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훈범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거기 선 여인네야 부디 날 좀 돌아보오.
    옷 맵시 몸 자태가 어찌 그리 고우신가.
    가위로 오려 냈나 붓으로 그려 냈나.
    작업이라 타박 말고 설명 좀 해주시게.

    가여운 남정네야 보는 눈은 있어 갖고.
    나로 이를테면 초절정 패션 리더라.
    말해도 알 리 없어 내 입만 아프련만
    기특해 코치하니 귀 열고 들으시오.

    스트라이프 롱블라우스 섹시하게 걸쳐 주고
    스쿨룩 패션의 쿠니 체크 스커트에
    럭셔리 스타일의 엔크 조끼 받쳐 주니
    이게 바로 올 가을 유행 패션 아이템이라.

    에고에고 사람들아 이 여인네 성깔 보소.
    꼬부랑말 춤을 추니 귀 밑으로 다 떨어지네
    사분사분 설명하면 못 알아들을 리 없건마는
    아무리 무지렁이라고 무에 그리 욕을 하오.

    앞서 가는 저 총각아 내 말이 틀리리오.
    그대도 이제 보니 한 패션 하는구려.
    무엇을 손에 들고 무엇을 걸쳐 멨나.
    머리에는 뭣을 이고 귀에는 또 뭘 꽂았소.

    딱한 아저씨야 욕 먹어도 싼 것 같소.
    패션의 '피'자도 모르면서 함부로 입 놀리니.
    아는 이는 나를 보고 얼리어답터라 부른다네.
    알 턱이 없건마는 한 번이라도 들어 보오.

    왼손엔 핸드폰이요 오른손엔 피엠피라.
    디엠비 방송 보다 아케이드 게임하네.
    와이어리스 헤드폰이면 엠피스리도 댓초케이.
    그래도 심심하면 브이오디 다운로드.

    여보시오 사람들아, 여기가 어디런가.
    미국이요 영국이요 아니면 불란서요.
    생긴 건 한 판인데 입만 열면 모를 소리.
    아니다, 상관 말고 내 갈 길이나 서두르세.

    요지경 세상 속에 집도 하나 못 찾겠다.
    여기는 뭔 팰리스 저기는 또 무슨 파크.
    뭔 캐슬에 웬 놈의 빌은 어찌 그리 많다더냐.
    시어미 발 끊게 하련다는 그 말이 맞나 보네.

    발품이나 쉬어 갈래도 그늘 찾기가 쉽지 않다.
    무슨 마트, 어떤 월드에 아웃렛은 또 뭔 소리.
    무슨 존에 뭔 플러스라더니 까르푸는 지워졌소.
    아뿔싸, 그 자리에 뭔 랜드가 대신 하네.

    그 정도는 약과라네. 설은 알파벳 난무하니.
    한국이라 케이라는데 그것들만 들어 봐도,
    케이티 지나 케이티에프, 하나 더 케이티에프티.
    케이티엑스로 그칠쏘냐, 케이티앤지 나도 있다.

    기 못 펴는 프랑스말도 상표 이름으론 으뜸이라.
    뚜레쥬르 파리바케뜨 르노트르 빵집이요,
    라네즈 라끄베르 드봉 에뛰드 화장품인데,
    그중에 제일 앞선 것은 우리 친구 모나미라.

    산란한 속 추스르려 티비 보니 더 어지럽다.
    뉴스라인 뉴스투데이 모닝와이드 모닝쇼,
    해피타임 스타 골든벨 브라보 웰빙라이프.
    그 속에 끼어 있는 '바른말 고운말'이 머쓱하네.

    백미는 운동 중계라, 듣노라니 기가 찬다.
    설기현 인터셉트, 하프라인 넘어 드리블 대시
    스루 패스, 크로스 패스 리턴 받아 센터링.
    헤딩 슛, 골키퍼 펀칭, 크로스바 넘어갑니다.

    여기저기 외래어요, 입 벌리면 외국어라.
    세계화 지구촌에서 경쟁력 있겠네 믿었더니,
    거리서 만난 외국인 하나 시청 앞에도 못 데려간다.
    입만 풍년인 콩글리시가 어찌 아니 그럴쏘냐.

    이 땅에 우리말 아끼는 이, 누구 하나 없단 말가.
    뜯기고 짓밟히는 데 어찌 이리 나 몰라라.
    옛적에 중국어를 우리말 삼자고 나서더니,
    철없는 영어 공용화론 다시 나올까 두렵구나.

    이꼴 보고 세종 임금이 지하에서 통곡한다.
    문자 처음 만들 때도 천하다고 골리더니
    오백여 년 세월 흘러도 업신여김 그대로네.
    한글날 국경일도 쓰레기 더미서 겨우 나왔다.

    개뿔 없던 대한민국, 아이티 강국 행세해도
    과학적 문자 한글 없이 눈곱만큼이나 가능했나.
    우리말 우리글이 홀대받고 누더기 되는데
    대한민국 밝은 미래 언감생심 기대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