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논설위원이 쓴 칼럼 <풍(風)… 풍(風)… 풍(風)… '허풍'의 주역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힙니다.

    며칠 전 신문에 ‘설훈 전 의원 1억원 배상 판결’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설 전 의원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측근이 이 후보 여행경비로 20만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했었다. 그게 허위로 드러났으니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이었다.

    기사를 읽으면서 “이 후보의 다른 사건들은 어떻게 됐나”가 궁금해졌다. 필자는 4년 전 대선 때 민주당 출입기자였다. 당 대변인실은 ‘이회창 의혹’ 폭로 경연장이었다. 첫 번째 의혹이 폭로되고, 며칠이 지나면 “물증이 확보됐다”는 후속탄이 따르고, 또 얼마 지나면 두 번째 의혹이 터지는 식이었다. 선거가 임박한 가을쯤엔 ‘이회창 의혹 리스트’가 9개까지로 늘어났다.

    ‘그때 그 사건’들에 대한 재판 결과를 뒤져봤다. 상고심까지 판결이 나왔거나 항소심 후 상고 포기로 재판절차들이 마무리된 상태였다. 대선 후 제법 세월이 흘렀다는 얘기다.

    이회창측 겨냥했던 폭로… 줄줄이 사실무근 드러나

    “기양건설 대표가 이 후보 부인 한인옥씨에게 10억원을 줬다”는 의혹이 있었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유세장에서 이 의혹을 ‘기풍(風)’ 또는 ‘기절초風’이라고 불렀다. 노 후보는 방송연설에서 “말이 의혹이지 돈을 준 장부까지 드러난 사실”이라고도 했다. 2004년 1월 고등법원은 “10억원 전달 의혹은 사실무근”이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돈을 준 장부’에 대해 “외형만 봐도 위조라는 걸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장부를 증거 삼아 한씨를 검찰에 고발했던 ‘기양의혹 특위위원장’은 현재 법무부 장관이다.

    “이 후보 측근들이 이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를 은폐했다”는 의혹이 병풍(兵風)이다. 대법원은 2005년 5월 병풍에 대해 “증거 없다”고 판결했다. 병풍의 주역 김대업씨를 감싸고 돌던 사람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병역비리 전과자’ 김씨를 이회창 병역비리 수사팀에 참여시켰던 검찰수사 책임자는 이달 초 검사장으로 승진했다. 김씨의 변호인은 2004년 총선에서 여당 공천을 받아 금배지를 달았다. 김씨를 “병무사건 전문가”라고 치켜세웠던 정치인은 얼마 전 노동부 장관이 됐다.

    “1996년 총선 때 안기부 예산이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선거자금으로 쓰였다”는 안풍(安風)이라는 것도 있었다. 당시 선대위원장이었던 이 후보를 겨냥한 것이다. 노 후보는 “한나라당은 정부 예산을 선거자금으로 썼던 부패정당”이라고 공격했다. 민주당 최고위원은 “내가 장관을 해봐서 예산 시스템을 잘 안다. 안풍은 국고(國庫)수표로 예산을 횡령한 사건”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현 국무총리다. 대법원은 2005년 10월 “신한국당 선거자금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100년전 헤집는 정권… 4년전 ‘과거사’ 청산부터

    이런 판결들은 그때그때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한데 모아 놓고 보면 “노 후보측이 폭로했던 이회창풍(風) 시리즈는 결국 허풍(虛風)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쯤에서 ‘과거사 청산’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권 사람들은 100년 전 일까지 헤집는 이유에 대해 “그래야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렇다면 4년 전 과거사부터 바로잡는 게 순서다. 1년 후 대선에서 허풍 시리즈 재발을 막으려면 말이다.

    현 정권이 자랑하는 대선자금수사 결과를 봐도 그렇다. 음성 대선자금이라는 ‘불법총알’을 거래했던 정치인, 그것도 주로 야당 정치인들이 철퇴를 맞았다. 반면 흑색선전이라는 ‘불법총알’을 난사했던 여당 정치인들은 처벌은커녕 너무나 잘나가고 있다. “네가 2002년 했던 일을 안다”고 쌍심지를 켰던 사람들이 “내가 2002년 했던 일은 기억 안 난다”며 시치미를 떼고 있다.

    반칙한 사람이 득세하고 떵떵거리며 사는 나라. 대통령이 제일 혐오한다는 세상 모습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