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하다 ⓒ 뉴데일리
    ▲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하다 ⓒ 뉴데일리

    남성적 우애와 혁명. 비극적인 세계관, 고통과 죽음에 대면한 인간의 영웅적 행동들이 국공합작(國共合作) 시절의 중국을 배경으로 비장하게 펼쳐지던 《인간조건》. 학창시절 이 《인간조건》에 읽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혁명가이자 소설가로서 선이 굵은 인생을 살았던 앙드레 말로에게 매료되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 《인간 조건》이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말로가 20세기 최고의 화가라 일컫기에 충분한 피카소와 나눈 대화, 그리고 마그 재단에서 열린 ‘상상미술관’ 기획전에서 행한 앙드레 말로의 연설이 주요 내용을 이루는 이 책은, 《흑요석의 머리La Tête d'obsidienne》가 원제로,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던 1974년에 《피카소와의 대화》로 번역되었고, 원 번역자인 상명대 박정자 교수가 다시 번역하여 이번에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하다》로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은 피카소가 사망한 1973년 말로가 피카소의 마지막 부인 자클린과 함께 박물관에 기증할 작품을 의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스페인․중국․일본․크메르 등을 배경으로 앙드레 말로의 추억이 간간이 뒤섞이는 이 대화와 회고의 중심 주제는 인간의 운명에 항거하는 투쟁으로서의 예술이다. 인간의 절대적 운명, 그것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신들에 의해 창조된 모든 생은 무로 돌아갈 것이 약속되어 있다. 따라서 신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만이 무를 이겨낸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 그것은 바로 예술작품이 아닌가? 말로 문학의 주제이기도 한 이 ‘반운명’의 싸움은 그러므로 죽음에 항거하여 영원히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인간의 치열한 몸부림이다.

    그것이 신라시대의 토우건, 아니면 피카소가 그토록 감탄하는 키클라데스 섬의 바이올린 우상이건, 옛날 옛적 어느 보잘것없는 어른 또는 어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손으로 만들어냈을 소박한 작품들은 영원 회귀하는 우리 인생의 짧고 허망함을 순간 느끼게 해준다. 개개의 인생을 뛰어넘어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남은 그 상(像)들은 인간의 유한성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이것이 말로의 모든 예술 비평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동시에 피카소의 천재성을 지탱해준 생각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예술가들 사이에서의 대화이다. 그것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누구와 영감을 공유한다거나, 또는 습작을 위해 대가의 그림을 모사(模寫)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림의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 선배 화가의 그림을 모방하는 것은 화가들 사이에서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온 관습이었다.

    위대한 화가가 선배 화가들과 그림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물론 피카소가 처음은 아니다. 루벤스, 세잔, 고흐, 마티스, 마네 등의 화가들도 자기보다 앞선 시대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했다. 그러나 이 대가들의 모사 행위를 그 누구도 표절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자기 방식으로 다른 그림에서 힌트를 얻어 생생한 자기 자신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그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다르게’ 그리고 싶었을 따름이다.

    피카소도 선배 화가 또는 조각가의 작품들은 물론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의 원시미술을 무수하게 모사했다. 그의 조각품들은 아프리카 토인과 수메르의 우상들을 모사한 것이고, 대표적 큐비즘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은 세잔의 〈목욕하는 여인들〉의 구도를 그대로 차용했다. 1907년에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작품을 그렸고, 80세인 1961년에는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재해석하여 그리기도 했다. 또한 〈한국에서의 학살〉은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기초로 한 것이다(마네의 이 그림은 또다시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모사한 것이다). 피카소에게 이 같은 앞선 시대의 예술을 모사한 것은 그림과 그림들의 대화, 화가와 화가들 사이의 대화는 회화라는 세계 속에서의 자기 참조였다. 이로써 현대회화는 더 이상 밖의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인 세계 안에서 회화만을 문제 삼게 되는 것이다.

    피카소만큼 살아서 모든 것을 다 누린 화가도 없을 것이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기 있는 화가였다. 피카소의 인기와 명성은 그가 죽은 지 33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경매시장에서 매번 최고가를 갱신하며 여전히 식을 줄을 모른다. 가히 피카소 불패 신화라 할 만하다.
    창작의 영원한 화두인 예술의 자율성 문제, 20세기 후반부터 문학과 영화 분야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이른바 예술의 자기 반영성 미학을 토대로 앙드레 말로가 자신의 예술관을 간간이 드러내면서 전하는 피카소의 면모! 피카소의 치열한 예술정신은 너무나 엄청나서 그것을 묘사할 말이 부족할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20세기 미술의 독보적인 거장일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 단 한 번 등장할까 말까 한 천재적인 예술가로서의 피카소의 내면과 함께, 하나의 양식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는 열정과 끊임없는 ‘변신’으로 자신의 예술 영역을 넓혀나간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피카소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기파랑 펴냄, 372쪽,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