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강영소>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강영소> 선생은
    미국 하와이에서 합성협회, 국민회 등을 조직하고,
    흥사단 간부,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을 맡아
    미국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다.

    <강영소> 선생의 집안은
    부친과 5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해
    가족 4명이 건국훈장에 추서된 독립운동 명문가이기도 하다.  

    <강영소> 선생은 평남 증산에서 1886년 2월 18일 태어났다.

    1903년 증산군 공립소학교를 마치고
    1905년 4월 부친 <강명화>와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민,
    <에와농장>에서 설립한 친목회와 호놀룰루에 설립한 공진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하와이 한인 단체들은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했다.
    이때 선생은 총무, 서기 등을 맡았다.

    1909년 2월 한인합성협회와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가 함께
    국민회를 결성할 때는 양 단체의 합동을 주도했다.

    1910년 2월 미국의 대동보국회와 국민회가 합동해
    <대한인국민회>로 출범한 뒤에는
    하와이 지방총회 총무로 활동했다.

    1910년 10월 미국 본토로 이주한 선생은
    <신한민보>사 총무원으로 일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재무,
    중앙 총회의 서기,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선생은
    1913년 5월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흥사단>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1916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출됐다.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총회에서 직접 관할하도록 하고,
    국어교육 강화, 새 이민자 관리, 실업부 설치 등의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일제 편을 든 미국인 <스티븐스>를 살해한 혐의로 형을 살던
    <장인환> 의사의 석방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선생은 독립운동 진영과의 연락과 행동 통일을 위해 하와이로 떠났다.

    선생은 <황사용>과 함께
    하와이의 <국민회>와 <독립단>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1920년 1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이 되어
    교포사회의 결집과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1923년 시카고로 이사한 뒤,
    임시정부 재정후원회 위원,
    <신한민보>사 시카고 지국장 등으로
    10여 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다 1934년 8월 26일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2011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다.

    선생의 집안도
    부친과 5형제가 모두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쳐,
    부친 강명화 선생과 동생 강영문 선생은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
    동생 강영각 선생은 1997년 건국포장을 서훈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