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張俊河 추락사 담당 검사 徐燉洋(서돈양)씨,
    "외압도 의문도 없었다"


    "타살 가능성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문을 갖고 그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타살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趙甲濟   
     

  •   정치 선동꾼들과 선동적 언론이 합세, 1975년의 張俊河 추락사를 타살로 몰아, 박근혜 후보를 해치려는 캠페인이 또 다시 벌어지고 있으나 성공 가능성은 제로이다.
      그들이 새로 들고 나온 장준하 유골 사진은 그가 추락사하였다는 당시의 검사 판단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선동꾼들은 두개골의 함몰골절과 골반 골절이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사건 당시 이미 확인된 것이다.
     
      선동꾼들 앞엔 넘을 수 없는 진실의 장벽이 두 겹 있다. 장준하와 함께 하산하다가 그가 추락하는 장면을 본 金龍煥 씨(교감 퇴직자), 현장 조사와 屍身 검안을 통하여 '추락사'라고 결론 내린 담당 검사가 있다.
     
      국가기관은 과거 세 차례 재조사를 하였지만 두 사람의 주장을 뒤엎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이번 선동꾼들은 5審(최초 조사 포함)을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셈이다. 1993년 5월호 月刊朝鮮에 실린 담당 검사 徐燉洋(서돈양)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보자.
     
    <서돈양 검사 인터뷰 /월간조선 1993년5월호>

      <여기까지 취재가 되자 당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서 이 사건을 담당한 徐燉洋 변호사의 증언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러나 徐변호사는 계속 취재팀과 만나기를 거부했다. 완강한 그의 모습에서 '혹시 이 사람이 뭔가 비밀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울방송이 "당시 실족사라고 주장했던 검찰과 경찰 및 목격자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몇 차례의 접촉 끝에 4월12일 오전 안계신다며 출입을 막는 사무원을 밀치고 어렵게 徐변호사를 만날 수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 앉아 기자를 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기자를 피하면 의혹만 증폭되는 것 아닙니까. 徐변호사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만 줄 뿐인데요.
       "증거도 없이 타살이라고 우기는 시대상황이라면 더 이상 말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지난번 서울방송에서 張俊河씨 일에 대해 묻길래 추락사로 기억한다고 말해줬지요. 그런데 전혀 내 말을 믿지 않더군요. 처음부터 타살이라고 전제하고 묻는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사고 당일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지요.
       "그날 내가 당직 검사였습니다. 저녁 때 잠시 서울 녹번동 집에 와 있는데 연락이 왔더군요. 경찰보고가 '張俊河씨가 등반 도중 사고를 당했고 추락사인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변사사건은 흔한 것이기 때문에 가지 않고 경찰 조사를 토대로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숨진 사람이 張俊河씨라는 얘기를 듣고 현장에 갔습니다"
       -현장에 도착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아마 새벽 1시쯤 도착했을 겁니다. 포천 지역 의사회장이던 심구복씨(사망)와 함께 산에 갔지요. 이미 시신은 옆으로 치워져 있었고 피가 꽤 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구복씨가 시신을 살펴보는 동안 플래시로 떨어졌다는 지점을 비췄더니 절벽에 비스듬히 나 있는 소나무가 아래쪽으로 휘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높이가 12m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옆에는 기자들도 많이 와 있었는데 저마다 그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저 소나무를 잡으려다가 떨어졌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분명히 소나무가 휘어져 있었습니까.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그랬습니다. 가족들도 그분이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몸이 쇠약해졌는데 아마 현기증이 일어서 추락한 모양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시신도 그렇게 깨끗하지 않았었다고 기억됩니다. 18년 전의 일이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시신을 살폈던 심구복씨가 후두부와 다리에 골절이 있다고 말한 기억도 나고요. 별로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목격자인 金龍煥씨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때 金龍煥씨가 저에게 호되게 닦달을 당했습니다. 저는 타살 가능성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문을 갖고 그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타살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사진도 수십 장 찍었는데 그것도 없어졌고 기록도 없으니 저도 답답합니다"
       -기록이 없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기록은 보관 기관이 있는 겁니다. 아주 중요한 기록이야 정부기록보존소로 가지만 단순 변사 사건기록이 정부기록보존소로 갈 리도 없고…. 내가 검사 생활하는 동안 변사사건만 1천여 건을 넘게 했어요. 그 사건도 그중의 하나일 뿐입니다ꡓ
       -왜 날이 밝은 뒤에 현장검증을 하지 않았습니까.
       "뭔가 의혹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의문날 만한 것이 없었어요.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지금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혹시 외압은 없었습니까.
       "외압이 있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니까 단 사흘만에 허겁지겁 종결했다고 말하던데 아무런 물증도 없이 뭔가 흑막이 있는 듯한 암시적인 표현으로 마치 검찰이 숱한 궁금증을 억지로 덮은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은 경찰의 1차 조사 서류에다가 제가 金龍煥씨를 조사한 기록 등을 첨부해서 그걸로 끝난 겁니다"
       -당시 張俊河씨 변사 사건에 대한 의문 제기로 동아일보 기자가 구속되고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사흘만에 단순 변사라고 굳이 발표까지 한 것은 오히려 의혹을 더 깊게 해 주는데요.
       "그건 검찰의 사고조사와 다른 내용을 보도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이 마치 의문사인 것처럼 재야에서 증폭시킬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럼 정말 의혹은 없는 겁니까. 당시 법무관이라는 사람의 증언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사람 뭐하는 사람입니까. 지금도 법무관입니까. 저는 당시 최선을 다해 조사했다고 생각합니다. 검사들은 단순 변사체의 경우 대부분 현장에 잘 가지 않고 경찰조사만으로 처리하는데 저는 목격자를 마치 피의자 다루듯 꼬치꼬치 조사했습니다. 열심히 조사를 한 것도 의문이라고 한다면, 아마 일반적인 변사사건처럼 경찰조서만으로 처리했을 때는 또 그렇게 했다고 의문을 제기할 겁니다">
     
      서돈양 변호사의 증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조사에 외압이 없었다.
       *통상적 변사사건보다 더 자세하게 조사하였다. 특히 목격자를 필요 이상으로 세게 조사하였다.
       *가족들도 수사결과를 받아들였다. 부검 요구도 없었다.
       *현장 조사와 시신 검안을 통해서도 추락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후두부 함몰골절과 다리 골절이 있었다.
     
       徐 변호사는 당시 18년 전의 사건을 기억에만 의존하여 이야기하였는데 이번에 공개된 유골 사진상의 골절 부위와 일치하였다. 선동꾼들은 얌전한 목격자 김용환 씨만 추궁하는데, '추락사'라고 결론을 내린 건 국가기관으로서의 서돈양 검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