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머리말

  • ▲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뉴데일리
    ▲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뉴데일리


     
    우남 이승만(1875-1965) 박사의 생애는 독립, 건국, 호국, 통일로 상징된다. 그 중 그가 90평생을 살면서 가장 어렵고 힘든 가운데 심혈을 기울였던 일은 역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독립이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가 해외에서 반평생을 떠돌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이승만의 실질적인 독립운동은 1898년 열강의 조선에 대한 이권침탈에 맞서면서부터였다. 그때는 조선의 국력이 미약했으나 조국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압적인 한일합방으로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상실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조선과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열강, 특히 일본에 의해 국권이 찬탈되는 과정에서 쓰러져가는 조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그가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와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고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미국 대통령 또는 국무장관을 통해 독립유지를 호소하거나 언론에 일본의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는 기고문을 쓰거나 또는 전국을 순회하며 실시하는 강연 등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시점에 나라를 빼앗기자 나라를 되찾기 위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는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 이승만은 독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본고에서 다룰 시기도 바로 이 시기로 제한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이 시기 이승만의 독립외교는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 국무장관, 의원들에게 독립을 호소하거나, 미국 내 유력인사들로 친한 그룹을 형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무부나 의회에 한국 독립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게 했다. 또한 이승만 자신은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거나, 한국독립에 도움이 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거나, 미국 내 한국 독립의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담은 저술활동을 비롯하여 연설, 강연, 기고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런 이승만의 독립외교를 통해 나타난 특징적인 요소들을 개별 내지는 종합적인 분석을 통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Ⅱ. 이승만의 독립운동 배경과 독립외교 채택 이유

    1. 이승만의 독립운동 배경

    이승만이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게 된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기독교적 신앙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양의 정치적 평등과 자유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승만에게 기독교는 그의 일생을 두고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더구나 독립운동시기 이 관계는 더욱 깊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믿었던 기독교는 그가 일제 강점기에 ‘희망 없는’ 독립운동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어 나갈 수 있게 해준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에 대한 그의 믿음은 정치사상 못지않게 중요하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 이승만의 기독교에 대한 믿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반신반의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그가 장로교 목사 제임스 게일(James A. Gale)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신앙고백서와 같은 글을 보면 당시 그의 기독교에 대한 내면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9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내[이승만]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니 정말로 알 수 없었다. 나는 자문했다. “그들이 들려주는 것처럼 그처럼 눈부신 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그따위 어리석은 신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자신들은 믿지도 않으면서 무지몽매한 우리 백성들을 유혹하기 위해 하는 소리는 아닌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 교회에 나가는 것이 놀랄 일도 아니지. 부처와 공자의 가르침을 공부한 사람들이 그런 황당한 것을 믿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나는 다소간 마음을 진정하고 배재학당에 다닌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실토했다. 어머니는 내 손을 붙들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가(어머니는 내가 19세가 될 때까지 그렇게 불렀다), 너는 천주학쟁이가 되려는 거냐?”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나는 “아닙니다. 제가 그런 말에 솔깃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들 종교를 믿는 선비보셨어요?”하고 말씀드렸다. 내말에 어머니는 조금은 안심하셨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못하셨다. 어머니는 얼마 안 있어 아들이 서양문명의 영향을 받고 급작스럽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배재학당에 다닐 때만 해도 이승만은 아직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두텁지 않았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믿음은 훨씬 뒤 한성감옥에서 일어나게 됨을 알 수 있다. 1899년 감옥에서 중죄인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밤에는 칼을 쓰고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강렬한 삶의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그 순간 그는 “하나님, 내 나라와 영혼을 구하옵소서!”라고 크게 외치면서 간절히 기도를 했고, 그 뒤 까닭모를 평온함에 젖어들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후 기독교 신앙은 그가 평생 독립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독립운동 시기는 물론이고 6.25전쟁의 어려운 고비 때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님에게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 본 프란체스카 여사도 대통령의 기도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나님, 이 미련한 늙은이에게 보다 큰 능력을 허락하시어 고통 받는 내 민족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주소서!”

    한편 이승만은 배재학당과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배우고 들은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그에게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는다.”거나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와 같은 주장은 엄격한 봉건질서하의 군주제와 신분제 밖에 모르던 이승만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서양의 정치사상과 민주제도는 이승만의 정신세계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이러한 서양의 정치사상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한 믿음도 한층 더 깊어지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대해 그는 앞서 장로교 목사 게일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글에서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나가게 된 것은 오직 영어를 배우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영어를 배우겠다는 포부는 달성했지만 곧 영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정치적 평등과 자유사상을 알게 된 것이다. 조선인들이 당하는 정치적 압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국가의 국민들이 통치자들의 압제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내 가슴에 어떤 혁명이 일고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런 정치 원리를 채택할 수만 있다면 고통에 처한 동포들에게는 대단한 축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깨닫게 되었다. 정치적 변혁은 저절로 이룩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단지 법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국민들, 특히 지배층이 변혁을 지지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
    나는 차츰 아침 예배 시간에 참여하게 되었고, 예수는 내세 구원의 상징적 존재 이상이라는 설교를 들었다. 그분은 형제와 같은 사랑과 봉사의 복음을 전한 위대한 스승이었다. 나는 이 이방종교의 가르침을 차츰 숭상하게 되었고, 내 가슴에는 예수도 공자와 동일한 반열에 속하는 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후 이승만의 서양에 대한 정치사상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한성감옥서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가 감옥에서 저술한《독립정신》은 그의 앞으로의 인생행로에 지침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저서를 통해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당시 조선인들이 그들의 후진성과 무기력을 딛고 자주독립을 누리는 보람찬 시절을 맞을 때 조선도 민주국가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또 그는 이 저서에서 “개명된 나라의 국민들은 각자의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그들의 엄숙한 의무이다. 나라가 그렇게 통치되면 백성들 모두가 나라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치자에 대항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나라의 존재는 국민 모두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민주국가가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할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집단과 비슷한 것이다. 백성들은 나라 안에서 힘을 합쳐 생존을 도모하고, 관리들은 나라의 일을 처리하도록 책임진 사람들이다. 백성은 나라라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그들의 도움 없이는 관리들도 힘을 쓸 수 없다. 백성들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지 않으면 악이 스며들게 마련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렇듯 이승만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했던 대다수의 조선 후기의 개명한 개혁가들과는 달리, 그는 기독교를 통한 완전 서양화를 주창했던 20세기 한국의 지성계에서 가장 빨리 서양의 정치사상과 종교를 이 땅에 도입하려고 했던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혁명아(革命兒)였다.

    2. 이승만의 독립외교 채택 이유

    이승만은 철저하게 독립외교노선을 지향하였다. 그의 독립외교노선은 평화적인 외교방식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국제정치학자로서 그의 뛰어난 학식과 현실적인 국제정치 감각에 바탕을 둔 실리외교에서 나왔다. 그는 그 만큼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1945년 이전 이승만의 최우선 당면과제는 한국의 독립이었다. 그는 그러한 독립을 달성하는데 있어 하나의 원칙과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민의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면서 가급적 최소한의 희생으로 독립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추구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평화적 방식에 의한 독립외교”였다.  

    이승만의 독립외교는 다양한 외교방법과 수단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자칫 한국민의 커다란 희생을 가져올 수도 있는 무력혁명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옥중(獄中) 동지인 박용만이 한국의 독립은 일제에 대항하는 무력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이를 추진했을 때 이승만은 반대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승만은 무력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서구열강의 외교적 지원과 국민들의 동정심 획득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박용만은 무력혁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하와이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병학교(兵學校)를 설립하고, 규모는 작았지만 사기가 충천한 군대의 모병과 훈련, 지원에 자신의 정력과 능력을 쏟았다. 그는 이승만이 자신의 군대 양성계획을 지원하고 한인기독학원과 병학교가 합병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런 호전적인 자세는 일본의 동북아시아 지배 토대위에 태평양의 평화를 실현하려는 영국과 미국의 정책에 역행하는 것이며, 우방을 잃게 된다고 믿었다. 이렇듯 그는 국제현실정치에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외교적 노력과 활동에 두고 이를 실천하여 나갔다.
    이승만의 독립외교노선은 1919년 3.1운동으로 더욱 굳어졌다. 박용만은 이번 기회에 국내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향한 국민들의 열의를 과시해야 하며, 자주독립을 향한 민족적 열망은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에도 부합해 한국의 무장봉기는 자유세계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아 일제의 막강한 힘도 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유혈 봉기가 해결책은 아니라고 응수했다. 4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 세계가 살육에 염증을 내고 있는 마당에 또 피를 흘리는 일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또한 일제가 무법자들에 의한 무고한 양민의 피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연합국의 지지를 받을 것이 뻔했고, 무력항쟁이 시작되면 서방 지도자들은 세계대전에서 연합국과 싸운 일본 편에 설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은 무력항쟁은 최악의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중간노선으로 비폭력저항을 주장했다. 자유를 위한 혁명투쟁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의지를 확실히 보여줄 전국적 시위가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전국적인 비폭력시위로서, 인도에서 간디가 유사한 운동을 벌이기 3년 전이었다. 이때도 박용만은 일제에 대항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켜 한국인들의 결의를 보여주자는 강경론을 폈지만 평화적 시위 방식이 채택되었다. 사상 처음으로 비폭력ㆍ무저항 시위가 전국 규모로 조직되어 전개되었던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러시아에서 정권을 쟁취한 공산당과의 긴밀한 유대를 지지했고, 세력다툼을 벌이던 중국의 여러 파벌 중 지지하는 세력도 사람마다 달랐다. 파괴 활동이나 유격전, 일제 요인 암살 등 적극적인 투쟁에 나설 것을 주장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무력항쟁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일본과 실제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국 민족주의자들과 자주 접촉했고, 중국인들은 만주와 한국의 일본군 보급망과 기지를 파괴하는데 이들이 협력하기를 기대했다. 한인애국자들은 중국정부로부터 피신처나 자금, 군수품 지원 등 실질적인 협력을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정책에 반할 뿐 아니라 그것을 위태롭게 만들 노선을 택해야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무력항쟁이 승리를 거둘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일제의 무단통치를 강화할 우려가 있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견지해 온 평화적 호소정책을 주장했다. 희망의 서광이 있다면 강대국 정부와 여론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렇듯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 국민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평화로운 방식을 통해 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런 외교노선에 대해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실패한 운동으로 규정했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외교적  해결책을 계속 추구해 나갔다. 그때 이승만을 지탱시킨 것은 종교적 신념, 독립회복에 대한 확신, 그리고 어려서부터 익혔던 서예(書藝)였다.
    한국의 독립 회복을 불가피한 것으로 확신했던 그는 아시아 정세의 논리적 전개과정으로 보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추구하고 노선이 독립달성을 위한 최상의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것이 이승만으로 하여금 끝이 보이지 않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했던 힘의 원천이었다.


    Ⅲ. 미국 중심의 독립외교 전개

    독립운동기 이승만의 활동무대는 주로 미국이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승만은 미국 내의 교포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이승만이 이처럼 미국에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한 데에는 독립협회에서의 활동과 그로 인한 옥고(獄苦),《독립정신》의 집필, 한인 최초의 박사 등 화려한 이력이 한몫을 단단히 하였다.

    그러나 화려한 이력(履歷)보다 그를 지도자로 이끈 더욱 중요한 요소는 그가 한국의 독립은 죽지 않았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자유가 있는 모든 한인 동포들의 1차적 목표는 조국의 독립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했던 데에 있었다. 이는 이승만 자신에게는 지도력을 발휘할 동기를 주었고, 대다수 미국 교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끌어 모은 계기가 되었다. 즉, 미국의 한인교포와 이승만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에 해당하는 수어지교(水魚之交)의 관계였다.

    또한, 이승만이 미국에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도 미국 국민들의 관용심과 공평성을 크게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인들이 정의를 향한 강한 이상주의와 남을 배려하는 친절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승만이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배경에는 그가 미국에 도착할 때 받은 첫 인상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첫 인상은 미국과 한국의 엄청난 격차였다.
    하지만, 그것은 물질적 발전도, 최신 발명품도, 산업주의도, 하늘로 치솟은 마천루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미임 책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에서 경시되던 인간 생명과 노동을 가장 고귀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어느 날 그[이승만]가 뉴욕에서 목격한 일은 그런 생각을 가장 강력하게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한 이민 노동자가 자신이 몰던 마차에서 뛰어내려 비쩍 마른 늙은 말을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저마다 그의 행동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잔뜩 화가 난 한 부인은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서 철장 신세를 지도록 하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누군가의 일이 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짐승들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준 그 사건은 얼마 동안 이승만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바탕위에서 이승만은 대미 중심의 독립외교를 전개하였다. 그가 미국을 택해 독립운동을 하게 된 데에는 그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잘 알고 있던 그의 정세판단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승만과 미국과의 정치적 인연은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부터 매력을 느꼈던 자유민주주의 제도나 정치사상을 실천하는 모범국가로 미국을 인식했고, 이는 그가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정치학과 미국사를 공부하면서 이러한 확신을 더욱 깊게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미국에 대한 그런 신뢰 외에 동양에서 태어나고 동양의 학문을 익힌 이승만은 극동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일본 세력이 언젠가는 미국과 충돌할 것으로 확신했다. 미국의 국익 보호와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불가피할 것으로 예견했다. 그런 이유들로 그는 독립운동은 미국의 여론에 호소하는 일에 치중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토대위에서 그는 1919년 7월 5일 임시정부에 보낸 장문의 보고서에서, “당분간 우리는 미국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집중적인 노력이 아니고는 효과를 볼 수 없다.”고 말하면서 미국 중심의 외교를 전개할 것을 천명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자마자 워싱턴에 자신의 본부인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를 설치하여 독립외교를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당시 이승만으로서는 구미위원부를 한국대사관으로 부르고 싶었지만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Ⅳ. 국제외교의 틀과 격을 갖춘 품위있는 외교 활동

    1919년 3.1운동 후,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의 수반(대통령이 없는 국무총리)으로 선출되었고, 이어 한성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로 뽑혔다. 그는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집정관총재라는 직함을 대통령(President)으로, 국호를 대한공화국(Republic of Korea)으로 번역해 사용했다.
    이때부터 그는 이 직함들을 사용하며 국제관례에 따른 외교적 틀 속에서 격식을 갖춰 활동하였다. 즉, 그는 1919년 6월부터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그는 워싱턴의 대한공화국 공사관(구미위원부)에 본부를 두고 1919년 10월부터 다음해 6월말까지 8개월 동안 미국 각지를 돌며 대한공화국 지지를 호소하는 강연을 했다.

    한편 한성임시정부 조직을 토대로 각지의 임시정부 통합을 추진하여 1919년 9월에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세워지게 됐고, 임시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됐다. 하지만 그는 워싱턴에 그대로 있으면서 1919년 8월 25일에 구미주찰위원부(歐美駐紮委員部ㆍThe Korean Commission to Europe and America, 이후 구미위원부로 개칭)를 설치하고, 미국정부를 상대로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설득해 나갔다.

    구미위원부는 창설초기부터 워싱턴 군축회담이 종결될 때까지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지만, 그 후 일본에 의해 만주사변이 발발한 1931년까지는 활력을 되찾지 못했다. 서방 강대국들은 팽창하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위험을 고집스레 외면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에 의도적으로 등을 돌렸지만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유지하면서 독립 요구의 정당성을 계속 주장했다.

    구미위원부는 미국의 여론을 한국인 편으로 만들기 위한 선전기구였다. 그것은 언젠가는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하게 될 것이고 그때 한국이 독립하게 된다는 이승만의 생각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일본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이에 주목하는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1939년 4월에 이승만은 세계대전의 발발을 예감하고 워싱턴으로 돌아와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 6월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에 대항한 한국인들의 투쟁 상황을 설명하고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이에 굽히지 않고 그의 독립외교의 최대 목표인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롯하여 헐 국무장관과 국무부 극동국장(Hornbeck)과 관리들에게 서한을 보내 임시정부의 승인을 줄기차게 요청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1943년 11월 카이로에 모인 미ㆍ영ㆍ중 원수(元首)들로 하여금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켜 준다는 카이로 선언을 채택하는데 근원적으로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Ⅴ. 국제상황에 맞는 적시 적절한 외교 전략 구사

    이승만은 독립외교를 전개하면서 국제상황에 맞는 외교 전략을 융통성 있게 구사했다. 이는 한국의 상황과 일본의 움직임, 그리고 세계를 움직이는 강대국들의 향배를 주시하며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외교정책 또는 전략을 구사하며 한국 독립을 호소하고 동북아시아 연맹구축을 시도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노력하였다.  

    첫째, 이승만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강하고 강대국이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일 경우에는 국제회의를 통해 한국독립을 호소하거나 청원하였다. 이 시기는 바로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전의 1920년대 상황이다.

    둘째,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에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분위기가 되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동북아시아에 이해관계가 있는 중국과 소련을 움직여 동북아시아 연맹을 구축하여 일본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동북아시아 연맹구축을 시도하였다. 이 시기는 바로 1930년대 상황이다.

    셋째, 이승만이 예상한대로 일본이 드디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그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총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는 1940년대로 1945년 8.15광복 때까지 지속되었다.
      
    1.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 제출

    이승만은 1917년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된 후 한국대표 자격으로 국제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그는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열린 약소민족대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그의 평생 후원자가 될 변호사 존 스태거스(John Staggers)를 만났고, 이어 1919년 초 열릴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하려고 했으나 미국 정부가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이때 그의 절친한 동지인 정한경(鄭翰景)이 “어차피 당장 독립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장차 완전 독립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밑에 당분간 두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한국의 위임통치안을 들고 왔다.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된 이승만은 우선 그것이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1919년 3월 3일 정한경과 공동명의로 백악관에 보내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나중에 이승만의 비판자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열릴 9개국 군축회의(1921.10월~1922.1월)에 임시정부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워싱턴 회의는 근대 들어 나폴레옹의 대외침략이 실패한 결과 유럽지도를 새로 그리게 된 1815년의 비엔나 체제, 1871년 이후에 형성된 비스마르크 체제, 그리고 1919년 이후의 베르사이유 체제에 이어 제국주의 열강간의 힘의 균형을 재편성한 워싱턴 체제를 구축한 세계 정치질서의 새로운 판짜기였다. 2년 전의 베르사이유 체제가 영국ㆍ프랑스를 중심으로 성립된 것이었다면 워싱턴 회의의 개최와 체제구축은 미국의 주도에 영국이 동조하고 협력함으로써 성사된 것이었다. 미국은 영국을 동반자로 끌어들여 일본의 팽창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은 일본과 3차례(1차: 1902년 2월, 2차: 1905년 9월, 3차: 1911년 7월)에 걸친 영일동맹을 체결하며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국제사회의 흐름을 읽고 한국의 독립을 청원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절당하였다.

    이 회의에서 그의 독립외교론이 별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자 한국인들 사이에서 그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이에 실망하지 않고 국제정세를 관망하면서 그의 독립외교의 뜻을 굽히지 않고 진행시켜 나갔다.

    2. 동북아시아 연맹 구축 외교

    1931년 9월 일본군의 공격으로 촉발된 만주사변은 수차례에 걸친 이승만의 경고가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는 이제 최소한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들은 아시아 대륙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의 국권회복을 외치는 자신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더군다나 만주에는 일제를 피해 넘어 간 1백만 이상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정치적 망명자들은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세력 확산에 따라 다시금 그들의 지배하에서 가혹한 취급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승만은 대외적인 승인여부에 관계없이 망명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그들을 대변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 및 하와이 교민들과 상의한 결과 제네바 행을 결정했다. 일본의 만주침략을 논의하는 국제연맹 대표들을 상대로 직접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그의 활동은 회의에 참석한 국가들의 동정적인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국제연맹을 주도하는 몇몇 강대국들의 막후 절충에 의해 이승만의 노력은 무산되었다.

    그 때 이승만은 모스크바행을 결심했다.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일본 세력의 팽창에 큰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또 다른 이유는 시베리아와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한인 지도자들의 협력 가능성을 타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비엔나 주재 중국 대리공사 당데키엔(董德乾) 박사는 이승만의 옛 친구였다. 그는 이승만과 소련공사 페테루스키를 임페리얼 호텔의 만찬에 초대했다. 당 박사는 점증하는 일본의 위협에 맞서 아시아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한국 국민의 지도자 이승만은 동맹에 필수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공감한 페테루스키 공사는 본국에 이승만의 비자 발급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승만은 신분을 숨긴 채 3등 승객으로 모스크바 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비자가 발급된 것은 착오였으니 즉시 떠나라는 소식을 접했다. 이승만은 중국 대사관에 중재를 요청했으나 동청철도 소유권 문제로 두 나라가 긴장상태에 있다는 대답뿐이었다.

    소련은 동청철도의 매입을 위해 모스크바에 와 있던 일본철도위원회 마츠야마(松山) 총재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이승만의 모스크바 체류를 허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북아시아 연맹 구축이라는 원대한 구상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만약 그것이 실현되었더라면 일본의 만주 정복을 막을 수 있었고, 그 후 역사의 진행 방향은 달라졌을 것이다.

    3.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외교

    한국은 사실상 소멸된 상태였지만 나라의 부활은 1919년 3.1운동에 의해 예고되었다. 임시정부 수립은 그것이 외양상 아무리 허약해 보여도 한국인들의 애국심과 노력의 구심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시정부가 명맥을 유지하는 한 언젠가 크게 타오를 불씨는 꺼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 이승만의 임무는 그 불씨가 일제의 강압적 힘에 짓밟혀 꺼지거나 무관심으로 소멸되는 사태를 막는 것이었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 등 연합국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한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적극 참가하며 나아가 전후 국제회의에서 발언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이 날을 “영원한 치욕의 날”로 규정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이때 이승만은 이를 놓치지 않고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장관을 통해 중경 임시정부가 일본의 패전을 위해 미국을 돕는 일이라면 가능한 모든 일을 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보내도록 했다. 한인 애국자들은 마침내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일본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그 동안 미국의 논리가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임시정부 성명서를 국무부 극동담당 스탠리 혼백(Stanley Hornbeck) 박사에게 제출하자 그는 신중한 태도로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자신들은 여하한 경우에도 이승만을 한 국가나 민족의 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냉담한 반응에 이승만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에게 직접 편지를 써 보내 임정 승인을 요청했고, 대통령 영부인인 엘리노 여사에게도 측면지원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일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실망하고 당황한 이승만은 중경 임시정부에 대해 대일선전포고를 채택하도록 요청했다.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 관리들은 한국의 대일 선전포고마저 묵살했다.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에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따라 임시정부에 군사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미국 국무부는 이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은 1942년 1월 미국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Alger Hiss)를 만나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그렇게 하면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게 되고, 일본이 항복한 다음에는 한반도로 밀고 들어올 소련군을 막는데도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고 했다. 이에 알저 히스는 미국의 동맹국인 소련을 비난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며 화를 냈다. 이후 이승만은 코델 헐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모두 무위로 끝났다.

    이승만이 이러한 외교노선을 채택하게 된 배경에는 전후 한반도의 자주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의 승인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는 실질적인 한인병력 및 한인군대의 태평양 전쟁 참전만이 미국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만약 이때 미국이 임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