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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복수에 대한 고사(故事)는 많다.
◆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잉태한다
그 중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고사는 중국 춘추시대의 오왕(吳王)부차(夫差) 와 월왕(越王)구천(句踐)의 복수전에서 와신(臥薪)과 상담(嘗膽)이 나오는 이야기이다. 부차는 아버지 함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와신하면서 월왕구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힘을 길렀다.
부차는 드디어 회계산(會稽山)에서 아버지의 원수인 월왕구천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며 월나라를 오나라의 속령으로 만들고, 구천을 신하로 삼아 일개 농사꾼으로 몰락시켜 그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부차는 적의(敵意)를 품은 구천을 소홀히 관리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구천은 회계산의 치욕을 복수하려고 쓰디 쓴 쓸개를 매일 맛보면서 비밀리에 군사를 양성했다. 회계의 치욕으로부터 12년간 그 같은 상담끝에 오나라 수도 고소(姑蘇)에 쳐들어 갔다. 구천은 7년간의 전쟁에서 오왕 부차의 군대를 격멸시키고 회계의 치욕을 복수했다.
그러나 월왕구천도 항자불살(降者不殺) 이라는 인(仁)을 존중하여 관용을 베풀어 오왕부차를 죽이지 않고 용동(勇東)땅에서 여생을 보내게 했다. 하지만 부차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이 고사에서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인가? 와신과 상담을 하면서까지 원한을 갚는 용(勇)의 교훈을 얻는 것은 당연하고, 상대를 꿰뚫어 보는 지(智)와 항자불살의 인의 교훈도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또 하나, 유의하여야 할 것은 원한 맺힌 증오의 원수에 대한 복수 성공은 또 하나의 증오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잉태하면서 끝난다는 사실이다. 와신의 복수 성공은 상담의 복수를 잉태하였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증오는 자연의 재앙인 물의 피해, 불의 피해, 지진의 피해, 기상이변의 피해보다도 훨씬 더 파괴적일 수 있다. 구족(九族)을 멸족시키는 것은 말 할것도 없고 가스실에서 수백 만명, 수용소 군도에서 수백, 수 천 만명, 도시나 농촌이나 길거리 등의 킬링필드에서 수백, 수 천만 명의 사람들을 살육한다. 그렇다면 와신상담의 복수 잉태를 단절하면서 화합을 이루는 역사의 교훈은 없는 것인가.
◆ 미국 남북전쟁 그랜트 장군의 교훈
근대사에 나오는 미국의 남북전쟁 고사가 떠올랐다. 미국 제16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정책에 반기를 든 미국 남부 11개 주는 남부 연합을 결성하여 재퍼슨 데이비스를 자기들의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미연방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한 후, 22개주로 남아있는 링컨 대통령 휘하의 북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서, 1861년 4월 12일 미국의 남북전쟁은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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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리우스 그랜트 장군 ⓒ 자료사진
남북전쟁 당시 미국의 총 인구는 약 3천 100만명이며, 이중 백인은 2천700만명이고 흑인이 약 400만명이었다. 백인 총 인구 가운데 북쪽 인구가 약 1천 900만명이며, 남쪽 인구는 약 800만명이었다. 이렇듯 인적 자원면에서는 북측이 절대 우세하였으나, 남군에는 용병술이 뛰어난 명장들이 기라성 같이 있었다. 그래서 전쟁초기에는 남군이 다소 우세 했으나, 북군도 만만치 않아 결정적 승패는 판가름나지 않은채 전쟁은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노예 신분인 흑인들이 북군에 자진 입대하여 정규군 복을 입고 남군과 전투하는 병사 수가 점차 늘어났다. 남북전쟁이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전력 균형은 깨지기 시작하여 승리는 북군측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남북전쟁 4년간에 동원 된 북군 총 병력수는 약 200만명이며, 이 중 36만 4천 511명이 전사했다. 남군 총 병력수는 약 65만명이며, 약 26만명이 전사했다.
남군 총 사령관인 명장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은 남부 연합 수도였던 버지니아의 리치먼드가 함락되자 패잔병을 이끌고 서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다가 1865년 4월 8일 이미 대세는 치명적으로 기울어졌으며, 패배를 딛고 남군이 소생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상황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더 이상 쓸데없이 남군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끝에 북군에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연락 장교단을 북군 총 사령관 유리시스심프슨 그랜트 장군에게 보내 1865년 4월 9일 정오, 애포맨턱스에 있는 매클린의 집에서 만나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살육전이 치열하게 이어진 4년간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상대방에 대한 원한의 적개심이 하늘을 찌를 듯 고조되어 있었다.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은 “아마도 내일 내가 항복한 후 총살 당할지 모르겠다”는 예상을 했다. 리 장군은 명예를 존중하며,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줄 아는 장군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후를 맞을 때, 명예로운 군복 정장을 하고 태연하게 가려고 최고의 군복을 입고 항복 장소로 갔다.
이에반해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은 야전에서 전투하면서 신고 있던 흙 묻은 군화에다가, 빛 바랜 낡은 야전 군복을 입고 리 장군을 맞이했다. 항장(降將)은 자신의 군도(軍刀)를 허리에서 떼어서 적장에게 바치는 것이 관례다. 리 장군이 군도를 풀어서 그랜트 장군에게 바치려고 하자, 그랜트 장군은 손을 내저으면서 그대로 차고 있으라고 했다. 파격적인 예우였다.
리 장군은 1807년생이며, 그랜트 장군보다 15년 연상이었다. 리 장군은 1892년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1843년에 중간 성적으로 졸업한 그랜트 장군보다 육사 14년 선배였다. 리 장군은 1852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도 지냈다. 그랜트 장군이 겸손하게 말했다.
“리 장군님, 멕시코 전쟁(1846~1848년)때, 제가 장군님을 모셨는데 기억이 나십니까?”
의외의 첫 마디에 리 장군은 약간 놀라면서 대답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서로 기억을 더듬으며 멕시코전쟁, 웨스트포인트 이야기 등으로 대화의 꽃을 피웠다. 남북전쟁같은 껄끄러운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항복 문서에 대한 서명도 동등하고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원한은 단숨에 사라졌고, 우정의 화합으로 일체감을 갖게됐다.
처형될 것을 각오하고 적장 그랜트 장군을 찾아간 리 장군은 너무도 의외의 관대한 예우를 받아 그랜트 장군의 관용에 감격했다. 그리고 그랜트 장군은 위대한 통합을 이루려는 진정한 관용의 거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랜트 장군은 리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리 장군님을 비롯하여 남군의 모든 장병들은 지금부터 신속히 고향으로 돌아가 자유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말을 가지고 있는 장병들은 말을 타고 가십시오. 말이 없는 장병들은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항복한 남군 장병들을 포로로 억류하지 않으며, 군용 말도 빼앗지 않고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내친김에 리 장군이 그랜트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청탁을 했다.
“그랜트 장군님, 지금 남군 장병들은 몇 끼를 굶고 있습니다.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랜트 장군은 즉석에서 부하에게 지시하여 2만 5천명 분의 식량을 굶주린 남군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마음속으로 울며 감동한 것은 리 장군 뿐이 아니었다. 4년간의 남북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고 적개심에 불타던 남부 11개주 전체 약 800만 백인들의 북군에 대한 적개심이 따뜻한 봄 햇살에 눈이 녹아버리듯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869년 그랜트 장군은 미국 제18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8년간 대통령직에 있었고, 1887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미국 지폐 50달러에 그려진 초상화가 바로 그랜트 대통령이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그랜트 장군의 큰 관용, 그것은 오랜 앙금으로 남을뻔한 남북 전쟁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결정적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진정한 승자가 되려면 상대에 대한 배려, 그것도 진정성 어린 배려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을 그랜트 장군은 교훈으로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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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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