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시인 모 윤숙 毛允淑

  • 산 옆의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포옴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 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피 속엔 더 강한 혼이 소리쳐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과 가시 숲을
    이순신(李舜臣) 같이 나폴레옹 같이 시이저 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머나먼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뻗어 가고 싶었노라

  •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죽음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레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 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 다오


  •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 싼 군사가 다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江)과 산(山)을 넘는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 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 가고
    젖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 가도
    나는 유쾌히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포옴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시집 {풍랑}, 1951)

    解題(해제) : 시인 毛允淑(모윤숙)씨는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함락되자 남쪽으로 피난가기 위해 서울을 빠져 한강을 건너 경기도 廣州(광주)로
    가다가 이름 모를 야산에서 육군소위 계급장을 단 국군 전사자를 발견했다.
    시인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읊은 시로,
    당시 많은 국군장병에게 愛誦(애송)되었다.
    1950년대에는 국정 국어교과서에도 실렸었다.

    <시인 모윤숙 1910.3.5∼1990.6.7>

  • 호는 영운(嶺雲). 함경남도 원산 출생.
    1925년 함흥 영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였다. 192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1931년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교사로 재직하며, 시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東光, 1931.12.)을 발표하였다.

    1932년 서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첫 시집 ≪빛나는 지역 (地域)≫(朝鮮彰文社, 1933)을 발간하였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던 안호상(安浩相)과 혼인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독신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3차UN총회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정부수립에 여류외교관으로서 활약한 바 크다. 1949년 월간 순수문예지 ≪문예 藝術≫를 창간하였고, 1951년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55년 국제펜클럽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고, 1960년 국제 펜클럽한국본부 회장, 1971년 공화당의 전국구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시집 ≪빛나는 지역≫ ≪옥비녀≫(동백사, 1947)에 이르면 민족적인 주체의식이 전경화(前景化)되며 화자의 역사적 인식이 보인다. 예컨대, 화랑 무사를 노래한 <문을 여소서> 같은 작품과 <조선의 딸>·<이 생명을> 등 민족의식이 뚜렷한 작품들을 발표하여 1940년 경기도 경찰국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는 학도병 출정을 찬양 고무한 시 <내 어머니 한 말씀에>·<오시지 않았는데>·<신년송> 등을 ≪매일신보≫에 발표하여 친일적인 경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광복 후 6·25를 겪으면서 시집 ≪풍랑 風浪≫(1951)을 출간하였는데, 그 중에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와 같은 애국적 시상을 작품화하기도 하였다. ≪렌의 애가(哀歌)≫(1937·1949·1951)와 같은 연애 장편 산문시를 발표, 1950년대 중반의 독서계에 큰 호응을 일으켰다.

    시집 ≪정경 情景≫(1959)·≪구름의 연가(戀歌)≫(1964)·≪풍토 風土≫(1970) 등, 서사 시집 ≪논개 論介≫(1974), 수필집 ≪내가 본 세상≫(1953)·≪포도원≫(1960), ≪모윤숙시전집≫(1974)·≪모윤숙전집≫(1982)·≪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87)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예술원상(공로상)과 국민훈장 모란장.

    [관련기사]------------------------------------------------------

    제14회 이승만포럼

    2012. 4. 5(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대한민국 건국과 한국여성

      최종고(崔鍾庫,서울법대 교수, 한국인물전기학회장)

    머리말

    한 나라의 건국에 대하여는 여러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어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것을 감안하고라도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새삼 요청되는 이유는 해방 후 어떤 국내외 사정 속에서 남한만의 지역에 자유민주주의의 공화국이 건국되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 발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해보려 한다. 우선 대한민국의 건국은 유엔의 결정에 따라 진행된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보다 진지하게 바라보려는 입장이다. 그리고 유엔조선위원단이 파견되고 그 의장이 인도인이었기 때문에 건국과 한국전쟁에 인도의 역할이 상당히 컸고, 인도가 미소냉전 체제 속에서도 비동맹 중립노선을 택하였기 때문에 그런 시각에서 다소 신선하게 한국현대사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인도인 의장 메논(K. P. S. Menon) 박사라는 인물이 한국과 유엔에서 그린 역학관계를 자세히 추적하여  의미를 해석하려는 것이다.

    또한 메논이 건국방향을 모색하는 가운데 모윤숙이라는 여성시인을 만나 이루어진 인간관계가 건국방향에 중요한 함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남성들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해석으로 통한다. 이런 주제를 되도록 당시의 자료들을 살려 생생하고 바른 모습으로 복원해보고자 한다.

  • ▲ 남북한 총선거 준비를 위한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메논.
    ▲ 남북한 총선거 준비를 위한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메논.

    I. 메논은 누구인가?

    인도에는 국내외적으로 활동한 메논 씨들도 여럿 있어 헷갈리게 한다. 우리의 주인공 메논은 다행히 자서전을 써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쿠마라 파드마나바 시바상카라 메논(1898-1982)으로 이름이 길어서 인도에서도 일반적으로 K. P. S. 메논(KPS Menon)이라 불린다.

    1. 출생과 학력

    K. P. S. 메논은 1898년 인도의 남부 코타얌이란 도시에서 태어나 마드라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여기서 후일 부인이 된 아누지 여사를 만났는데, 그녀는 국회의장을 지낸 나이르의 딸로 재색을 겸비한 여성으로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이 사실은 후에 말하는 모윤숙 여사와의 관계에 중요한 대목이 될 수 있다. 1918년에 옥스퍼드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그때 타고르가 옥스퍼드를 방문하였는데, 메논은 자서전에 “위대한 시인, 애국자,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옥스포드 동창으로 환영하였다”고 적고 있다.

    2. 중국주재 인도대사

    1943년에 중국의 총영사 책임을 맡아 10월 10일 신임장을 제출하였는데, 그것은 공화국 32주년 기념일이면서 장개석이 총통으로 취임하는 날이었다. 그는 “나는 중국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였다”고 적었고, 손문의 삼민주의를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의 짬뽕이라고 적었다.

    1944년 8월 16일 두 번째로 중국에 대사로 부임하였다. 중국에서 메논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인도대표로 위촉을 받았다. 1947년 말에 일본을 방문하여 맥아더 사령관의 저택에 초청받아 점심을 함께 하였다. 일본인의 맥아더 사령관에 대한 태도와 한국인의 하지 장군에 대한 태도는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일본에서는 연합군에 대해 절대복종이었는데, 한국인은 미군정에 대해 끊임없이 항거를 하고 있다고 보았다. “하지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하지 골리기(Hodge-baiting)가 무슨 장난취미같이 보였다. 이것이 일본인의 맥아더숭배보다 더 민주주의를 위하여 건강한 징조가 아닐까 생각되었다”고 메논은 자서전에 적었다.

    3. 샌프란시스코 유엔창립회의 두 메논

    1945년 4월부터 6월 26일까지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인도 대표단 고문(Chief-Adviser)으로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국제연합(UN)이 탄생된다. 같은 이름의 크리슈나 메논도 참석하여 장장 8시간의 웅변을 하여 유엔 역사상 최장 연설의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네루와 두 메논, 이 세 인도 지도자들은 서구 민주주의에 가치를 두면서도 ‘자본주의의 악덕’을 비난하고 사회주의의 이상을 동경하면서 비동맹의 독자적 외교노선을 추구해 나갔다. 네루는 “왜 우리는 꼭 어느 한 쪽에 서야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4. 유엔 조선위원단 의장

    K. P. S. 메논은 1948년 1월 8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10주간 한국에 머물렀다. 그의 한국체류가 그가 원하던 대로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지는 못하였지만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는 간디와 타골을 숭배하며 “우리 유엔한국위원단은 이 등불을 다시 켜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냉전의 바람은 우리에게 너무 강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지치고 아쉬운 마음으로, 특히 김구가 자기를 원망하는 모습을 보고 떠나 고별사에서 해명을 해야 했다. 그러나 모윤숙이라는 여류시인을 만나 인간적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런 기억은 만년까지 남아있었다. 뉴델리에서 발간하는 신문 <Statesman> 1950년 8월 15일자에 <한국에서의 추억들>이란 글을 전면에 실었다. 여기에는 사진 석장이 실렸는데, 첫째 사진은 김활란, 모윤숙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 둘째는 유엔총회에서 한국안을 통과시키는 모습, 셋째는 이승만이 “한국의 진정한 친구 메논박사에게”라고 싸인하여 선사한 우남 자신의 사진이다.

    5. 인도 외무부장관

    K. P. S. 메논은 1948년 3월에 인도 외무장관으로 뉴델리에 돌아와 활동하였다. 자연히 수상 네루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메논은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네루를 ‘인도정치의 햄릿’이라 부르며, 많은 문제에 박식한 견해와 늘 공부하는 모습을 존경한다고 하였다.

    네루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자처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사회의 이윤추구의 체제를 협동적 봉사를 통해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더욱 고귀한 이상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빛을 바래기 시작했고 슬프고 초라하게 보였다. 이승만과 직접 교섭은 없었으나 서로 어떤 노선을 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인물이 1960년을 고비로 사양길에 들어섰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공통점이다. 윤치영은 회고록에서 메논을 네루보다 더 큰 인물의 외교관이라 평하였다.

    6. 소련주재 인도대사

    메논은 1952년 소련주재 인도대사로 갔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급서하였다. 메논은 이러한 소련의 변화를 ‘한 시대의 종말’이라 부르며 잘 관찰하여 후일 <나르는 트로이카>라는 책으로 저술하였다.

    소련과 미국의 대립을 외교현장에서 목도하면서 인도는 평화정착에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도가 유엔한국위원회와 유엔 인도차이나위원회의 의장국이 된 것도 그러한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때 인도가 파병을 하지 않고 의무병만 보내고 포로송환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모두 그런 정책의 표현이었다. 1961년 대사직을 떠날 때 메논은 모스크바대학교로부터 역사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지금도 메논이라 하면 인도에서는 ‘인도와 러시아 친선의 챔피언’으로 알려져 있다.

    7. 은퇴 후 고향에서

    모든 공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케랄라대학교 부총장이 되었다. 자서전 <많은 세계들>을 저술하였다. 자서전은 1965년에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1979년에 증보하여 제2부에 몇 편의 여행기와 교우록을 실었다. 1981년에 메논은 다시 자서전에 에필로그를 붙여 <많은 세계 수정판>이라 개명하여 출간하였다. 세계가 데탕트의 시대로 들어간다 하는데, 여전히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미국만 원자탄을 가져 전보다 위협을 더 느끼고 있다고 적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시구를 적고 있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리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나서 1년 후 1982년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인도의 습관인지 일목요연한 총 논저목록이 없어 얼마인지 정확히는 모르나 15종 정도 되는 것 같다.

    II. 이승만과 메논

    메논박사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가장 생생하게 담고 있는 자료가 남아있어 천만다행인데, 그것은 그의 연설들을 모윤숙 여사가 모아서 영어 원문과 함께 정인섭 외국어 대학교 교수의 번역으로 편집한 <메논박사연설집>(문화당, 1948)이다. 현재 국회도서관에 유일하게 한 권 소장되어있다. 사료적 가치가 크기 때문에 이번에 낸 졸저에 모두 실었다. 이 책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메논박사의 연설집을 출판함에 즈음하여>라는 서문도 실려 있다. 대통령으로서 남의 책에 서문을 써준 예는 유일한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메논박사의 연설집을 출판함에 있어서 모윤숙여사 및 인사들의 요청을 받아 서문으로 써 몇 마디 말씀하는 것을 충심으로 기뻐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연설집을 출판하는 것은 시의에 적합한 일입니다. 그것은 한인들이 생생한 민족문제에 있어서 메논박사의 취하신 태도에 만강의 감사를 올리고 있는 까닭입니다…메논박사야말로 한국문제의 궁극의 전반적 해결이 제일보로서 한인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와 또 가능지역 및 가능시기에 있어서 민주적 독립정부를 수립할 권리를 변설하였던 것입니다.
                                                                                                               1948년 5월 1일 이승만

    유엔조선위원단(UNCOK) 일행은 1948년 1월 8일 저녁에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위원 명단은 아래와 같다.

    S·H·잭슨(Jackson)(駐 동경 호주위원단 고문관)(호주) 장관
    유어만(劉?萬, Yu-Wan Liu)(駐 서울 중국총령사관 공사급)(중국)재서울중국총영사
    쟝 폴-봉클(Jean Paul-Boncour)(전 루마니아주재 프랑스 공사)(프랑스) 대사급
    멜치오 아란즈(Melccio Arranz)(전 필리핀 상의원 임시의장)(필리핀) 상원의원
    재키 자비(Zeki Djabi)(의사정당지도자)(시리아) 의사
    케이 피 에스 메논(KPS Menon)(주 중국 인도대사)(인도) 대사
    미겔 발레(Miguel Angel Pena Valle)(엘살바도르) 법률가, 외교관

    이상이 위원단의 각국 대표들이고, 실제로 사무를 볼 스탭진은  아래와 같았다.

    사  무  총  장   호세택(胡世澤, Victor Chi-Tsae Hoo, 중국) 외교관
    수  석  비  서   페트루스 J. 슈미트(Petrus Schmidt)(네덜란드)
    수석비서보조관   아안 F.C.마이너(Ian F.C. Miner)(호주)
    법 률 고 문 관   마크 슈라이버(Marc Schreiber)(벨기에)
    행    정    관   로버트 S. 하우스너(Robert S. Hausner)(미국)
    정    보    관   알베르 C·그랑(Albert C. Grand)(프랑스)
    비 서 보 고 원   제스피스 F·엔저스(J.F. Engers)(네덜란드)
                     유초민(Tso-Min Yu)(중국)
                     그래함 J·루커스(Graham Lucas)(미국)
                     주홍리(Hung-Li Chu)(중국)
    재    무    관   앨프렛 J·켓즈(Alfred F. Katz)(미국)
    문    서    관   아더 M·곳테스맨(Arthur M. Gottesman)(폴란드)
    통          역   해리 유(劉, Harry Liao)(중국)
                     니콜라스 위로우보프(Nicholas Wyrouboff)(프랑스)
    번    역    관   죠르쥬 글로바(Georges Globa)(프랑스)
    속 기 보 도 원   로랜드 헐(Rolland Hall)(미국)
                     페이버드 로즈(David Rose)(미국)
    속 기 정 리 원   코린 M·켐벨(Colin M. Campbell)(영국)
                     안토니 E·바린스키(Anthony E. Balinski)(폴란드)
                     매리언 M·몬테규(Marion M. Montague)(미국)
                     매드렌느 엘라드(Magdeleine Allard)(캐나다)
    비          서   콜렛트 코피(Collete Coppee)(벨기에)
                     크리스챤 R·화우레(Christiane Faure)(프랑스)
                     이타 B·글랜스((Ita F. Glance)(미국)
                     에미리엔 라갈릿세(Emilienne Lagalisse)(프랑스)
                     애리스반 R·스미스(Alice Van R. Smith)(미국)
                     죠세핀 스티렌(Josephine R. Stieren)(미국)

    메논 일행을 환영하는 시민대회가 1월 14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는데, 20만 명이 운집하였다. 이승만은 환영사를 하였고, 메논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열과는 달리 한국은 남북통일국가가 서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답사를 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먼저 자리를 일어섰다.

    메논은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고 여러 인사들과 접촉하였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한국인들이 독립에 집착한다면 그들은 또한 통일에도 집착하고 있었다.…우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정치적 생활은 한마디로 흥분되고 무질서했다. 400개에 가까운 정당들이 있었는데…당시 한국의 세 사람의 정치적 지도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극심한 개인적 반목들이 있었다.…삼각관계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그의 이름은 남한에서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숭배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혐오되었다. 그의 나이, 학력, 사회적 매력, 윌슨 대통령과의 친분, 그리고 한국독립을 위하여 평생의 부단한 승리로 이승만은 네루가 인도의 국민적 지도자인 것 같은 의미로 국민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그렇지만 좌우익대립의 갑작스런 개입에 의해 이승만은 극단적 우익으로 전환되었다. 외모로는 잰틀하면서 신념에선 경직된 이승만은 율리우스 시저가 자신에 대해 말한 것처럼 '북극성처럼 확고한' 인물이었다.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태도도 시저와 같았다. 그는 좌익과 자유주의자, 동반동지와 다른 사람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아니하였다. 그들과 상대하기 위하여 그는 남한에서 일종의 경찰국가를 수립하였는데, 그것은 북한에서 김일성이 반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취한 것과도 같았다…많은 점에서 우리는 남한의 정부가 북한의 정부처럼 전체주의적임을 발견하였다…이데올로기적 충돌 속에서 한국의 한쪽 덩어리는 좌로 다른 덩어리는 우로 질주하고 있었다. 우리는 나눠진 이 연약한 통나무가 다시 한 번 옛날처럼 우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어떤 중간코스를 찾아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하였다…우리 위원단은 한결같이 남한에 수립된 분리정부는 하나의 국민정부(a National Government)라고 불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남한에서만 선거를 치룬다는 것은 무용한 짓이었다.…나는 이러한 호소에 하나의 경고를 덧붙였다. 만일 한국의 통일이 회복되지 않고, 한국에 두 주권국가가 존재하게 된다면 두 정부는 충돌하여 예측할 수 없는 결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나는 유엔에 경고하기를, “한국은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아시아세계에 대한 거대한 촉매의 시작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2년 후에 이 예언은 거의 현실로 나타났다. 한국의 분단을 향한 첫 번째 형식적 단계는 미국에 의해 취해졌다. 그것은 남한에만 대한민국이라 불리는 단독정부를 세우는 방향으로 결의되었다…반대한 나라는 캐나다와 호주뿐이었다. 표결한 시간에 인도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인도는 위원단 안의 두 대영제국연방 동료(영국과 호주)와 결별하고 미국을 편들어주면서 그 결의에 찬성하였던 것이다…그러나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의 보고서를 제출하고는 총회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소극성에는 하나의 센치맨탈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내가 마하트마 간디의 부음을 들어야 했던 것은 한국에서였다.…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알고 나에게 반복하여 타고르가 극동을 방문하였을 때 한국에 준 메시지를 언급하였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죽지 않는 빛이 되리라!

    우리 유엔한국위원단은 이 등불을 다시 켜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냉전의 바람은 우리에게 너무 강하였다.

    메논은 자서전에서 한국전쟁에 대하여도 이렇게 적었다.

    한국에서의 전쟁은 인도의 외교정책의 산소실험처럼 드러났다. 인도는 북한군대가 남한을 침략했다는 유엔한국위원단의 관찰을 동의하면서 유엔총회가 북한을 침략자로 선언하는 것을 지지하였다…그러나 출발에서부터 한국문제를 위한 인도의 노력은 정치해결이었지 군사적해결은 아니었다.
    …맥아더의 눈부신 인천상륙이 있었는데, 그 결과로 남한은 침략자들의 손에서 벗어났다. 군사적 행동에 제동을 걸고 해결을 시도해볼 적절한 순간이었고, 인도는 이것이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승리에 취한 맥아더는 단지 침략자를 남한에서 퇴치하라는 유엔의 위임을 초과하여 38선을 넘어서 북한으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때 중국이 만일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개입할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중국과 서방의 연결하는 유일한 효과적 고리인 인도는 이 경고를 영국과 미국에게 매우 심각히 전달하였다. 그러나 서방세력, 특히 미국은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이 으름장을 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나다에 의회 지원을 받아 인도는 중국의 동의를 받는 어떤 조처를 취하겠다고 촉구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전쟁은 또 2년에 걸쳐 진행되는 결과가 되었고 극동에서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가능한 기회는 상실되었다.
    메논은 중국통이었기 때문에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한의 어느 쪽에도 군사지원을 하지 않고 휴전과 포로문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려는 네루정책의 입안자가 되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에 소련대사로 부임하였다.

  • ▲ 남북한 총선거 준비를 위한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메논.

    III. 메논과 모윤숙

    모윤숙은 김구, 김규식 등 지도자들 가운데 이승만을 지지하기로 작정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메논박사의 마음을 이승만에게 돌리게 했는지 생생히 적고 있다.

    “마치 문학토론이나 하러 한국에 오신 것 같군요. 덕수궁회의에서도 문학이나 문화에 대한 토의를 하시나요?”…내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자 그는 금방 웃음이 터져 나올 듯한 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한국문학토론이나 덕수궁에서 하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머리 아프도록 복잡하기만 하거든요. 당신은 한국이 어떤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또 누가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요? 김규식 같은 이는 참 침착한 학자정치가입니다. 남북한 국민의 의사도 적당히 조화시킬 수완도 있어 보이고…” “이승만 박사는요?” 나는 다그쳐 물었다. “훌륭한 분이지요, 하지만 하지장군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나로서는 어떤 특정인의 주장에 따르기보다 한국민 전체가 열망하는 초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낼 책임이 있습니다”. “대다수 국민이 이박사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지요”. 메논씨의 표정은 종잡을 수 없이 밝았다 어두웠다 했다. 그러나 이미 그와 나는 신뢰할 수 있는 깊은 우정에 얽매어 있었다.…동네에서는 이상한 눈초리로 보기도 하고 또 수군거리기도 했다.  나는 어느 정도 행동을 자제해야겠다고 춘원선생에게 간단한 편지를 썼다.

    모윤숙은 메논과의 교제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너무 고마움에 감흥된 우리는 진실한 그의 인간성에 희망을 두기 시작 했다. 몇 번이나 네루수상에게서 날아온 전문을 보았다. 인도입장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교관으로보다 사실에 입각한 우리 현실을 그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옥스퍼드판인 그의 자서전에 밝힌바 “나의 인생의 외교생활 중에서 단 한번 머리보다 가슴이 움직이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는 고백이 있거니와 그것은 한국에서의 그가 처음으로 비정책적인 오직 우정의 힘에 의해서 진행된 일을 말함이리라. 우선 남한만의 총선에 성공했고 유엔에서 합법성을 얻기 위한 일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박사는 그를 껴안고 고마움에 목메어 울었고 우리 모두 한덩어리가 되어 그의 성의의 감탄했다.…그는 6.25동란 때 내가 서울시내에서 죽었다는 뉴욕타임지를 보고 인도 어느 신문에 길고 긴 추도문을 발표했다. 나는 그에게서 순박한 우정의 힘이 얼마나 무섭고 또 큰 것인가를 알면서도 그가 내게 대한 친절의 백분의 일 만큼도 당해내지 못했다.

    모윤숙은 춘원 이광수(1892-1950)를 메논과 대면시켜 문학을 통한 공감을 확대시키기도 하였다.
    1949년 3월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승인을 받아내고, 모윤숙은 장면, 조병옥, 정일형, 김활란 등 한국대표와 헤어져 인도를 방문하였다. 거기서 거의 국빈급 예우를 받았다. 이에 대하여도 자신의 기록이 있다.

    네루수상의 저녁연회는 나를 위한 것이라고 초청장을 전한다. 1949년 2월 22일 밤. 네루수상은 몹시 친절한 태도로 나를 옆에 앉히었다.…“메논씨는 우리나라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오시어 말못할 고생을 하시며 우리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해 주셨습니다”. 네루수상은 내말의 응수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아시아문제에 있어서 너무 자기 고집만 세우는 듯한데 그 분이 좀 부드럽게 나왔으면 나와 호흡이 맞아. 무슨 일이든 함께 할 수 있을 터인데. 내가 그런다고 그 고집을 좀 숙이라고 하시오”. 네루씨는 진심으로 이박사의 고집이 불안한 듯이 걱정하였다. “인도와 한국은 서로 다른 환경을 가졌으니까 우리나라엔 그분의 고집이 아마 약이 되는 때도 있나보지요. 인도와 같은 중립노선이 한국엔 맞지 않습니다. 이박사의 고집정치가 우리를 휘어잡으려는 상대방의 수완을 거부하는 힘이 되는 걸요. 절반이 끊어진 반신불수나라고 제 몸을 바로 찾아보려는 데 우유부단의 이념으로야 되겠습니까? 가서 수상님의 말씀 잘 전하겠습니다”. 하고 나는 마주 앉은 메논씨 부부를 쳐다보았다. 그는 빙그레 웃음을 띠고 있었다.…새벽  2시나 되어 우리는 한 차를 타고 관사로 돌아왔다. 메논씨는 긴 복도를 부인과 함께 걸으면서 굿나이트를 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굿나이트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메논이 1965년에  낸 자서전에도 아니나 다를까 모윤숙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춘원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 임영신 등이 언급된다.

    한국인들은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그들 가운데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친애한 사람은 모윤숙이라는 한국의 지도적 여류시인이었다. 나는 그녀와 많은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정치얘기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치에 관하여는 그녀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동의했고, 대신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슬픔과 기쁨 등 일상적 사항들에 관하여 담론했다.…하루는 한 의례적 회의에서 끊임없는 연설들에 지쳐서 호세택 박사와 나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슬쩍 빠져나와 모윤숙의 집으로 가서 그날 저녁을 그녀와 임영신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
    모윤숙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애국자였다. 그녀에게는 남한이 한국이었고, 북한은 아데나워에게 동독처럼 하나의 저주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남한에 주권공화국을 세우려 투표하는 것은 나라전체의 독립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배반이었다. 모윤숙은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고, 심지어 나를 ‘한국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몇 개의 시도 읊어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일 나의 나라가 유엔결의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들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공직 가운데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하게 한 유일한 경우였다. 나는 나의 행위-혹은 비행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한다. 인도는 대한민국을 북쪽의 인민공화국보다 더 승인해주기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인도는 한국의 부자연스런 분단을 영구고착화시킬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는 미소양진영 사이에 연결고리(link)의 역할을 하는 데에 지체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3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1953년 중반에 평화가 확보된 것은 대부분 인도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나는 그러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한순간에 행복을 걱정하면서도 행하라. 신중의 나이는 결코 되돌라 오지 않는다.

    메논의 귀국 후 모윤숙과의 편지교환은 계속되었고, 1972년에 뉴델리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IV. 모윤숙과 낙랑클럽

    낙랑클럽은 건국기에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여사가 은근히 지원해주면서 영어를 잘 하는 교양 있는 여성들에게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고급외교를 하도록 조직한 비밀사교단체였다. 미군정보부의 조사에 따르면 1948년 혹은 1949년부터 있었다. 총재는 김활란이고, 모윤숙이 회장으로 주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주로 이화여대 출신으로 영어를 잘하는 미모의 여성 150명 정도라고 되어있다. 목적은 서양인들에게 기생파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고급으로 한국문화를 알리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후원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도움도 있었고, 그 운영비는 장면 총리실(???)에서 부담해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회원인 김수임이 공산주의자 이강국과의 사랑으로 간첩행위를 하여 처형되는 일이 생겨, 미군정보부는 낙랑클럽을 장기간 면밀히 조사하여 보고한 기록이 있다.

    V. 건국기의 한국여성지도자들

    여기서 우리는 건국기에 활약하던 여성의 전부를 섭렵할 수는 없다. 모윤숙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해방 후 내가 사회활동을 할 무렵, 나를 지도해준 선배로는 박순천씨 외에 황애덕, 김활란, 임영신, 박승호(납북), 황신덕, 고봉경(납북, 고 황경씨 언니), 서은숙씨들, 비슷한 또래로는 최예순(납북), 임길재(재미), 최정희, 이선희, 박화성 씨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나는 내가 가진 신, 인간적인 신앙도 있지만 이런 좋은 선배, 동료들 때문에 세상의 스캔들도 극복하고 파멸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믿고 있다.

    목사이면서 한국정치에도 깊이 관련되어있던 강원용은 회고록 <역사의 언덕에서>
    (2003)에서 해방 직후의 한국여성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이었던 50대 초반의 박승호는 동아일보 여기자로 일하다가 창덕여고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6.25때 납북되고 말았다. 박승호와 함께 일한 사람들로는 박순천, 황신덕과 그 언니인 황애덕이 있다. 또 생각나는 사람으로 황기성이라는 여자도 있는데…
    과격한 우익여성단체로는 여자청년단이 있었다. 그 단체에서 제일 열심이었던 사람이 홋날 고아원을 운영한 황근옥이다. 당시에는 여성단체역시 좌익계가 압도적이었으므로 공산주의가 아니거나 민족주의 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테러를 당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길거리에 못나갈 정도였다. 우리 선린형제단의 멤버이기도 했던 황근옥은 좌익여성들의 돌에 맞아 머리가 터지는 사고를 당해…
    가장 독특한 여성운동단체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서울여자대학전문학교가 주축이 되어 만든 애국부녀동맹이다. 카톨릭 신자였던 박은성이 동맹위원장으로 활동했고 홍만길, 나신애 등을 중심으로 한 30여명이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애국부녀동맹은 초창기에 주로 반공투쟁을 했다.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똘똘 뭉쳐 한집에서 숙식까지 하는,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이들은 재치있게 반공투쟁을 이끌어 신문에도 자주 등장했는데, 공산당조직에 직접 침투하여 정판사위조사건을 적발해 내는 데도 공을 세웠다.…
    또한 고황경과 김활란과도 알고 지냈는데 보건사회부 부녀국장을 지냈던 고박사는 여성운동을 하면서 경동교회 여성모임에도 자주 나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쟁 중에는 여자청년단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을 펼쳤다. 모두 군복을 입고 다녔는데 단장은 모윤숙씨였고 중간간부로는 이희호, 김정례, 박기순 등이 있었다.…
    그때 여성운동은 크게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일반의 무지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계몽적인 성격이고, 또 하나는 의식있는 여성들의 애국운동이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여성단체는 계몽운동과 정치운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여성들, 개중에는 오히려 이름을 드러내기를 주저하며 숨은 봉사를 한 여성들도 더 많을 것이다.

    맺는말

    인도로 귀국한 메논은 외무장관, 주소련대사로 이승만과는 거리가 먼 중립노선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심각성,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는 남북한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평화회복과 포로송환에 주력하였다. 인도와 한국의 관계는 그만큼 멀었고, 인도는 1990년에 들어서야 중립노선에서 자유서방에 가까운 관계로 선회하면서 경제적 부흥도 이루고 있다. 이제야 메논이 한국에서 뿌린 씨앗이 열매 맺고 있다고 하겠다.

  • ▲ 남북한 총선거 준비를 위한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메논.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최종고 교수 지음 /기파랑 발행

    1948년 유엔한국위원단의 의장으로 한국을 찾은 인도인 메논(K.P.S.Menon)은 대한민국의 건국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승만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시인 모윤숙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었다. 시와 문학에 대한 교감으로 메논과 우정을 나누던 모윤숙은 메논 의장이 뉴욕의 유엔총회 소위원로 떠나기 직전에도 차 안에서 마지막 설득을 하였고, 이승만은 모윤숙의 이름으로 수차례 뉴욕으로 전보를 보내 단속하기도 하였다.

    이런 피나는 노력의 결과 유엔 총회에서 남한에서만의 선거가 인준되었고, 메논이 돌아왔을때 이승만은 껴안고 울었다. 이런 감독적인 순간을 거쳐 대한민국이 탄생된 것이다. 이 대목은 보기에 따라 정치적 공작이나 스캔들로 오해될 여지도 없지 않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처럼 그동안 묻혔거나 가십거리로만 흘러오는 이면사(메논과 모윤숙의 관계,낙랑클럽의 역할 등)를 정식으로 한국 현대사에 클로즈업하여 다양한 자료를 통해 당시의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을 사려면: 기파랑 www.guiparang.com 전화 02-3288-0077, 02-763-8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