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변용식 편집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주 사우디아라비아를 4일간 국빈 방문했다. 압둘라 사우디 왕과의 정상회담 테이블에 놓인 최대 의제는 에너지협력문제가 아니었다. 민다나오에 정유공장을 차려달라는 요구는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사우디 감옥에 갇혀 있는 필리핀 가정부와 건설노무자들을 석방시키는 일이었다. 이들은 대개 집주인의 학대를 못 이겨 도망쳤거나 술을 먹다가 잡힌, 다른 나라에서는 죄(罪)도 안 되는 일로 잡힌 사람들이다.

    사우디에는 현재 가정부, 건설노동자, 간호사 등 무려 1백만명이 넘는 필리핀인들이 일하고 있다. 나라가 가난하고 일자리가 없다 보니 인구 8800만명 중에 10%가 넘는 900만명이 해외에 돈 벌러 나가 있는 나라가 바로 필리핀이다. 이들이 저임을 받으면서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본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해오는 돈은 연간 1백억달러를 넘는다. 이 돈이 없으면 필리핀은 당장 국가부도가 난다. 아로요 대통령은 지난 11일 압둘라 국왕의 사면명령으로 석방된 170명의 필리핀 국민들을 전세기에 태우고 개선장군처럼 귀국했다. 그날 마닐라의 한 신문은 이런 제목을 달았다. “GMA (아로요 대통령 풀네임 약자)의 사우디 여행은 대성공”

    비슷한 시점에 노무현 대통령은 몽골을 방문했다. 노 대통령은 아로요 대통령과는 처지가 달랐다. 몽골사람들이 모인 데서 노 대통령은 “한국에는 몽골사람들이 와 있다. 근무지에서 인권침해가 없도록, 생활의 불편이 없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했고, 동포간담회에서는 “북한에 제도적·물질적 지원을 조건없이 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이런 발언을 하면서 세계 10대 경제국가의 대통령임을 만끽했는지 모른다.

    40년 전만 해도 양국의 처지는 정반대였다. 30년대 말 필리핀 국민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제일 높은 소득을 자랑했다. 1955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일 때, 필리핀은 그 3배인 190달러였다. 60년대 초에는 필리핀 업체들이 한국에 들어와 장충체육관도 짓고, 광화문의 문화관광부와 주한 미국대사관 건물도 감리할 만큼 필리핀은 축복이 지속될 나라처럼 보였다.

    한 나라의 운명은 국민들이 어떤 정치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갈리는 법. 같은 독재정권이라도 산업화에 모든 것을 건 나라는 경제발전에 이어 민주화가 따라왔다. 한국은 바로 그런 케이스지만, 필리핀은 죽도 밥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정치지도자를 만난 것이 불행이었다. 풍부한 천연자원에다, 많은 국민이 영어까지 하여 못살 이유가 없는 나라다. 그러나 필리핀은 1969년까지 한국을 앞서다가 그 후 뒤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동남아시아에서도 가장 빈국이 됐다. 2004년 한국과 필리핀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14배의 차이로 크게 역전됐다(필리핀 1036달러, 한국 1만4193달러).

    필리핀에서는 매일 3100명, 연간 1백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찾아 조국을 떠난다. 대개 저임금 직종이다. 무능한 독재자 마르코스가 국내에서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자, 70년대 초부터 국민들을 해외로 내보낸 것이 시초다. 현재 북한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나라에 필리핀 사람들이 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1만1000여 명이 들어와 있다. 육지뿐만 아니다. 바다에서도 뱃사람의 25%를 필리핀 사람이 채운다. 그래서 “유비쿼터스 필리피노스”(언제 어디에도 있는 필리핀 사람들)라는 말도 생겼다. 아빠 엄마가 모두 돈 벌러 해외로 나가기 때문에 필리핀 어린이들은 할머니들이 키운다. ‘산타로사’ 라는 지역은 인구 8000명 중에 3000명이 해외로 나갔다. 어린이·늙은이·장애자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의사들마저 개업을 포기하고 다시 간호학교에 들어가 간호사로 변신하여 미국 유럽으로 나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간호사의 85%가 해외로 빠져나간 상태다. 당연히 의료 인프라는 무너졌다.

    우리의 해방 후 역사를 ‘정의가 패배한 역사’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필리핀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경제적 뒷받침 없는 정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국 대통령이 어깨를 펴고 해외에 나가 선심을 쓸 수 있는 힘이 어느 시기부터 축적된 것인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필리핀 역사는 필리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정치지도자가 길을 잘못 가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역사의 시나리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