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 일대의 또 다른 특징은 대한민국 경제의 실질적인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소위 ‘부촌(富村)’으로 일컬어지는 지역으로는 서울 성북동, 평창동, 압구정동, 도곡동, 이촌동, 서초동 등이 꼽힌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또한 여기에 빠지지 않고 회자된다.

    실제 한남동, 이태원동 일대에는 월세 500만 원이 넘는 고급 빌라 말고도 부촌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호화 저택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런 집은 일반 부동산 중개업소에서는 거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전문업소가 나선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저택의 평균 공시가격은 50억 원 이상. 하지만 실제 이 같은 저택의 거래가가 얼마인지는 부동산 업계에서도 추정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저택들조차 초라해 보이는 저택들이 한남동과 이태원동 일대에 숨어 있다. 바로 재벌 총수들의 집이다.

    전경련 회원들의 집단거주지 이태원-한남동

    이태원에 있는 대표적인 호화저택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집. 2006년 공시지가만 85억 원을 넘어 우리나라의 주택 1천301만 가구 중 가장 비싼 집으로 알려져 있다. 대지 5천441㎡(1천650평)에 지상 2층, 지하 2층 구조의 건물 4개 동으로 연면적 9천55㎡에 달한다.

    이태원에는 이건희 회장의 이 저택 이외에도 범(凡)삼성가 재벌들의 저택들이 주변에 모여 있다. 이건희 회장의 자녀들은 물론 이명희 신세계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이 회장의 누이이자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부인인 이숙희 씨 등이 주변에 살고 있다. 여기다 삼성 미술관인 ‘리움(Leeum)’과 삼성문화재단,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도 주변에 있다.
    이건희 회장의 집은 2005년 4월 <월간조선>의 기사를 비롯해 다양한 언론을 통해 보도된 바 있다.

    이때 밝혀진 또 다른 재벌 저택이 농심그룹 신춘호 회장의 집이다. 이 회장 저택 공사 당시 신 회장은 이 회장의 집을 지으면서 자신의 집에서 보이는 한강 조망권을 침해한데다 소음이 심해 생활이 불편하다며 소송을 내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정몽구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근 유동성 위기로 워크아웃을 실시 중인 금호그룹 박삼구 회장,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 풍산그룹 류 진 회장,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 대교그룹 감영중 회장의 집도 이태원 일대에 있다.
    때문에 이들 재벌가의 지분율을 다 합하면 우리나라 증시의 30% 이상을 차지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실제로 재계 전문 매체인 ‘재벌닷컴’이 지난 4월 ‘국내 100대 주식 부호’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평균 연령 53세가량에 6천억 원 대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100명 중 30명이 이태원-한남동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준을 바꿔 100대 기업 총수에 대해 조사한 자료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평균 나이는 63세, 주식자산 보유액은 3천200억 원으로 차이가 있었지만, 그 주거지 중 이태원-한남동이 차지하는 비율은 13%로 2위, 주식 보유액으로는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한남동과 이태원 일대에 거주하는 재벌 회장들을 살펴보면 주로 2세임을 알 수 있다.
    국내 대표적 재벌기업들의 창업세대들이 주로 장충동에 자리를 잡은 뒤 성장해 왔다면, 이들은 부모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후 주로 한남동에 둥지를 튼 것이다.

    이는 재벌의 역사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재벌 기업의 창업자들이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사업보국’이라거나 ‘산업전사’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 정부의 정책을 통해 성장했는데, 그들이 살았던 곳이 을미사변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을 기리는, ‘장충단(奬忠壇)’이 있었으며 박정희 대통령 자택과 가까운 장충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2세는 부모가 살던 곳을 떠나 이태원-한남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로 편리한 교통과 외교관저가 많은 덕에 안전한 치안, 서민들이 살기에는 불편한 위치 등이 이유로 꼽힌다. 하지만 그 덕에 이 지역은 전경련 회원들의 집단 거주지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극과 극, 재벌 저택과 재개발 지역

    이처럼 이태원과 한남동 일대를 돌아보면 우리나라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재벌동네’라 일컬어지는 성북동처럼 배타적인 것도 비슷하다. 대부분의 저택은 4~5미터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마다 CCTV와 동작감지기 등 첨단 경비장치가 달려 있다.

    여기다 외교관 관저 등이 많은 탓에 곳곳에 경찰 초소가 있고, 경찰 초소가 없는 지역은 사설 경비원들이 24시간 대기하면서 주변을 감시한다. 이런 탓에 재벌 저택이 많은 곳을 지나다녀 보면 행인을 구경하기 어렵다.

    이 동네는 보통 사람들의 상상과는 달리 길가에 고급차가 즐비하지도 않다. 이건희 회장 저택의 차고가 40여 대, 구본무 회장의 차고가 5~6대를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재벌 회장 저택이 차고를 넉넉하게 준비해놨기 때문이다.

    이런 재벌들의 저택은 그랜드 하이야트 호텔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가량까지만 뻗어 있다. 하지만 그 바깥으로 나가면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용산구는 2004년부터 재개발 붐이 불면서 땅값 거품이 극심했던 곳 중 하나다(일부 지역은 한 때 평당 5천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가 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현재 재개발 조합원을 대상으로 합의서를 받고 있는 한남동과 이태원동 일대에는 지은 지 수십 년은 넘은 듯한 서민주택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기초수급생활대상자와 같은 사회취약계층과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중국 등에서 온 불법체류자들도 상당수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두 곳 사이에는 제일기획 본사와 외국인 전용 클럽과 바, 트랜스젠더들이 일하는 술집들이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불과 수 백 미터를 경계로 극과 극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부자 저택이 나오는 것 등이 현재 우리나라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이 돼버린 요즘, 이태원-한남동 일대는 오늘도 이 동네를 구경하려는 사람들, 혹시나 재벌들을 직접 볼 수 있을까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