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갑 부대변인, 논평 통해 '페스카마 15호 선상반란 사건' 재조명
  • “‘페스카마15호’ 사건 가해자들도 동포로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박재갑 새누리당 선대위 부대변인은 17일 논평을 통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과거 발언을 소개했다.

    1996년 8월 2일, 남태평양 해상에서 모두 11명이 목숨을 잃은 국내 최악의 선상살인사건으로 기록된 '페스카마 15호'사건의 항소심 당시 문재인 변호사가 한 말이다.

    이에 대해 박재갑 부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사건은) 재중동포 선원이 한국인 간부 선원 7명 등 모두 11명을 흉기와 둔기로 잔인하게 살해한 후 시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던 엽기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범은 대법원에서 선고했던 사형이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 12월 31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당시 문재인 변호사는 '결과적으로 변론이 결실을 봤다'고 했지만, 박재갑 부대변인은 "변론을 잘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심각하게 주목하는 것은 문재인 후보의 인권에 대한 의식"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후보에게 묻고 싶다.
    11명이나 무참히 살해된 사건의 살인범은 가해자를 동포로써 따뜻하게 품고,
    대한민국의 건강한 여성은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억지 둔갑시켜 야멸차게 인권을 유린하는가?"

  • 전날인 16일 마지막 대선 TV토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이렇게 물은 바 있다.

    "문재인 후보는 선장과 선원을 잔인하게 살해한 페스카마호 조선족까지 변호할 정도로 인권의식이 높다고 들었다.

    (그런데) 국정원 여직원 사태에서 발생한 여성 인권침해에 대해 한마디 말씀도 없으시고, 사과도 하지 않으셨다."

    박재갑 부대변인은 이런 말도 했다.

    어제 밤 TV토론에서 '국정원 여직원 습격사건'의 불법 미행, 2박 3일간의 감금 등 28세 여성의 삶을 황폐화시킨 인권유린에 대한 문 후보의 발언을 모든 국민들이 지켜봤다.

    더욱이, 우리는 '피해자'를 '피의자'로 억지 둔갑시키는 문 후보를 TV화면으로 지켜보았기에 "그의 '인권의식'에 심각한 오류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민주당과 문 후보는 국가최고 정보기관을 선거에 개입시켜 영향을 미치려던 시도가 얼마나 큰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인지 가슴깊이 깨닫길 바란다.


    ※ 페스카마 15호 선상반란 사건?

    - 전경웅 기자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11083 <기사 참조>

    1996년 6월 7일 부산 남항에서 온두라스 국적 294톤급 원양어선 ‘페스카마 15호(이하 페스카마호)’가 남태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배에는 선장 최기택 씨, 갑판장 강인호 씨, 기관사 박종승 씨, 조기장(기관실 책임자) 김창열 씨, 조리장 서장주 씨, 기관장 김신일 씨, 기관사 이인석 씨 등 한국인 선원 7명과 인도네시아 선원 10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한국인 선원은 조리장과 기관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30대 초중반의 혈기왕성한 청년들이었다. 90년대는 한국 어선에 탈 선원이 크게 부족해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태울 때였다. 선장 최 씨에게는 첫 출항이어서 의욕이 넘쳤다고 한다.

    페스카마호는 한국을 출발한 지 1주일 만에 티니안 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조선족 선원 7명을 태웠다. 이등항해사 전재천 씨와 박군남, 최금호, 최일규, 이춘승, 백충범, 최만봉 씨 등이 그들이다.

  • ▲ 선상반란 이후 한국으로 예인된 '페스카마15호'.
    ▲ 선상반란 이후 한국으로 예인된 '페스카마15호'.

    이 배에 조선족이 타게 된 건 인도네시아 인들을 선원으로 채용한 것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여기다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은 위험한 참치잡이 조업을 할 때나 항해 중에도 상당히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도 작용했다.

    페스카마호는 남태평양에서 본격적인 조업을 하기 전에 마지막 휴식을 취한 뒤 7월 16일 출항했다. 목적지인 미국령 피닉스섬 인근에 다다른 페스카마호는 6월 27일 첫 조업을 시작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됐다. 조선족 선원들은 배를 타본 경험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족 선원들이 일을 서투르게 하자 선장 최 씨가 조선족 선원들을 불러 모으고, 그 중 이춘승 씨를 쇠파이프로 구타하려 했다. 이 씨는 최 씨가 휘두른 쇠파이프를 피하다 어깨에 한 대를 맞자 그대로 선장의 뺨을 친 뒤 갑판에 있던 참치 처리용 칼을 들고 대치했다.

    이에 한국인 선원과 조선족 선원들은 서로 칼과 몽둥이, 도끼 등을 든 상태로 대치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족 선원들은 조업을 거부한 채 “육지에 내려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주범으로 알려진 전재천 씨가 양 측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맡았고, 조선족 선원들은 폭행과 폭언을 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선장 최 씨가 사과하고 조선족 선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대치 상황은 끝났다.

    하지만 한국인 선원들의 폭언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생존자 이인석 씨도 “선원들의 생리, 작업 특성상 폭언은 있었지만, 폭력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 대치로 감정의 골이 생긴 한국인 선원과 조선족 선원 간의 갈등은 아물지 않았다. 90년대 소형 원양어선의 특성상 강도 높은 근로조건에 대해서도 조선족 선원들은 불만이 컸다고 한다. 이에 조선족 선원들은 매일 1~2명 씩 ‘몸이 아프다’며 조업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월급을 받는 조선족 선원, 인도네시아인 선원과 달리 한국인 선원들은 어획량에 따라 돈을 받기에 양측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졌다고 한다.

    결국 조선족 선원들 중 5명이 “배에서 내리겠다”고 요구했다. 한국인 선원들은 7월 30일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들 모두 배에서 내릴 것을 명령했다.

    이때 선장 최 씨가 조선족 선원들을 불러 하선을 위한 ‘징계 명령서’에 지장을 찍게 했는데, 그 내용은 ‘선상 반란 및 조업거부 등으로 하선한다. 사모아 항까지 가서 하선하는데 드는 비용은 조선족 선원들이 부담한다’고 돼 있었다고 한다.

    이 내용을 본 조선족 선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한국 원양어선을 타기 위해 엄청난 거액을 지불한 상황인데 돈을 벌기는커녕 비용까지 물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자 “다시 일을 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배는 이미 사모아 항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조선족 선원을 대신할 선원들도 사모아 항에 대기 중이었다.

    이에 조선족 선원들은 한국인 선원들을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수원토막살인사건’ 같은 잔혹 연쇄살인

    조선족 선원들은 이제 고향에 돌아가면 빚더미에 앉게 됐다며 신세한탄을 하다 모든 책임이 한국인 선원들 탓이라는 데로 모아졌다고 한다. 이들은 배가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기관사 이인석 씨를 제외한 모든 선원을 살해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 ▲ 페스카마 15호 선상반란사건을 '재조명'한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장면.
    ▲ 페스카마 15호 선상반란사건을 '재조명'한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장면.

    이어 조선족 선원들은 각자 숨겨놓았거나 갑판에 있던 흉기를 꺼내 들었다. 전 씨는 한국인 선원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렸다 한 명씩 조타실로 불러 살해했다. 첫 대상은 선장 최 씨였다. 조타실에 대기하고 있던 3명의 조선족 선원들은 최 씨의 배, 목 뒤, 무릎 등을 번갈아가며 찔렀다. 조선족 선원들은 숨진 최 씨의 시신을 바다로 던졌다.

    조선족 선원들은 이런 식으로 갑판장, 기관사, 항해사, 조기장 등 한국인 선원 6명을 살해했다. 그 중 기관사는 산 채로 상어들이 득시글거리는 태평양에 던져졌고, 떨어지면서 배에 매달린 조기장도 흉기로 손 등을 쳐서 바다에 빠뜨렸다.

    이들은 살해 장면을 목격한 인도네시아인 선원을 살인에 가담시키기도 했다. 당시 19살이었던 실습생 최동호 씨의 경우 몸이 아파 누워 있었다. 조선족 선원들은 흉기로 인도네시아인 선원들을 협박해 최동호 씨를 산 채로 바다에 던졌다.

    다음날 ‘선상반란’을 일으킨 조선족 선원들은 인도네시아 선원 3명과 같은 조선족 선원으로 조업에 참여하기로 한 최만봉 씨를 유인해 참치보관용 냉동창고에 가둔다. 하지만 급속냉동기가 가동되지 않아 이들은 살아 있었다. 조선족 선원들은 가둔 4명의 선원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이들 모두를 산 채로 바다에 내던졌다.

    이렇게 11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뒤 ‘선상반란’에 성공했다고 판단한 조선족 선원들은 처음에는 한국으로 밀항하려다 남태평양 인근에서 배를 팔고, 일본으로 밀항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6명이 탈 뗏목까지 만들었다. 이인석 씨와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조선족 선원들이 뗏목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결국 자신들도 그들 손에 죽을 것임을 짐작했다고 한다.

    20여일 뒤 이인석 씨는 같은 편에 선 인도네시아인 선원들과 함께 조선족 선원들을 유인, 참치 창고에 가두는 데 성공한다. 다음 날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이들을 발견,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다.

    문재인 “운명처럼 변호를 맡았다”

    한국 해경에 넘겨진 조선족 선원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우리 사회는 무려 11명이나 살해하고 시신까지 바다에 버린 조선족 선원들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부산지법은 1996년 12월 24일 1심 판결에서 6명의 조선족 선원들에 대해 해상강도살인과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조선족 선원들 측에서 항소, 항고를 계속해 사건 판결은 대법원까지 갔다. 대법원은 주범인 전 씨에게 사형을, 나머지 5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 ▲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을 민통당 후보로 출마한 문재인 변호사가 다른 후보들과 함께 합동유세 중 만세를 부르고 있다.
    ▲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을 민통당 후보로 출마한 문재인 변호사가 다른 후보들과 함께 합동유세 중 만세를 부르고 있다.

    당시 이들을 변호한 사람은 부산변호사회 인권위원장이자 민변 부산․경남 대표였던 문재인 변호사와 조선족 중국인 권덕원 변호사였다.

    문재인 변호사는 2011년 11월 15일자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족 동포들은 조국에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데 우리는 이들에 대해 은연중에 멸시나 깔보는 심리가 있다. ‘페스카마15호’ 사건 가해자들도 동포로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밝혔다.

    문재인 변호사는 이 인터뷰에서 “법정에서 사형이 확정됐지만 우리나라가 10년 넘게 사형집행을 안 해 실질적으로 사형 폐지국이고 전 씨가 2008년 특별감형으로 무기징역을 살게 돼 결과적으로 변론이 결실을 봤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인터뷰를 통해 “페스카마15호 사건은 수사기관의 발표처럼 조선족 선원들이 치밀하게 모의한 것이 아니고 우발적 부분이 있었다. 이때 조선족 선원들이 어로 경험이 없어 일이 서툴렀고 당시 일반화돼 있던 선상 폭력은 ‘평등주의’가 강한 중국 사회주의 문화와 달라 멸시와 모욕으로 받아들이면서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했다”고 변론했다고 한다.

    문재인 변호사는 재판이 끝난 뒤에도 조선족 선원들을 돕는 데 앞장섰다고 한다.

    문재인 변호사는 “죄는 무겁지만 사정이 딱하고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나 가족도 없었기 때문에 부산의 인권단체들이 나섰다. 영치금도 조금씩 넣어주고 중국에 있는 가족을 초청해 교도소에서 만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