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화의 기원 ⓒ 뉴데일리
    ▲ 문화의 기원 ⓒ 뉴데일리

    《문화의 기원》은 2004년 프랑스 DDB(Desclee de Brouwer) 출판사에서 나온 르네 지라르의 Les origines de la cultur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한국어판은 프랑스어 원본에 한 장(章)이 더 추가된 것이다. 한국어판 출간을 기해 좀더 완벽한 판본을 발간하자는 르네 지라르와 DDB 출판사의 제의에 따라 프랑스어 원본에는 없던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 그리고 역사의 종말〉이라는 내용을 7장으로 추가한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나온 《문화의 기원》 판본 중에서 가장 업데이트된 판본이 바로 이 한국어판라고 하겠다.

    이 책은 르네 지라르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이탈리아어학과 교수 피에르파올로 안토넬로, 리우데자네이루 대학의 비교문학 교수 주앙 세자르 데 카스트로 로샤와 나눈 대담을 모아놓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두 교수와 르네 지라르 사이에 몇 개월이라는 시간을 두고 진행되어온 인터뷰를 모아놓은 결과물이다.
    그 동안 《희생양》, 《폭력과 성스러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등의 저서가 번역 소개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르네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이라는 두 개의 가설을 가지고 40년 전부터 인문학계를 전복시켜온 학자다. 르네 지라르와 두 명의 대담자가 지라르의 모방이론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 책의 형식은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을 연상케 한다. 심리학자인 우구를리앙과 기 르포르와의 대담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 자세히 설명하거나 자신에게 쏟아진 비판에 대한 반박과 해명을 전개한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지라르는 자신에 대한 숱한 오해와 비판에 대해 정말 성실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해명하고 있다.
    동시에 지라르는 그 동안 독자들이 자신에게 품고 있던 온갖 의문들에 대해서까지 정말 속 시원히 털어놓고 있어, 가히 지적 자서전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지라르 자신의 지적 이정표도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가 어느 순간,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를 소상히 알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면 주요 저서를 집필하던 배경과 당시 상황 등을 밝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때 연구 자체에만 몰두하여 정작 논문 발표에 소홀하다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연구업적 미비’라는 이유로 인디애나 대학에서 물러나게 된 일화까지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지라르가 자라난 배경을 시작으로 자신의 저서들을 집필한 과정과 관련된 전기적인 사실들을 거론한 다음, 이어서 모방 메커니즘, 지라르 작업의 기독교적인 성격(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과 함께, 인간적이고 동물적인 차원에서 오늘날과 같은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에 대한 지라르의 생각에 기독교적인 관념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뒷부분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내는 바와 같이, 이 책에서는 어떤 점에서든 르네 지라르와 연결될 수 있을 여러 학자들의 이론과 저서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기독교를 인류학의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 지라르의 이론은 문화와 사회적 현상을 그 기원에서부터 설명하려 하는 흔치 않은 이론이다. 지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을 이 책은 지금 이 시대에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해주는 사상가 가운데 하나인 르네 지라르를 밝혀내는 각별한 빛을 제공해준다. 처음에는 문학 연구로 시작했지만, 인류학으로 나아가는 과정부터 처음 접하는 학문들을 혼자서 헤쳐나간 그의 작업은 거의 독학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라르가 걸어온 이 외로운 행로는 이런 계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늘날의 주류 학파와 유행 제도적인 관행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르네 지라르는 바로 이 때문에 자유라는 대단한 경지를 누릴 수 있었다는 데에서 우리는 양면성의 편재를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기원의 탐구라는 과거로의 여행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의 문제에 대해서도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그 특유의 개념을 동원하여 오늘날의 여러 현상을 날카롭게 설명해내고 있다. 예를 들면 9.11사태의 원인을 종교와 문명권의 대립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과는 달리, 이들 문화가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그러하다. 이로써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전망을 지라르에게서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이의 소멸 때문에 현대인의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는 이런 생각은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시작된 모방이론에서 나온 결론일 것이다.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제공에서 지라르가 우리에게 빛을 던지는 영역은 이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등장한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분석은 우리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기파랑 펴냄, 328쪽,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