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 “2005년 6월 ‘530GP사건’, 당시 靑서 정치적으로 조작”김형태 의원, 국감서 “530GP사건의 범인, 김동민 아닐 수도 있다”
  • 22사단 동해선경비대가 ‘뚫린’ 것을 놓고 우리 군의 경계태세를 질타하는 소리가 높다. 그런데 최근 530GP 사건도 북한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530GP 주변에서 '땅굴 탐침'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새로 확인됐다. 

     

    국정감사장에 등장한 530GP 사건

     

    2012년 10월 17일, 국방부 국정감사장. 국방위 소속 김형태 의원이 지난 2일 육군 22사단 동해선경비대에서 발생한 ‘노크 귀순’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530GP 사건도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김형태 의원(왼쪽, 무소속)이 '530GP'라는 책을 들어보이며 김관진 국방장관에게 질의하고 있다.
    ▲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김형태 의원(왼쪽, 무소속)이 '530GP'라는 책을 들어보이며 김관진 국방장관에게 질의하고 있다.

    “노크 귀순은 우리 군의 경계태세와 보고체계에 있어 총체적 부실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2005년 6월 19일 530GP 사건 또한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 네 가지 때문이다.

    첫째 530GP 사건에서 사용된 탄창과 수류탄 손잡이에서 범인이라는 김동민 일병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

    둘째 사건당시 생활관 사진을 보면 수류탄이 터졌다고 하기에는 깨끗했으며 시신에서 발견된 무기들의 흔적이 우리 군의 그것과는 상이하다.

    셋째 희생자들이 생활관에서 숨졌는데 왜 희생자의 군복과 군화 등을 모두 소각했는가에 대해 군이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같은 사람이 쓴 1, 2차 진술서의 필체가 확연히 다르다. 이 밖에도 당시 사건 기록을 보면 정황상 이상한 점이 많다.

    여기다 4년 전 귀순한 북한군 중위가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북한군은 1년에 두 차례, 최정예 부대를 우리 군 전방 초소 앞까지 침투시키는 작전을 펼친다. 작전하면서 우리 군이 매설한 지뢰를 해체해 이동경로까지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를 보면 530GP 사건은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

    김 의원은 “530GP 사건은 미제 사건이므로 국방부 재수사는 물론 민간조사단와 함께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7년 기자가 사건 현장을 찾았을 때...

     

    2007년 6월 19일 경기 연천군 태풍부대 530GP 인근 OP. 530GP 사건 2주기를 맞은 유가족들이 추모식을 치르기 위해 태풍부대 사령부를 찾았다. 2주기를 맞았지만 유가족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지켜보던 부대 장병들도 함께 울었다.

    추모식을 마친 뒤 유가족들과 함께 530GP 인근의 OP(전방감시소)를 찾았다. 태풍부대 관계자들이 유가족들에게 어떻게 명령을 내렸는지, 폭음이 들렸을 때 어땠는지, 왜 부상자 후송이 4시간이나 지연되었는지 등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해당 지역 주변에 빈 GP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때 기자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GP는 비무장 지대 내부에 있는 소초다. 비무장지대에는 무기 반입은 물론 각종 장비 반입도 유엔 정전위원회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GP인근에 공사하는 장비들이 보였다. 포크레인 한 두 대가 아니라 ‘지하철 공사’에서나 볼 수 있는 ‘천공기’와 대형 포크레인, 15톤급 덤프트럭 여러 대가 ‘공사장’ 인근에 있었다.

    어떻게 비무장지대 내부에서 공사가 가능한지 물었다. 부대 관계자는 처음에는 “모르겠다”고 하다 계속 캐묻자 “태풍사업이라는 것만 안다. 더 이상은 모른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그는 “이 사실은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국방부가 밝힌 ‘2005년 6월 19일 530GP 사건’ 최종수사 결과

     

  • ▲ 유가족들이 공개한 530GP 사고 직후의 사진. 생활관 내에서 수류탄이 터졌음에도 천정이 멀쩡하다.
    ▲ 유가족들이 공개한 530GP 사고 직후의 사진. 생활관 내에서 수류탄이 터졌음에도 천정이 멀쩡하다.

    2005년 6월 19일 경기 연천군에 있는 태풍부대의 530GP(전방소초)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김 일병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8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국방부는 다음과 같은 최종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28사단 81연대 수색중대가 주둔 중이던 530GP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평소 게임을 즐겨했지만 내성적이고 돌출행동을 많이 하던 김동민 일병이 선임병들로부터 잦은 질책 및 욕설 등 인격모욕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6월 17일 선임병 등을 살해하기로 결심, 19일 새벽 2시 30분 경 다음 근무자를 깨우러 간다고 말하고는 수류탄 1발과 25발 들이 탄창 2개를 휴대하고 내무반으로 가 관물대에 있는 정 모 상병의 K-1소총을 빼내 화장실로 가서 총에 탄창을 끼운 뒤 새벽 2시 36분 경 다시 내무반으로 가 수류탄 1발을 던진 후 총기를 난사했다"

    국방부는 “오전 2시 50분 경 신임소대장이 '전투복을 입은 사람을 봤다'며 당시 전투복을 입고 있는 병사 5명을 무장 해제시켜 관측장교실로 집합시킨 후 동료간 사고자를 추궁해 김동민 일병의 자백을 받고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국방부 발표에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자식들이 다른 사람에게 폭언을 하고 괴롭혔다는 점을 인정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며 군의 철저한 재조사를 요구했다.

     

    2007년 6월, ‘유가족대책위원회’의 주장은 ‘盧정부의 조작’

     

    2년이 흐른 뒤 530GP 사건으로 자녀를 잃은 유가족들이 모였다. 이들은 2년 동안 530GP 출신 병사들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모으며 지냈었다고 했다. 유가족대책위는 여러 가지 근거와 함께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 ▲ 유가족들이 공개한 530GP 사고 당시 사망자의 사진. 흐린 부분이 '총탄'을 맞은 자리다. 그런데 그 크기가 60mm를 넘는다.
    ▲ 유가족들이 공개한 530GP 사고 당시 사망자의 사진. 흐린 부분이 '총탄'을 맞은 자리다. 그런데 그 크기가 60mm를 넘는다.

     

    사고 공문 내용의 잦은 변경

    유가족들은 530GP 사건 당시 사고공문 내용이 처음에는 ‘적의 공격에 대한 대응조치’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범행무기와 숫자가 처음 실탄 10여 발-수류탄 1발(530GP 공보상황보고)에서 수류탄 1발, 실탄 25발(530부대일지)로, 다시 수류탄 1발-실탄 44발(6군단 헌병대 수사발표)로 변경됐다고 한다.

     

    ■ 내무실에 수류탄 폭발 흔적이 없다

    유가족들은 ‘생활관에 수류탄 파편에 의한 현장사진이 전혀 없고, 관물대에도 파편 흔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류탄이 터지면 45도 각도로 해서 위쪽으로 폭발한다. 때문에 허약한 생활관 지붕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하는 게 정상이다. 반면 사진 속 생활관 천정은 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희생된 병사 2명의 X-레이 사진에 나타난 파편 형상과 부상자 몸에서 나온 파편이 우리 군이 사용하는 K413 경량형 세열 수류탄 속 파편과 전혀 다르다. 일각에서는 사망자들에게서 발견된 파편이 북한군이 사용하는 RPG-7의 ‘인마살상용 탄두’ 속 파편과 같은 사다리꼴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故박의원 상병은 거꾸로 취침하다가 수류탄 폭발로 사망했다고 발표됐는데 이상하게도 상처가 난 부위, 왼팔과 겨드랑이에 있는 화상은 수류탄 폭발에 의한 상처가 아니라고 했다.

  • ▲ 530GP 사망자 시신 두번째. 이 또한 총탄이 들어간 부분이라는데 5.56mm 치고는 그 직경이 너무 크다.
    ▲ 530GP 사망자 시신 두번째. 이 또한 총탄이 들어간 부분이라는데 5.56mm 치고는 그 직경이 너무 크다.

     

    ■ 사망자 총상은 K 계열 소총에 의한 게 아니다

    유족들은 ‘고인 몸에서 빼낸 탄두 2개는 감정불가로 판정됐고, 지문도 없는 등 K-1 총기가 범행총기라는 직접증거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K-1소총은 5.56㎜ 구경의 K-100탄을 사용한다. 당시 사망자들의 총상은 가까운 거리에서 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국방부가 ‘총탄을 맞은 부위’라고 밝힌 곳이 평균 직경 30㎜정도 되는 구멍이었다고 한다. 가장 큰 구멍은 직경 55~60㎜에 이른다. 유족들이 입수한 사망자 2명의 X-레이 사진에도 미세파편부터 큰 파편은 총탄이나 수류탄의 그것과는 다르다.

    취사장에서 김 일병이 두 번 연발로 총을 쐈다는데 취사장 입구와 내부에는 총탄 흔적이 전혀 없다. 반면 체력 단련실에서는 수사현장 기록내용과 녹화한 VTR에는 보이지 않았던 총탄 흔적이 현장사진에 첨부돼 있었다. 

     

    유가족 대책위부터 530GP진상규명추진위까지 “北의 기습”

     

    2007년 자료를 공개한 유가족 대책위부터 2010년 만들어진 ‘530GP 피격사건 진상규명촉구국민협의회’까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게 있다. 530GP 사건은 북한군과의 교전이었다는 말이다.

  • ▲ 사망자 시신 세 번째. 군 수사당국은 수류탄을 몸으로 막았다고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 사망자 시신 세 번째. 군 수사당국은 수류탄을 몸으로 막았다고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북한군 차단작전 중 적의 기습공격에 의해 사망자 발생했다

    유가족들과 진상규명협의회 등은 530GP의 생존자들로부터 ‘북한군의 포격도발로 생각하고 대응했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밝힌다. 그 증언에 따르면 김동민 일병이 범인이라는 이야기와 내무반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는 말은 나중에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유가족들은 “사고 후 내무반으로 시신을 이동 배치했고 부상자 후송 시까지 GP로 복귀되지 못한 소대원이 있었으며, 북한군 도발을 차단하는 작전 중 발생된 사고”라는 생존자들의 진술도 확보했다고 한다.

    진술내용 중에는 “북한군의 GP 옥상 포격도발에 대한 내용과 평문통화 금지”, “아(我)측 530GP 공보상황 보고(28사단)” “530GP 미상화기 9발 피격, 합참보고, 적 도발 매트릭스와 간부비상소집” 등의 내용이 들어 있는 지상통제실 근무자 진술서도 있다고 했다.

    유가족들이 이런 근거와 진술을 토대로 추론해 낸 결과는 이렇다.

    불시 하달된 (북한군 공격)차단작전 명령에 의해 상병 급을 포함 14명을 차출해 차단작전 수행하다 2005년 6월 19일 새벽 1시 이전 북한군의 미상화기 9발에 피격된 것이다. 당시 폭발음 간격이 3~4초라고 하는 데 모든 상황이 30초에서 1분 이내 종료된 사건이다.

     

    ■ 김동민 일병은 내세워진 가짜 범인이다

    유가족들은 이런 정황을 들어 ‘김동민 일병은 당시 정부가 내세운 가짜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동민 일병은 사고 전날과 당일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수양록(일기) 내용에도 평소 부대원들과의 관계가 좋았다고 기록돼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사기록상 평소 김 일병을 자주 질책했다는 정은총 외 6명은 모두 살았고 불입건 처리됐으며 이후 국가유공자 7급으로 지정됐다는 것이다.

    유가족들은 GP근무 전 사격훈련 2번, 수류탄 훈련 1번 밖에 받지 않은 김 일병이 어두운 GP 안에서 40여 발의 총격으로 8명을 사망케 했다는 점, 목격자도 없고 김 일병을 무장해제할 때 아무런 무기 이상도 없었고, 범행 후 태연히 근무한 점도 이상하다고 했다.

  • ▲ 530GP 사건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이 시신에서 발견된 파편이다. 김동민 일병이 세열수류탄을 던졌다는 데 발견된 파편은 왼쪽 모양이다.
    ▲ 530GP 사건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이 시신에서 발견된 파편이다. 김동민 일병이 세열수류탄을 던졌다는 데 발견된 파편은 왼쪽 모양이다.

    530GP 생활관에는 36명이 생활하는데 사고 후 공개된 사진 속의 총이 20정 뿐이라는 점, 고인들의 유품인 전투복을 사고 직후 소각해 이를 받은 유족이 한 명도 없다는 점, 고인들의 X-레이 사진이 2명 외에는 비공개라는 점, 생존한 부상자에게서는 총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으로 제기했다.

    게다가 530GP 사건이 일어난 직후 GP 옥상을 흙과 콘크리트로 덮어 ‘휴게실’을 만든 건 더 웃기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GP는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전초초소로 적에게 드러나면 안 되는데 그 옥상을 북한군이 뻔히 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유가족들은 2005년 6월 15일 당시 청와대가 정동영 통일부총리가 방북하고, 인근 지역에서 북한군 병사가 체포된 것으로 인해 북한과의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해 사건을 조작했다고 생각했다.

    유가족 대책위는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진실’이 밝혀지리라 생각했지만 차이는 없었다. 유가족들은 2010년 6월 8일 우파 진영 단체들과 함께 ‘530GP진상규명촉구국민협의회(이하 530GP 국민협의회)’를 구성했다.

    530GP 국민협의회는 이를 ‘北의 침투를 막으려던 박종명 중위 이하 14명의 530GP 장병들이 북한군의 RPG-7 로켓과 기관총 공격에 맞서 교전하던 중 전사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530GP 국민협의회 측은 또한 당시 총리는 이해찬, NSC에는 이종석, 이재정, 국방장관은 윤광웅, 합참의장은 이상희, 국가보훈위원장은 한명숙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정부가 “범인인 김동민 일병에게 가혹행위를 가했다”는 병사들을 모두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고 전역시킨 점, 530GP에 근무하던 병사 중 2명은 “부끄러운 국가유공자는 싫다”며 거부한 점 등을 들어 모종의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5년 만에 반전 끌어낸 김형태 의원

     

    유가족과 530GP 국민협의회가 몇 년 동안 싸웠지만 이명박 정부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군 당국은 유가족의 민원을 받고도 ‘김동민 일병의 계획된 살인 사건이며 종결됐다’는 기존의 입장만 계속 되풀이했다.

    ‘무한반복’되던 의혹제기와 답변반복을 끊을 수 있을만한 일이 2012년 10월 국정감사에서 김형태 의원에 의해 나온 것이다.

  • ▲ 530GP 사건 직후 체포된 김동민 일병의 모습. 과연 그가 범인일까.
    ▲ 530GP 사건 직후 체포된 김동민 일병의 모습. 과연 그가 범인일까.

    시작은 지난 2일 동해 22사단 동해선경비대에서 일어난 ‘노크 귀순’이었다. 김 의원은 군의 경계태세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며 ‘530GP 사건은 북한군의 침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자 또한 최근에야 2007년 6월 530GP 인근에서 목격한 ‘공사장’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땅굴 탐침 현장’이었다. 당시 군의 답변은 "GP주변에서는 공사를 못한다. 잘못 본 것이거나 '추진진지' 공사를 본 것"이라고 답했다.

    사실은 달랐다. 군은 예전부터 '땅굴탐침부대'를 운영했다. 1980년대까지 일명 ‘도깨비부대’라 불리던 이 부대는 그 존재가 알려지자 90년대 들어서 그 편제와 소속을 아예 바꿔 '평범한 조직'으로 숨겨놓았다.

    땅굴 탐침 부대는 의심스러운 지역을 발견하면 비밀리에 작업을 한다. 어떤 작업을 하는지는 부대 관계자에게도 거의 알리지 않는다. 기무부대조차 사실확인을 못한다. 그런데 530GP 인근의 공사장은 ‘김 일병 사건’을 전후로 해서 생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530GP 사건은 땅굴을 통해 침투한 북한군 특수부대를 발견하고, 이를 차단하려다 아군 병사들이 당한 게 아닐까.

    여기다 530GP 사건 전후로 남북 간에 있었던 일들도 유가족과 국민협의회 측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530GP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2005년 6월 17일 정동영 당시 통일부총리가 김정일을 찾아갔다. 3개월 뒤인 9월 19일, 盧정권은 북한에 대한 전력과 쌀 지원, 이에 대한 ‘보답’으로 북한이 6자 회담에 복귀한다는 남북공동성명 발표가 있었다.

    22사단 동해선경비대가 ‘뚫린’ 것이나 530GP를 둘러싼 의혹이 풀리지 않는 것 모두 북한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 시작은 DJ-盧정권이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야당은 이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