숱한 목숨을 앗아가게 해 또 다른 단면을 일깨우게 한 폭군이기도 했다.

  •  진시황은 전국을 천하통일하고 ‘무병장수’의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위해 신하들에게 불로초(不老草)를 구해오게 했다. 그리고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신하들은 그대로 죽음으로 내몰았다.

     당시 관직에 있던 서복(산동성 출신)도 황제의 명을 받게 될 것임을 알고 미리 진시황에게 자진해 나아가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불로초는 중국에는 없고 동방의 나라 남쪽 섬에 가면 구해올 수 있습니다”하면서 “수척의 배와 동남동녀 각 500명을 지원해 주십시오”하며 지금으로부터 2222년 전 선단을 이끌고 남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진남포를 거쳐 인천을 경유 목포, 그리고 제주도 서귀포에 이르게 되었다고 이어갔다.

     그러면 당시 ‘불로초’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제주도에 도착한 서복은 상당기간 한라산 등지에 머물며 불로초(?)인 한라산 영지(버섯)와 당귀 같은 자생 약초를 구해(추사 김정희 고증에 의하면) 서귀포를 떠났고, 이런저런 영향으로 ‘서귀포’란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이 같은 서복의 당시 행적에 대한 미세한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제주도에 ‘서복공원’을 만들게 된 배경을 “중국과 수교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 등 많은 중국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해 예외 없이 제주도를 방문하는 것을 보고 ‘왜 제주도를 좋아할까’ 나름대로 탐문해보니 결국은 서복 선생의 불로초와 무관치 않아 보였고, 전설상의 얘기인줄 알았지만 사마천의 ‘사기’ 등 여러 가지 자료를 확인해보니 확실한 역사적 사실, 팩트임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상의 사실관계임을 강조했다.

  •  하여 한중협력관계 증진과 제주도의 살 길이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는 길임을 알고 서복의 흔적을 남기기로 마음먹고 서복공원을 만들기 위해 강연과 토론회 등을 개최하게 되었다고 배경을 소개했다.

     하지만 좀처럼 (제주도의) 반응이 없고 어려움도 많아 고심하던 중 자신이 국회 문공위원장으로 재직하게 되면서 문화부와 상의하고 예산을 조금씩 반영해 제주도와 협력을 통해 지금의 정방폭포 위쪽 6000여 평 부지에 ‘서복공원’을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서복 공원 탄생의 일등 공로자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원을 만들고 이름은 붙여졌지만 몇 번을 가 봐도 중국 냄새가 나지 않아 궁리를 하다 중국 방문길에 산동성 성장을 만나 서복공원 얘기를 나누고 관련 자료를 주면 어떻겠느냐 협조하여 2008년 4월 서복의 돌 조각상을 중국에서 만들고(높이 4.2미터 규격), 중국 배를 이용, 수송케 하고 산동성 도움으로 전시물을 채워 가면서 지금의 공원이 되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같은 해 11월 원자바오(溫家寶) 당시 총리가 방한 시 현판 휘호를 받기 까지 에피소드를 곁들이면서 원자바오 총리가 약속대로 귀국 한 달 후 친필 휘호를 보내와 중국 방문 길에 휘호를 갖고 다시 산동성으로 가 성장의 협조로 태산에서 캐낸 바위(높이 2.5미터, 무게 20톤)에 공원 명칭을 조각해 직접 배에 실어 보내고, 제막식 때에는 우리나라 문화부장관은 참석하지 않았어도 중국 문화부장관은 참석해 성황리에 행사를 마치게 해 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진핑 주석과의 일화도 소개했다. 2005년 4월 중국 절강성에서의 특강을 위해 방문했다가 성 정부의 큰 행사에 참석해 당시 성의 서기이던 시진핑 주석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그가 7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복공원 얘기를 하자 ‘제주도를 보고 싶다’고 해 그의 방한 시 동행해 안내했더니 무척 감동을 받고 갔는데 얼마 안 돼 상해 시 서기로 승진하고 다시 북경에서 일인자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때는 시진핑이 그렇게 높이 될 줄 몰랐다고 전하기도 했다.

  •  이세기 전 장관은 발언 말미에 자신이 ‘서복공원’을 꺼낸 이유는 “중국 관리들이 우리나라에 와 ‘서복공원’을 보고가면 승진하고 그러다보니 중국 관리들이 한국에 오면 꼭 ‘서복공원’을 가보고 싶어 한다”고 말해 좌중에 박수와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예로, 공원조성에 적극 지원 했던 산동성 성장이 얼마 전 국토자원부 장관으로 승진하고, 제막식 때 문화부장관으로 참석한 이도 당시 대외연락부 부부장 때 서울 출장 왔다가 ‘서복공원’에 다녀왔다가 됐고, 7인 상무위원 중 한사람인 류윈산 위원도, 시진핑 주석도 동일한 과정을 겪은 사실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이세기 전 장관은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광서성 계림시 서기가 와서 같이 만나 친해졌다. 이 친구가 귀국하더니 지금은 공안부장관이 되었다. 중국 공안부장관은 경찰과 검찰 등 정보기관을 다 거느린다. (웃으면서) 그가 한국 와서 나를 만나고 가서 올라간 것 같다. 서복공원을 만들어 중국 친구들과 더 많이 만나고 (문제가 있을 경우) 당당하고 떳떳하게 훈계도 하고 자유스럽게 얘기를 나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해도 중국인들은 섭섭해 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말을 한다“고 했다. 그만큼 친분이 두텁다는 말도 되겠지만 믿음을 준다는 의미도 포함될 것이다.

     대한민국 주도의 자유 민주 통일과정에서 중국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중국과 수교 20년째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요 중국 입장에서도 한국은 세 번째 교역국이다. 섣부른 단정이야 할 필요도 없겠지만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 중국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감지되고 있다.

  •  이런 시기에 정부는 정부차원에서의 대중외교도 강화해야 하지만 민간차원에서의 교류와 협력과 같은 민간외교력 발휘 또한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중국 지방정부와 긴밀한 협조를 통해 관련 자료와 석상 등을 중국에서 직접 제작, 수송을 통한 제주도 ‘서복공원’ 조성과 전시, 중국 내 저명인사들과의 교분은 개인적 친소차원을 떠나 결정적 시기 자유민주통일을 위해서도 큰 족적으로 보여 진다. 우리사회 전반에 이런 역할들이 더 크게 연계되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서복[徐福]

    중국, 진대의 방사(方士). 제나라(산동성) 출신. 제나라에 전해지는 신선설을 진시황제에게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동해중의 삼신산에 선인이나 불사의 선약을 구하는 탐험에 원조를 받았다. 어린아이 수천명을 데리고 항해하는 것 외에, 후에는 해신 과 싸운다고 해서 병사도 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219년과 210년 두 차례에 걸쳐 친황다오를 출발해 서귀포에 잠깐 들른 후 일본에 정착해 돌아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그는 해상에 널리 펼쳐진 토지를 발견하고 그 땅의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현오(칼럼리스트 / 객원기자. holeekv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