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秉喆의 재미와 흥미

    李 회장은 "나는 똑 같은 일을 하라고 하면 정말 싫어!"라고 했다.

    趙甲濟    

       1983년 12월3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李秉喆 삼성그룹 회장은 조선일보 논설고문 鮮于煇(선우휘)씨와 오랜 시간 對談(대담)을 하였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을 확대하고 있을 때였다. 月刊朝鮮 기자이던 나는 이 對談을 정리하여 1984년 1월호에 실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李 회장의 先見力(선견력)과 애국심,
    그리고 창조적 기업가 정신에 새삼 감탄한다.
      


  •    그는 자신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재미 삼아 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가정에 돈이 많아 돈을 꼭 벌어야 할 사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놀기는 심심하고 갑갑하고. 그래서 사업을 하였는데, 이게 재미 있더란 말입니다. 재미, 그래서 재미 있게 살기 위하여 사업을 한 셈입니다."
      
       그는 "한 십년쯤 사업을 하고 나니까 해방이 되어 이제는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사업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 7~8년이 지나니 이제는 나라에도 도움이 되고 人類(인류)에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뭐 돈에 욕심이 있다, 삼성을 키워야겠다, 그런 욕심이 없어졌어요. 나라 전체를 위하여 도움이 된다면 微力(미력)이나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현재 갖고 있어요. 제가 회의 때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삼성이 중요하냐, 국가가 중요하냐. 국가가 중요하다. 국가가 부흥하면 삼성 같은 건 망해도 또 생길 수 있다. 국가가 망하면 삼성은 영원히 없어진다. 그러니 국가가 우선이다. 그걸 투철하게 생각합니다."
      
       인터뷰 당시 73세이던 李秉喆 회장은
    "새로 사업을 시작할 때가 가장 신이 나고 재미 있다"고 했다. 
     
      
       "뭘 새로 창조한다는 것이 그렇게 재미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 건 저의 本能(본능)인 것 같습니다. 지금 시작한 반도체처럼 처음 사업을 할 때는 저녁에도 그 생각, 자고 일어나서도 그 생각, 뭣이 부족한 것이 없나, 있으면 보강하고 물어보고, 회의를 해서 안되는 게 있느냐 또 알아보고 일을 맡기고, 계속 뒤를 체크하면서 전체를 展望(전망)해가면서 일을 하지요. 그런데 만들어놓은 회사에서 뭐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짜증이 납니다. "
      
       李 회장은 "나는 똑 같은 일을 하라고 하면 정말 싫어!"라고 했다. 그는 "몰입하던 새 사업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보고를 받으면 그 뒤론 관심이 사라지고 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고도 했다.
    새로움에 대한 흥미, 일을 재미로 하는 것은 천재들의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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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6월27일 있었던 李秉喆과 朴正熙의 만남은
    한국 현대사를 바꾼 역사적 인연,
    즉 군인과 기업인의 협력을 상징한다.

      
      

  •    삼성물산 사장 李秉喆은 회고록에 1961년 6월27일 군사정부의 실력자 朴正熙 부의장과 나눈 대화를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는 부정 축재자 11명의 처벌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부정 축재 제1호로 지목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 것인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朴 부의장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 주십시오”라고 재촉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소신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朴 부의장은 뜻밖인 듯 일순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세를 했다고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러나 현행 세법은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戰時(전시) 비상사태하의 稅制(세제) 그대로입니다. 이런 세법하에서 세율 그대로 세금을 납부한 기업은 아마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만일 도산을 모면한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朴 부의장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액수로 보아 1위에서 11위 안에 드는 사람만이 지금 부정 축재자로 구속되어 있지만 12위 이하의 기업인도 수천, 수만 명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도 똑같은 조건하에서 기업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들도 모두 11위 이내로 들려고 했으나 역량이나 노력이 부족했거나 혹은 기회가 없어서 11위 이내로 들지 못했을 뿐이고 결코 사양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선을 그어서 罪의 유무를 가려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사업가라면 누구나 이윤을 올려 기업을 확장해 나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업을 잘 운영하여 그것을 키워 온 사람은 부정 축재자로 처벌 대상이 되고 원조금이나 은행 융자를 배정받아서 그것을 낭비한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한다면 기업의 자유경쟁이라는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부정 축재자 처벌에 어떠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朴 부의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 生計를 보장해 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 운용, 국민 교육, 도로 항만 시설 등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부정 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 위축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장 稅收(세수)가 줄어 국가 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 건설의 一翼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압니다.”
      
       朴 부의장은 한동안 내 말을 감동 깊게 듣는 것 같았으나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국가의 大本(대본)에 필요하다면 國民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동안 실내는 침묵에 빠졌다. 잠시 후 미소를 띤 朴 부의장은 다시 한 번 만날 기회를 줄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거처를 물었다. 메트로 호텔에서 연금 상태에 있다고 했더니 자못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튿날 아침 이병희 서울분실장이 찾아오더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다른 경제인들도 전원 석방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부정 축재자 1호인 나만 호텔에 있다가 먼저 나가면 후일에 그 동지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나도 그들과 함께 나가겠다”고 거절했다>(《호암자전》)
      
       朴正熙는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李錫濟를 불렀다.
      
       “경제인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정신 차렸을 텐데 풀어주지.”
      
       “안 됩니다. 아직 정신 못 차렸습니다.”
      
       “이 사람아, 이제부터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면 국민을 배불리 먹여 살려야 될 것 아닌가. 우리가 以北만도 못한 경제력을 가지고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래도 드럼통 두드려서 다른 거라도 만들어 본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아닌가. 그만치 정신 차리게 했으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국가의 경제 부흥에 그 사람들이 일 좀 하도록 써먹자.”
      
       이석제는 朴 부의장의 이 말에 반론을 펼 수 없었다. 다음날 이석제는 최고회의 회의실에 석방된 기업인들을 모아 놓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차고 있던 큼지막한 리볼버 권총을 뽑아들더니 책상 위에 꽝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고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여러분들을 석방시키는 일에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朴 부의장께서 내놓으라고 하니 내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원조 물자, 국가 예산으로 또 다시 장난치면 내 다음 세대, 내 후배 군인들 중에서 나 같은 놈들이 나와서 다 쏴죽일 겁니다.”
      
       6월 29일 아침 李秉喆 사장이 묵고 있던 메트로호텔을 찾아온 이병희 정보부 분실장은 기업인들이 전원 석방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병철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박정희의 유연한 정신세계와 겸손한 자세, 그리고 私心이 적은 태도가 그로 하여금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우게 했다. 실천력을 중시하는 박정희는 이론에 치우치는 학자나 신중한 관료들보다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기업인들과 더 잘 호흡이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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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기적> 2시간짜리 演劇이 2분 만에 끝났다!
    곯아떨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한 '최초의 연극'
     
    金泌材
      

  •    대학로 ‘알과 핵’ 소극장에서 24일 ‘극단 민중’의 정진수 작/연출의 ‘한강의 기적’을 관람했다.
      
       5.16 軍事革命을 배경으로 朴正熙, 鄭周永, 李秉喆 3인을 주인공으로 대한민국 근대화의 역사적 배경과 경제성장과정을 다큐 형식으로 공연한 연극이다.
      
       연극 관람에 앞서 극단 이름에 ‘민중’이란 단어가 거슬렸다. 혹시 이 연극이 朴正熙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을 희화화(戱畫化) 한 左派 연극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 같은 우려는 연극 시작과 함께 불식됐다. 러닝타임 2시간이 2분처럼 짧게 느껴졌다.
      
       중간에 곯아떨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 관람한 연극은 ‘한강의 기적’이 처음이다. 스토리도 간결하고 명쾌하다. 군더더기가 없어 이해도 쉬웠다. 나를 위해 만든 연극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코믹한 장면도 많고, 간혹 눈물 나는 장면도 있었다.
      
       연극의 줄거리는 가감(加減) 없이 歷史 속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다. 나라 없는 불우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꿈을 실현해간 文明建設者들의 이야기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배경막 영상으로 세 인물의 얼굴사진이 나란히 투영된다. 무대 중앙에는 평범한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다. 탁자 앞으로 커다란 나무함이 가로놓여 관객의 주목을 끌지만 등장인물이 가끔 주저앉는 의자구실 외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다. 무대 좌우에 등퇴(登退)장 문이 만들어져 있고, 무대 왼쪽 중간에도 登退場路가 마련되어 있다.
      
       연극 시작과 함께 대통령 비서관 역의 정한용 씨가 등장해 5.16 발발 전후의 시대적 상황과 인물소개, 그리고 극의 흐름을 관객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어 군복을 입은 박정희 장군이 무대에 등장하고, 배경에 5.16군사혁명 영상이 투사된다.
      
       무기력한 장면(張勉) 정권을 무너뜨린 朴正熙는 제일 먼저 不正蓄財 기업인들을 구속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일본에 체류 중이었던 李秉喆은 전 재산을 헌납한다는 성명을 내고 자진해서 귀국해 朴正熙를 만난다.
      
       최초로 대면한 두 사람은 기업인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공장을 지어 국가에 헌납(獻納)토록 하는데 뜻을 같이한다. 朴正熙는 무리한 通貨改革으로 경제정책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그러나 특유의 집념과 용기 그리고 헌신으로 마침내 1964년 수출 1억불을 달성한다.
      
       이에 고무(鼓舞)된 朴正熙는 鄭周永과 손잡고 소양강 댐 건설을 비롯,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조선(造船)사업에까지 뛰어든다. 鄭周永과 善意의 경쟁관계에 있던 李秉喆은 電子産業을 일으켜 삼성전자의 기초를 닦는다. 반면 거의 같은 시기 경제개발을 추진했던 북한의 김일성은 참담한 실패를 거듭하면서 남침적화(南侵赤化)야욕을 드러내고, 안보위기를 조성한다.
      
       雪上加霜으로 미국의 對한반도 정책은 바뀌어 주한 美7사단이 철수하고 中東戰爭이 일어나 세계적인 석유 위기가 도래한다. 朴正熙와 기업인들은 중동진출과 중화학공업 개발을 통해 前代未聞의 돌파구를 마련, 1977년 수출 1백억 불 달성 및 국민소득 1천불 시대를 연다. 그리고 1979년 늦가을, 朴正熙 대통령은 수하의 흉탄에 쓰러진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안 되는 20대, 현실에 묻혀 바쁘게 살아가는 30대, 좌경화(左傾化)된 역사인식을 갖고 대한민국이 하루빨리 뒤집어지길 바라는 386세대,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달성하고 이제는 황혼으로 접어든 60대 이상 기성세대.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코드는 무엇일까? 연극 ‘한강의 기적’을 보면 답이 나온다.
    바로 朴正熙, 鄭周永, 李秉喆 세 위인의 포기하지 않는 ‘오뚝이 정신’이 아닐까!
      
       이들 세 위인들도 인간이었기에 때로는 갈등하고 반목하고 사욕을 탐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협력하고 인내하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었다.
      
       박정희의 ‘하면된다’는 불굴의 정신, 정주영의 ‘해봤어?’의 도전정신, 이병철의 ‘맡겼으면 믿으라’는 신념과 원칙이 일궈낸 결과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이들은 이제 歷史 속의 人物이 됐다. 그러나 이들은 큰 교훈을 남기고 떠났다. 惡化가 良貨를 驅逐한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을 낙담하지 말라고 하는 듯하다. 현재를 사는 우리 개개인이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자, 남북통일의 주체임을 연극 ‘한강의 기적’은 일깨워주고 있다. 
          
       <공연 안내>
          5ㆍ16 혁명 50주년 기념 역사기록극 <한강의 기적: 박정희와 이병철과 정주영>
          기획: 민중극단
       일시: 2011년 5월13일부터 29일까지
       장소: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알과핵 소극장(1-140번지)
       시간: 평일 8시 / 토 3시, 6시 / 일 3시 (5월17일, 23일은 공연 없음) 
          * 공연문의: 02-532-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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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년 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자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 신문이 <정주영 회장은 하루 네 시간씩만 자고도 정력적으로 뛴다>는 요지의 보도를 하였다. 한 측근이 그 신문을 鄭 회장에게 보여주었다. 鄭 회장이 기사를 읽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루에 여섯 시간은 자야 일이 되는 사람이에요. 하루에 네 시간밖에 안 잔다는 자는 病者가 아니면 사기꾼입니다. 그런 자와는 절대로 동업하면 안 됩니다."
      
       鄭 회장은 모자라는 잠은 車中에서 보충하였다고 한다. 차만 타면 1분 안에 단잠에 들었다. 한 측근이 그 비결을 물었더니 鄭 회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차창 밖 경치는 매일 보는 건데 그걸 왜 또 봐요? 눈을 감고 잠이나 자 두는 게 낫지."
      
       흔히 나폴레옹이 하루에 네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평소에는 하루 8시간씩 충분히 잠을 잤다. 일찍 일어나면 측근들로부터 정보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명령을 구술하곤 했다. 그는 하루 평균 15통의 명령을 구술했다. 아침에 집중적으로 일을 했다. 다만 전투중일 때는 잠을 줄였다고 한다.
      
       잠 안 자면서 일한다는 사람처럼 미련한 인간은 없다. 밤에는 잠을 안 자고 일하지만 모자라는 잠을 낮에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잠이 모자라면 心身이 피로하여 정상적인 思考와 업무를 할 수가 없다. 하루에 네 시간씩밖에 안 잔다고 자랑하는 이들을 조심해야겠다.
      
         ―실제로 조난당한 일도 있었지요?
      
       『한 번 사고가 났어요. 바로 그 필리핀 앞바다에서 조난을 당했는데, 우리는 대만에서 헬리콥터를 빌어 추적을 했지요. 철구조물은 해류를 타고 흘러 당초 예상했던 대로 대만 근해에서 찾아냈지요. 그걸 다시 실어 중동으로 떠났어요. 보험에 들어도 그 이상의 무슨 수가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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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明博 회장, 鄭周永을 평하다!
     
      "나는 오너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런 전문경영인과는 달랐습니다. 鄭회장도 그런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나에게 그토록 중책을 오랫동안 맡겼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관계를 지나치게 종속적인 관계로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요." 
         
       *2001년 5월호 월간조선 /   李淸 소설가
          

  •    鄭周永은 누구였나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前 명예회장(이하 「鄭회장」으로 약칭)이 작고하자 우리 사회는 「한 시대가 갔다」는 느낌과 아울러 「영웅을 잃었다」는 감회로 술렁거렸다. 그와 함께 「鄭周永은 누구였나」하는 의문을 던져놓고 대답을 마련하기 위해 골몰해 있다. 이럴 때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李明博(이명박·60) 前 의원(이하 「李회장」으로 약칭)이었다.
      
       현대가 중소기업이던 시절에 사원으로 입사하여, 현대건설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을 때는 아들도 형제도 아니면서 어느덧 현대건설의 회장으로 浮上(부상)하여 鄭명예회장과 二人三却(이인삼각)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던 인물. 鄭회장의 어떤 아들, 형제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더 오래 기업을 함께 했던 인물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10년 전에 이미 현대와 鄭회장을 떠난 몸이라 「객관적 시각」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때문에 鄭회장이 작고하자 「鄭周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李明博일 것」이라는 판단으로 매스컴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李회장은 오히려 곤혹스러워했다. 「누구보다 鄭회장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데에는 동의했으나 『지금 이 시점에서 鄭회장 얘기를 하기에는 미묘한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매스컴을 기피해 왔다.
      
       그러나 꼭 이야기를 듣자고 한다면 『鄭회장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역사에 맡기고, 지금은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생전의 행적을 되돌아보자』는 정도로 말문을 열었다. 이 글을 위한 만남도 그런 식으로 약간의 실랑이 끝에 이루어졌다. 
          
       『위대한 벤처기업인… 그러나 21세기가 열리기 전에 그의 역할은 끝났다』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돌파력, 이것이 鄭회장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그게 잘못됐습니다. 사람들은 鄭회장을 가리켜 「무모할 정도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기업인」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鄭회장에 대한 왜곡된 편견입니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면 한두 번이야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30년 동안 그랬겠어요?』
      
       ―밀어붙이는 뚝심을 빼면 鄭회장에게 무엇이 남습니까?
      
       『그 대답에 앞서 鄭周永 회장이 어떤 사람이고 그가 역사적으로 이루어놓은 일이 무엇인지 좀 살펴봅시다. 시대적으로 鄭회장은 20세기 산업사회를 살아온 사람이고 21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사라진 사람입니다. 즉 21세기가 열리기 전에 이미 「기업인 鄭周永」의 역할은 끝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가 농경시대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하고 개화하는 데 주역을 맡았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그것을 체질 속에 익힌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배운 것이라고는 농사 짓는 경험 조금 가지고 산업사회를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오늘날의 그 어떤 벤처기업인보다 더 벤처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젊음, 그의 판단력, 그의 무서운 결단력과 용기, 이런 덕목들은 육체적으로 쇠잔해지지 않았다면, 즉 鄭회장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았다면 그 정신과 그 용기 가지고 21세기의 정보화시대에도 똑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시대가 낳은 요행의 산물도 아니었고, 그냥 밀어붙이는 우직한 용기 하나 가지고 일어난 사람은 더구나 아니었습니다』
      
       李회장은 우선 「鄭周永의 시대」 「鄭周永의 삶」을 그 역할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시기는 鄭회장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기업을 이루고, 그 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시킴과 동시에 한국 경제를 힘차게 견인한 동력으로서의 시기다. 두번째는 鄭회장이 사실상 기업을 자식들에게 쪼개어 분할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政界에 뛰어들어 참패를 맛보는가 하면 소떼를 몰고 고향을 방문하고 북한과의 교류에 힘을 쏟던 말년이다.
      
       이 두 가지 역할은 「인간 鄭周永」이라는 동일인물이 중심이 되어 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성질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 李회장의 분석이다.
      
       앞의 일이 鄭회장의 본분사였다면, 뒤의 일은 70代 고령으로 몇 발 물러난 이후의 일이므로 동일선상에서 논하는 것은 공평치 못하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말년에 鄭周永이 보였던 몇 가지 행태를 가지고 鄭周永이라는 큰 산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李회장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鄭회장의 본분사」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또한 李회장 자신과 鄭회장이 함께 걸었던 그 세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세월에 鄭회장은 대체 무슨 힘으로 그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던가. 뒷날 「王회장」 혹은 「황제」라 불리기도 했던 그 막강한 카리스마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대답은 역시 「밀어붙이는 힘」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인데 李회장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한다. 
       
          『神話엔 진실도 교훈도 없다』
      
       『李秉喆(이병철) 회장은 매우 치밀한 경영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鄭周永 회장은 무모한 모험가로 흔히 대비되곤 합니다. 만약 李秉喆 회장이 치밀하기만 하고 결단력과 모험심이 없었거나, 鄭周永 회장이 무모한 모험심만 있고 치밀하지 못했다면 두 사람 다 오늘의 삼성과 現代라는 거대한 기업집단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고, 국가 경제 발전에 끼친 공로도 별 것 아니었을 것입니다.
      
       鄭회장의 「신화」에 빠질 수 없는 몇 대목이 모두 도박과 같은 모험과 배짱, 그리고 밀어붙이기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돈 500원짜리에 찍힌 거북선 그림을 가지고 영국 로이드은행 사람들을 설득시켜 거액의 차관을 빌어왔다거나, 서산간척지 공사의 최종 물막이공사 때 낡은 유조선을 들이대어 성공시킨 일이라든가… 그런 것들은 과정을 보지 않고 결과만으로 신화를 만든 것일 뿐입니다.
      
       그 이면에는 무서울 만큼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바로 보지 않고 신화 같은 얘기에만 매달리면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차관을 빌거나 공사를 따거나, 또는 공사를 성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화는 될지언정 교훈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 그럼 진실은 무엇입니까?
      
       『무모해 보이는 배짱 뒤에 숨어 있는 치밀함입니다. 영국은 세계 금융의 중심입니다. 그 나라의 은행들이 극동에서 온 이름 없는 사업가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줄 때는 사업 타당성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있은 후에야 가능합니다. 즉 로이드 은행은 500원짜리에 찍힌 거북선 그림 때문에 鄭회장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鄭회장과 함께 간 전문가들이 기술적, 상업적으로 완벽한 계획서를 제시하고 설명을 하여 그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었기에 빌려준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을 결과만 가지고 「500원짜리 거북선의 신화」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 신화가 진실이라면 반대로 거북선 그림만 보고 동양에서 온 이름 없는 사업가에게 거액을 내 준 로이드 은행은 뭐가 됩니까. 봉이 된 것 아닙니까. 일에는 상대가 있는 법입니다. 鄭회장의 「밀어붙이기 신화」와 관련된 상대를 봐야 합니다. 상대가 그렇게 어수룩한 존재들이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비로소 鄭회장의 행적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