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금융업체들, 등록상호와 다른 대기업 계열사 사칭 호객주소 틀리고, '상담사' 전화는 ‘대포폰’…실체 파악 어려워
  •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K씨는 지난 11월 부모님께서 뇌경색으로 입원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돈을 구하러 다니게 됐다. 하지만 그는 비정규직이라는 신분과 짧은 재직기간 때문에 은행과 캐피탈로부터 모두 대출을 거절당했다. 이때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LG캐피탈 서초지점의 김○○ 대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상담사'는 K씨의 이야기를 듣더니  대출이 가능한지 알아보겠다며, 신용조회기록은 남지 않도록 '가조회'를 할테니 주민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K씨는 급한 마음에 몇 가지 개인정보를 알려줬다. 몇 시간 뒤 '김○○ 대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용등급이 낮아서 쉽지는 않지만, 제가 한 번 노력해 보겠다"며 필요한 서류목록을 불러줬다. 그리고는 "제가 신용등급까지 높여 드릴테니 수수료로 20%를 달라"고 유혹했다. 돈이 급한 K씨는 이것저것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며칠 후 서류를 준비한 K씨가 '김○○ 대리'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K씨는 얼마 뒤 지인의 소개로 H캐피탈 상담사를 만나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대출과정에서 K씨는 자신의 신용등급이 6등급에서 9등급으로 떨어진 걸 알게 됐다. 신용조회를 무작위로 10여 차례 이상 해버린 탓이었다. H캐피탈 상담사는 이야기를 듣더니 'LG캐피탈의 소행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이 같은 일이 최근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한동안 잠잠하던 대부업체들의 불법영업이 연말 들어 다시 활개를 치는 것이다. 이들은 지자체에 등록한 '진짜 상호' 대신 LG캐피탈, 삼성캐피탈 등 대기업 계열사를 사칭, 직접 소비자에게 전화를 걸어 대출을 유도하고 있다.

  • ▲ 'LG캐피탈'의 홈페이지. 하지만 이 업체의 진짜 이름은 '론캐피탈대부중계'다. 자기네가 직접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대부업체를 소개해주고 중계수수료를 받는 업체다.ⓒ
    ▲ 'LG캐피탈'의 홈페이지. 하지만 이 업체의 진짜 이름은 '론캐피탈대부중계'다. 자기네가 직접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대부업체를 소개해주고 중계수수료를 받는 업체다.ⓒ

    대기업 계열사를 사칭하는 대부업체는 수백 개가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업체가 ‘LG캐피탈’. 하지만 LG그룹은 지금까지 '캐피탈'을 설립한 적이 없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LG그룹에도 당연히 캐피탈이 있을 거라고 착각, 상담을 받다보니 이들에게 당하는 피해자가 크게 늘고 있다.

    LG그룹 관계자는 “올해만 해도 LG그룹의 상호를 불법 사용한 업체 10개를 잡았었다. 그런데도 등록상호 바꾸고 주소 바꿔가며 계속 영업을 하는 자들이 있다”며 난감해 했다. 어떤 업체는 LG그룹이 제재조치 중임에도 포털사이트 ‘스폰서 링크’에 'LG캐피탈'이라고 광고하고 있다.

    LG그룹과 관계당국에서는 이 상호를 사용하는 업체가 수십 개 이상일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응책이 없어 골치를 썩고 있다. LG그룹 관계자는 “현재 저희도 인터넷 등에 LG그룹을 사칭하는 업체가 나타나거나 임직원들이 스팸문자를 저희에게 전달할 때마다 해당 업체에 연락해 상호사용 중단을 요청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며 난감해 한다. LG그룹이 직접 금전 피해를 본 게 아니고, 불법업체의 실체를 모를 경우에는 경찰에 사건수사를 의뢰하기 어려운 현행 법 때문이다.

  • ▲ 네이버에서 '삼성캐피탈'을 검색한 결과. 진짜 삼성캐피탈은 사라진 지 오래다.ⓒ
    ▲ 네이버에서 '삼성캐피탈'을 검색한 결과. 진짜 삼성캐피탈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상황은 LG그룹 뿐만 아니다. '삼성' 또한 사칭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실제 네이버 등에 '삼성캐피탈'이라고 검색하면 '진짜'인 '르노캐피탈'과 '가짜'인 '삼성캐피탈'이 함께 검색된다. 대부업체의 이 같은 허위과장 영업으로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는 데도 당국에서는 왜 가만 있는걸까.

    대부업체와 대부중계업체의 등록과 관리감독을 담당하는 지자체 담당부서는 나름대로는 대부업체를 관리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털어놨다. 대부업법 상 '대기업 사칭'은 '허위과장광고'에 해당돼 처벌을 받지만 대부분 수백만 원 과태료를 받는 데 그친다고. 수십 억 원 이상을 굴리는 대부업자들이 몇백만 원 무서워 이런 '사칭'을 그만둘 리가 없다는 설명이다. 지자체 담당자들은 "대부업체가 지자체에 등록할 때 대기업과 명칭이 중복되지 않도록 지도하며 최근 대기업 법무팀의 활동을 전하고 있지만 그게 한계"라고 밝힌다.   

    불법금융업체를 단속하는 금융감독원도 이 ‘LG캐피탈’ '삼성캐피탈'과 같은 업체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LG뿐만 아니라 삼성, 신한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 등 대기업과 은행 계열사를 사칭하는 불법금융업체와 중계업체들에 의한 피해가 무척 크다”고 밝혔다.

    금융감독원 측은 “현재 유사금융조사팀에서 대기업 사칭 업체들을 조사해 조치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당초 금융감독원 유사금융조사팀은 불법업체를 조사한 뒤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피해자가 불법금융업체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있어야만 고소고발을 제대로 할 수 있는데다 조건이 충족돼 경찰이 수사를 해도 불법금융업체들의 주소는 가짜였고 ‘상담사’들의 전화도 대부분 ‘대포폰’이어서 수사가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금융감독원은 "불법금융업체들이 활개를 치면서 지자체에 정식 등록한 대부업체나 대부중계업체 일부도 대기업 계열사를 흉내내기도 해 걱정된다"고 설명했다.

    금융감독원은 이어 “현재 상황에서는 대출을 받으려는 분들께서 지자체나 대부업협회, 여신업체협회 홈페이지 등을 통해 정식등록업체인지를 확인한 뒤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특히 대출 호객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주거나 개인정보가 담긴 서류를 보내는 일은 절대 삼가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