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대기업들, 이들 대부분은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이들이 주도하는 국내 산업기술이 언론에 소개될 때면 하나같이 ‘세계최초’ ‘세계최대’ ‘세계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두각을 나타낸 기업들을 보면 ‘세계최초’ ‘세계최고’ ‘세계최대’라는 수식어와는 별 관계가 없는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국내 대기업들은 세계적 흐름과는 별개로 차세대 성장 동력 목표를 정할 때도 이런 ‘최초’ ‘최고’ 등의 수식어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애니콜’ vs. ‘아이폰’ 

    이런 대기업들의 사고방식이 처절한 패배를 보여준 사례가 있다.
    바로 휴대전화 시장이다. 국내 휴대전화 시장은 1984년 AMSP방식의 서비스가 첫 선을 보인 뒤 한동안 미국 모토롤라의 독무대였다. 당시 2킬로그램이 넘는데다 가격 또한 100만 원이 넘었던, 일명 ‘벽돌폰’은 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통화품질, 통화성공률 등으로 인해 거의 장식품 취급을 받았다. 1989년 삼성전자가 ‘애니콜’을 출시하면서 국산 휴대전화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여전히 ‘장식품’이었다.

     1996년 7월 1일 세계 최초로 CDMA 방식이 도입되고, 1997년 11월 PCS 서비스가 개시되면서 국내 휴대전화 시장은 급격히 성장했다. 이때 삼성전자는 ‘애니콜’을 파격적인 가격에 내놓아 국내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이후 10여 년 동안 ‘한국 휴대전화=애니콜’이라는 등식이 통할만큼 ‘애니콜’은 뛰어난 기술력과 높은 완성도로 한국 휴대전화 대표 브랜드가 됐다.

     2005년 6월 모토롤라가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레이저’를 국내에 출시하면서 ‘애니콜’의 점유율이 하락하는가 싶었으나 이내 곧 예전의 인기를 회복했다. 이런 ‘애니콜’이 최근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바로 애플社가 내놓은 ‘아이폰’ 때문. 

    2009년 11월 KT는 ‘아이폰’을 출시했다. SK텔레콤이나 LG텔레콤, 그리고 휴대전화 제조사인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은 ‘디자인이 이쁘기는 하지만, 기술이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닌데 설마 선풍적인 인기를 끌겠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국내 소비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 달 만에 무려 20만여 대가 팔린 것이다. 

    이런 소비자들의 반응에 통신회사는 물론 휴대전화 제조사, 특히 삼성전자는 크게 당황했다.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되기 전까지 ‘옴니아’ ‘코비’ 등 다양한 터치폰으로 국내 시장을 스마트폰 시장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삼성전자는 자신들의 시장을 수성(守成)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전자는 곧 언론을 통해 같은 기간 ‘풀 터치 폰 옴니아 2도 20만 대 이상 판매되었다’고 홍보했으나, 네티즌들과 휴대전화 리뷰어(Reviewer, 제품 등을 면밀히 테스트한 뒤 그 품평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들)들로부터 ‘대리점에 밀어내기 한 물량을 말한 것’이라는 등의 비난을 들었다. 당황한 삼성전자는 곧 100만 원을 호가하던 ‘옴니아 2’의 가격을 10만 원 대로 대폭 낮추는 등 비상대책을 내놨다. 

    그래도 ‘아이폰’의 인기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출시 5개월 만에 ‘아이폰’ 구매자는 50만 명을 넘었다. 그 중 상당수는 ‘애니콜’과 이를 주로 사용하는 SK텔레콤 가입자들이었다. 그 대부분이 그동안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의 소비자 정책에 꾸준히 불만을 제기해왔던 IT기기 전문가 집단으로 알려졌다. 2010년 6월 기존의 ‘아이폰’을 개선한 ‘아이폰 4GS’가 곧 출시된다는 소식이 나오면서 이제 ‘아이폰’ 열풍은 극에 달하고 있다.

     삼성전자 패배의 이유 

    삼성전자는 지금까지 국내 휴대전화 시장에서 뛰어난 제품 완성도와 함께 다른 제조사들이 따라 하기 어려운, 우수한 기술을 적용해 후발업체들을 따돌렸다. 

    이런 일이 습관이 되면서 삼성전자에도 위기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5년 6월 모토롤라가 초박형 휴대전화 ‘레이저’를 출시한다는 소문이 나왔을 때도 삼성전자는 다양한 기능을 탑재한 휴대전화를 출시했다. 2009년 11월 ‘아이폰’이 출시될 때도 삼성전자는 자신들이 만든 ‘풀 터치 폰’이 승리하리라 자신했다. 2009년 2억2천700만 대의 휴대전화를 판매한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만한 태도였다. 

    삼성전자는 10년 넘게 국내 휴대전화 시장을 선도하면서 뛰어난 기술력을 최고의 강점으로 내세웠다. 소비자들 또한 그런 삼성전자의 제품을 믿고 구매했다. 하지만 지난 4~5년 사이 인터넷을 통한 해외구매가 보편화되고 해외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꾸준히 늘면서, 소비자들은 다양한 제품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됐다. 휴대전화 또한 통신방식의 차이로 국내에서 사용할 수는 없는 제품들이지만 단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구매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소비자들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음에도 삼성전자는 변화의 조짐이 없었다. 삼성전자는 공식적으로는 ‘시대의 변화에 앞서나갈 것’이라고 수차례 발표했지만, 정작 내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현재 삼성전자 연구직을 그만두고 벤처사업을 하고 있는 L(34) 씨는 삼성전자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삼성전자 휴대전화 분야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기술을 자랑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곳’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항상 남들보다 더 앞선 기술을 갖고 있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엔지니어들이 제품설계에서 핵심이 됩니다. 디자인은 아직 최우선 요소가 아니에요.” 

    이는 2005년 초 삼성전자 본사에서 근무하는 Y(39) 씨에게 모토롤라 ‘레이저’의 출시 임박을 들었을 때 나왔던 대답과도 일맥상통한다. 

    “아무리 윗선에 이야기를 해도…아시잖아요? 대기업 조직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새로운 일을 만들지를 않아요. 게다가 지금 제품들도 잘 팔리고 있는데 글쎄요, 그런 의견이 받아들여질진 모르겠지만 한 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즉, 삼성전자가 보유한 최신기술을 자랑하고, 남들보다 앞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제품, 제조사의 생산계획에 따라 만들어지는 제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도 삼성전자의 휴대전화는 높아질 대로 높아진 국내 소비자의 감성을 제대로 자극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애플’의 소비자 지향적 인터페이스 

    한편 2009년 11월 이후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아이폰’의 제조사 ‘애플’은 CEO 스티브 잡스의 복귀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후 ‘애플’은 비록 삼성전자나 LG전자, 소니 에릭슨, 모토롤라, 노키아 등과 같은 거대 제조사로 등극하진 못했지만, 매니아 수준의 소비자층은 꾸준히 늘고 있다. 

    일반 소비자들이 ‘애플’의 제품들을 보면 먼저 ‘예쁘다’고 한다. 하지만 IT 기기 전문가들은 ‘애플’ 제품의 가장 큰 장점을 ‘사용자가 마음대로 꾸밀 수 있도록 여백을 준 점’으로 꼽는다. 실제로 예쁜 디자인 때문에 ‘애플’ 제품을 구매한 사람들은 사용하면서 기기의 콘텐츠를 개인의 취향에 따라 꾸밀 수 있도록 만든 그 인터페이스에 ‘감동’한다. 

    멀티미디어 기기인 ‘아이팟’의 경우 콘텐츠를 거의 무제한으로 구매할 수 있는 ‘아이튠스’라는 사이트를 운영, 수천만 곡 이상의 음악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했고, ‘아이폰’ 또한 국내 휴대전화들이 ‘위젯’이라는 형태로 제조사 또는 제조사와 제휴한 기업들이 제공한 것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아이폰’은 아예 사용자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용하고, 그것을 판매까지 할 수 있도록 ‘앱스토어(App Store, 어플리케이션 프로그램 스토어의 줄임말)’을 마련, 사용자들을 제조자로 편입시키기까지 했다. 이런 유저인터페이스를 처음 본 국내소비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처럼 국내 소비자들은 ‘첨단 기술’만 내세웠지, 사용자들의 편의는 거의 고려하지 않은 국산 휴대전화를 외면하고, 대신 사용자에게 거의 ‘무한한 자유’를 선사한 ‘아이폰’을 따르게 된 것이다. 

    과학지상주의 기업의 종말인가 

    단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소비자와 제조사 간의 소통이 가장 활발한 제품 중 하나인 휴대전화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애플이 보여준 대결과 그 결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많다. 특히 과거 일본 자동차 업계에서 닛산과 도요타 간의 경쟁도 우리에게 많은 점을 느끼게 해준다. 

    과거 닛산은 최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일본 자동차 시장을 휩쓸었다. 반면 도요타는 ‘팔릴만한 차’를 만들어내는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닛산의 뒤를 따르기에 급급하던 도요타는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 곳곳에서 판매량을 늘이며 승승장구했지만, 닛산은 결국 도산 위기에 몰려, 프랑스 르노에 흡수당하고 만다. 

    향후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차세대 성장 동력을 찾는 것도 이 같은 기업 간 경쟁에서 배울 바가 많다. 피라드 자카리아, 라비 바트라 등과 같은 미래학자들은 물론 피터 드러커와 같은 경영학자들 또한 “미래는 소비자보다 더 소비자의 마음을 잘 아는 기업이 주도해나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