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두식 조선일보 논설위원 ⓒ 뉴데일리
    ▲ 박두식 조선일보 논설위원 ⓒ 뉴데일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미국 워싱턴의 분위기는 복잡하다. 미국 정부는 이 문제를 "깨지기 쉬운 어항 다루듯" 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 전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제임스 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워싱턴 시내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차례로 찾았다.

    이들은 평소 한국 외교관이 얼굴을 보기도 쉽지 않은 인물들이다. 워싱턴에서 만난 미국 정부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표현하는 단어 하나에도 신경을 썼다. 미국 언론은 대부분 '자살(自殺·suicide)'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정부 관계자는 우리말로 옮기면 사거(死去)와 비슷한 뜻의 '패스 어웨이(pass away)' 같은 말을 골라 썼다.

    미국 정부가 이처럼 조심하는 까닭은, '촛불 울렁증' 때문이다. 2002년부터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까지 반미(反美)는 촛불의 단골 소재였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반미로 이어갈 어떤 논리적 연결고리도 없지만, 그래도 미국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워싱턴에 이런 조심스러운 분위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 전 대통령 사후(死後)에 일고 있는 한국 사회의 각종 현상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이 더 많아 보였다. 한 한국 인사는 "북한 문제를 이야기하자고 했다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질문만 잔뜩 받았다"고 했다.

    바깥 세계의 기준으로 볼 때 노 전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의 범주에 속하긴 어렵다. 임기 말 지지도가 역대 최저 수준인 10%대까지 추락했고, 이에 따른 반노(反盧) 정서에 힘입어 야당 후보로 나선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 대선 사상 최다(最多) 표차로 승리했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발생한 본인과 가족·측근들의 불법 자금 문제로 검찰 조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행동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한국 밖의 세상에서 통용되는 해석이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의 장례 기간을 거치면서 추모 열기가 폭발했고, 세상을 떠난 전직 대통령이 산 사람들의 세상을 호령하는 듯한 상황이 벌어졌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제대로 된 나라에선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경우가 드물 뿐만 아니라 경호 체제 등을 감안하면 그 결심을 실행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런데 세계 13위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것만으로도 바깥 세계에서 한국을 어떻게 볼지를 생각하면 아찔하고 난감하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과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죽음 앞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애도하는 국민들의 추모(追慕) 열기는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을 떠받들거나 여기에 정치적 의미를 덧칠하는 것은 한국 사회를 지탱해주는 규범의 틀을 뒤흔드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한국은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에서 10년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연간 1만2000여명, 하루 평균 32.8명이 자살을 택하고 있다. 정부가 '자살예방 5개년 종합대책'이란 거창한 계획까지 세웠던 게 바로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의 일이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정치와 종교 분야의 지도자가 자살을 선택했다면 그들에겐 애초부터 그런 자유가 없다는 원칙이 강조됐을 것이다. 사회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자살 같은 일을 막기 위해서인데, 거꾸로 그런 일에 앞장선 모양이 된 것을 그냥 덮어두고 지나가면 훗날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감히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 힘든 분위기다. 대신, 노 전 대통령의 선택을 '마지막 승부수' '죽음으로 모든 걸 지고 가려는 희생' 등의 표현을 동원해 가며 극화(劇化)시키려는 일부의 주장들만 부각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 준 충격이 큰 만큼, 이를 정치적으로 다시 해석하거나 그 과정에서 공방이 벌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한 것 자체를 두둔하거나 미화(美化)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정치 마케팅에도 지켜야 할 도리(道理)가 있는 법이다. 다른 나라에선 상상하기도 힘든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다른 나라에선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치에 끌어들이는 것은 노 전 대통령을 또 한번 욕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조선일보 6월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