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국민이“天安艦을 잊지 말자”는 검은 리본을 달자

    1939년9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나치 독일이 구 소련의 독재자 조세프 스탈린(Joseph V. Stalin)과의 밀약(密約)에 따라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했지만 고립주의를 고수하는 미국은 참전(參戰)을 거부하고 국외자(局外者)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인 1941년12월7일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제국(日本帝國) 연합함대의 6척의 항공모함을 발진한 전폭기들이 하와이 주 오아후 섬의 진주만(眞珠灣•Pearl Harbor)을 선전포고 없이 강습(强襲)하는 일이 벌어지자 미국의 태도는 하루 밤 사이에 바뀌었다.

    미국의 프랑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다음 날인 12월8일 의회 연설을 통해 일본에 대한 선전(宣傳)을 포고했고 이에 맞서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던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무쏠리니(Benito Mussolini)의 이태리도 미국에 대해 선전을 포고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드디어 본 무대의 막을 열었고 이로써 그로부터 4년 뒤에 있게 될 연합국의 승리에 의한 전쟁의 종결은 예정된 수순이 되었다.

    일본의 하라 타다이치 제독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직후 “우리는 진주만에서 위대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로써 전쟁에서는 지게 되었다”고 술회했고 진주만 기습을 지휘한 야마모토 제독은 “우리는 이제 잠자는 사자(獅子)를 깨워 일으켰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사람 모두 일본의 패전(敗戰)을 예감(豫感)한 것이다.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을 남달리 반긴 사람은 유럽에서 독일과 이태리에 대한 힘겨운 전쟁을 주도하고 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영국 수상이었다.

    처칠은 다음과 같은 어록(語錄)을 남겼다. “미국의 참전은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식이다. 이제 미국의 참전으로 우리는 승전(勝戰)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히틀러와 무쏠리니의 운명은 끝장이 나게 되었다. 일본은 이제 분쇄될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개전(開戰) 초기 일본군에 밀려서 파푸아 뉴기니아(Papua New Guinea)까지 밀려났던 미군으로 하여금 엄청난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태평양 상의 많은 섬들을 하나씩 하나씩 탈환하는 유혈전쟁(流血戰爭)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든 비결(秘訣)이 있었다.

    그것은 1941년12월7일의 진주만 기습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일치단결된 복수심이 그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국민들은 하나의 슬로건 아래 굳은 단결을 유지했다.

    “진주만을 기억하자!”(Remember Pearl Harbour!)였다.

    지난 3월26일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발생한, 북한의 소행(所行)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천안함’ 격침 사건은 북한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저지른 또 하나의 한반도판(版) ‘진주만 기습’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미래가 있는 현명한 국민들이라면 그들도 1941년12월7일 진주만 기습 사건 이후 미국 국민들이 보여주었던 행동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서 벤치마킹 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 국민들이 “진주만을 기억하자!”는 구호 아래 단결했던 것처럼 대한민국 국민들도 “천안함을 기억하자!”는 구호 아래 일치단결하여 이번에 이 사건을 일으킨 사악(邪惡)한 세력을 철저하게 응징함으로써 이들이 다시는 이 같은 불장난을 저지를 생각을 품지 못 하도록 해야 한다.

    필자는 이를 위한 국민운동을 제창(提唱)한다.

    미국인들이 “진주만을 기억”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던 것처럼 우리도 “천안함을 기억”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필자는 보수•애국 운동 전개를 목적으로 하는 시민운동 단체들과 재향군인회, 그리고 기독교 교회와 천주교 성당 및 불교 단체들을 포함한 종교단체들이 중심이 되어서 전 국민이 “천안함을 기억하자!”는 글이 씌워진 검은 색 리본을 가슴에 다는 캠페인을 즉각 전개하기 시작할 것을 제창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명박(李明博) 정부가 이번에 ‘천안함’ 침몰로 전사(戰死)한 44명의 해군 장병들의 장례를 ‘해군장(海軍葬)’으로 거행하기로 한 결정을 바꾸어 ‘국민장(國民葬)’으로 격상하고 ‘국민장’ 장례식을 계기로 전 국민이 “천안함을 기억하자!”는 글이 씌워진 리본을 가슴에 달도록 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건의한다.

    이 리본을 가슴에 다는 운동은 북한이 ① 이 사건의 범행(犯行)을 시인하고, ② 사건의 책임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며, ③ 사건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정당한 배상(賠償)을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④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천안함’ 피격•침몰 사건에 대하여 북한이 시인하고 책임을 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남측에 의한 ‘자작설(自作說)’로 대응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북한의 과거의 행적(行蹟)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은 그들이 일으킨 6.25 전쟁에 대하여 지금도 여전히 ‘북침(北侵)’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68년의 1.21 청와대 습격 기도와 대규모 무장공비의 동해안 상륙 사건은 물론 1983년의 미얀마의 아웅산 국립묘소 폭파 및 1987년의 대한항공 여객기 공중폭파 등 북한이 자행한 일체의 대남 무력 및 폭력 도발에 대해 “남측에 의한 자작극”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번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도 한 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북한은 인양된 함미(艦尾) 부분의 절단 부분 검증을 통하여 “어뢰(魚雷)에 의한 피격(被擊)” 가능성에 대한 신빙성이 나날이 높아지자 최근에는 상투적인 “남측에 의한 자작극” 주장을 공공연하게 내세우기 시작하고 있다.

    북한의 이 같은 적반하장의 작태는 북한이 반복하여 자행하는 대남 무력 및 폭력 도발에 대하여 남측이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의 독재정권으로 하여금 “도발을 해도 응징은 없다”고 믿도록 만든 데서 초래된 결과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북한이 자행한 도발 행위에 대하여 상대측의 대응에 따라서 스스로의 범행을 시인하고, 비록 만족할 만 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책임을 수용하는 조치를 취한 전례(前例)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976년에 발생했던 8.18 판문점 도끼 만행(蠻行) 사건 때와 1997년에 동해안에서 발생했던 상어급 잠수함 침투 사건 때가 그 같은 경우였다.

    그밖에도 김일성(金日成)은 1972년5월4일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李厚洛) 당시 남측 중앙정보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느닷없이 북한군 124군 부대원 31명이 휴전선을 침투하여 서울의 청와대 습격을 기도했던 1968년의 1.21 사태를 스스로 거론하여 정중하게(?) 사과했던 일도 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께 말씀드리시오. 그 무슨 사건이더라. 청와대 사건이라고 하던가. 그것은 박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적으로 우리 내부의 좌경맹동분자들이 저지른 짓이지 결코 내 의사나 당(黨)의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우리도 몰랐습니다. 보위부 참모장, 정찰국장 모두 철직(撤職)하고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이 그날 있었던 김일성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