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마이산에서 동학교도와 의병 일으켜 싸운 의병장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석용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전북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소’ 의병대장으로 추대됐다. 이후 남원, 전주, 임실 등지에서 활약 중 체포되어 순국했다.

  • 이석용 선생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옛사람들이 충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들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선생은 1897년 8월, 10여 명의 동학교도와 함께 진안 도동서려(桃洞書侶)로 가 학문연마에 전심전력했다. 이후 면암 최익현, 연재 송병선 선생의 영향을 받아 의병을 일으킬 이론적 근거를 세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을 뺏기자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다. 선생은 최익현, 임병찬 등이 주도한 ‘태인의병’에 가담하고자 했으나 최익현 선생 등 ‘12 의사’가 체포되면서 의병대가 해산되자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1906년 가을, 선생은 고광수 등과 1년 동안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다. 1907년 음력 9월 12일 전북 마이산 자락 용암에서 고천제를 지낸 후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라 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진안읍을 공격,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파괴했지만 일본군의 기습으로 의병들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907년 음력 11월 의병을 다시 규합한 선생은, 친일세력인 일진회와 자위단의 처단에 앞장서 임실, 장수, 남원, 함양, 구례 등 전라도와 경상남도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등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키웠다.

    1909년 일제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자 1909년 음력 3월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잠복하였다.

    이후 나라가 완전히 망하자 선생은 ‘의령단(義靈壇)’을 설치해 전사한 의병들을 추모하는 한편 일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12년 겨울에는 비밀결사인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을 조직하여 테라우치 총독과 을사 5적, 정미 7적의 처단,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의 방화 등을 계획했지만 1913년 음력 10월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원수 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며 당당히 재판에 임하였으며 1914년 4월 28일(음 4.4),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사형당해 순국하였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정부에서는 1962년 선생의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