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서 400 여명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 열려
  • "이승만 없는 대한민국 역사 연구는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이기수 회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47주기 추모식에서 한 말이다.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한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 현대사의 시작점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 ▲ 이승만 박사 47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강창희 국회의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 이승만 박사 47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강창희 국회의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19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역대 최대 인원인 400여 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강창희 국회의장,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등이 추모사를 했다.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KTV, CTS, 국회방송, 연합뉴스, 뉴시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이 취재했다.

    이기수 회장은 상해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 박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4.19에 의해 하야했지만 항상 우리 청년들을 향해 “장하도다! 우리 청년들!” 이라며 그들의 기상과 용기를 높이 평가 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검증되지도 않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온갖 거짓 소문과 악담들이 사실인 양, 이 대통령 서거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 이승만 박사 47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 이승만 박사 47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좌익세력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선동하는 왜곡된 사항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뭍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분단 고착화, 친미, 독재 등 온갖 난폭한 언어들로부터 오늘날까지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실로 답답할 수밖에 없으신 분이다. 이제는 이 대통령께서 서거한 지 반세기가 되어가는 만큼 ‘분단’이 아닌 ‘건국’을 말해야 하고 ‘친일파’ 등용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평화선’을 선포, 일본을 압박하여 오늘날의 해양주권을 확보하고 '친미주의자'가 아닌 '용미주의자'였던 대통령이었음을 알려야 한다."

    "우리 후손들에게 역사를 보는 안목을 가르쳐야할 사명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 이 시작은 우리의 건국대통령을 어떻게 받들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우남 이승만(1875.3.26〜1965.7.19)은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운 그는 이후 1896년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여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지를 발간하면서 주필로서 구한말 정부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시작했다. 협성회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일간지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을 발행, 주필로 계속 활동했다. 

    1898년 고종 황제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됐다. 이승만 박사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는 전단을 배포하다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 ▲ 이승만 박사 47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 박사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바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에서 수학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돼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 신문을 발간, 박용만·안창호와 힘을 모아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1921년 5월 워싱턴 군축회의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서 일제의 만행과 침략을 폭로하기도 했다. 광복 후 귀국한 뒤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합쳐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 ▲ 대한민국과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영정. 좌익들이 왜 그를 비난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 대한민국과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영정. 좌익들이 왜 그를 비난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을 끌어들여 지금도 우리나라의 평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한미 동맹을 이뤘다. 이승만 박사가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제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는 근간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