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논설위원이 쓴 <리영희와 '우상과 이성'>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좌파 지식인 리영희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70년대 후반 중앙정보부에 따르면 대학생들이 많이 읽고 크게 영향을 받은 책 1번이 전환시대의 논리, 2번이 8억인과의 대화, 5번이 우상과 이성이었다.” 모두 리씨가 쓰거나 편역한 책이다.

    필자도 그 대학생 중 한 명이었다. 인기 순위 1·2번 책에 묘사된 모택동의 문화혁명은 아름다웠다. 그것은 ‘너무나도 웅장한 인간개조의 실험, 인간 제일주의, 보다 깊은 민주주의’였다. 홍위병도 ‘인민의 지성과 에너지에 의한 결정 과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소련의 반체제 지식인 사하로프가 “모택동 개인숭배는 추악하고 기괴한 모습”이라고 한 것은 ‘상당한 편견’이고, ‘모택동은 스탈린과 달리 피의 숙청을 결코 안 할 것’이었다. 문화혁명을 알려면 ‘민주나 언론자유와 같은 고정관념의 굴레에서 해방돼야’ 했다.

    문화혁명 속의 중국은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우며’ ‘오늘은 행복’하고 ‘하나의 대가족’처럼 된 나라였다. ‘모든 힘이 사회적 품격을 창조하기 위해 총동원되고 있는 느낌’이고 ‘문화혁명이 중국을 도덕성의 결정(結晶)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모든 증거로 미루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민중 생활에 어두운 그림자가 없고’ 농촌으로 간 청년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발적’이며, 홍콩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탈락자’였다. 지식인들을 농장에 수용한 것도 ‘국가 행정 향상에 매우 알찬 공헌을 한 것으로 입증될 것’이었다.

    필자가 리씨의 책에서 빠져 나오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나중에 문화혁명의 산증인들이 털어놓은 그때의 진실은 리씨의 책과는 정반대였다.

    지금은 미국 대학 교수인 선판(沈汎)은 1966년 여름 열두살 때 베이징의 홍위병이 됐다. ‘나는 꼬마 혁명가 노릇을 하면서 온갖 잔인한 파괴 활동에 참여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 경악을 금할 수 없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을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 이름 없는 혁명 투사? 나는 솔직히 그냥 잘되고 싶었다. 우리 코흘리개들이 전(前) 군사령관을 고문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빨리 죽어 화가 났다. 사람들의 팔다리 상처를 꼬챙이로 쑤시면서 죄책감은 없었다. 동네 의사 집을 박살내고, 그 의사를 끌고 가 수술용 칼로 배를 가르고 뱃속에 간장을 부었다. 모택동 주석이 하사했다는 과일을 앞에 두고 수천명이 절하며 울음바다가 됐다. 그런데 어느 날 홍위병 친구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홍위병 누나가 반동분자가 돼 7년 중노동형을 받았다. 망치(별명)는 고문을 당해 두 다리를 잃었고, 참새(별명) 아버지는 배신자가 돼 죽었다. 캥거루(별명) 가족 전체가 실종됐고, 내 이모부도 홍위병의 강철봉에 맞아 즉사했다. 마침내 군인인 우리 아버지도 반동분자로 찍혔고, 어머니는 발작을 일으켰다. 우리는 도망쳐 온 이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에 나타난 문화혁명은 지옥이었다.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으로 3000만명의 중국인을 굶겨 죽였다. 방향을 바꾸자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문화혁명을 일으켜 숙청했다. 수백만명이 죽거나 다치고 박해를 받았다. 나중에 중국은 문화혁명을 ‘대재난이자 내란’으로 공식 규정했다.

    리씨는 저서 ‘우상과 이성’의 첫머리에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이 시작이자 끝”이라며 “글 쓰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리씨는 자신의 책이 진실의 반대로 드러났는데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 자신이 오도(誤導)한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도 없다. “부분적으로 인용이 잘못됐다”는 게 전부다.

    최근 자유주의연대가 리씨를 허위 지식인으로 지목했지만, 리씨는 진보세력에선 여전히 신화적인 존재다. 리씨가 여당 의원들에게 강연하는 모습을 본 한 사람은 “의원들이 리씨를 추기경보다 더 떠받드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스스로 ‘우상’이 된 리씨의 이성은 어디로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