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11일자 오피니언면 '포럼'란에 장석권 단국대 명예교수(헌법학 전공)가 쓴 '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980년대, 군사정권에 항거하던 운동권 투쟁세력들이 ‘한국현대사의 교과서’로까지 신봉하면서 즐겨 읽던 책이 ‘해방 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이다. 그런데 이 ‘해전사’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하는 책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출판됨으로써 그동안 오도되고 편향됐던 현대사를 일부나마 바로잡게 되어 다행이다.

    문제는, 여권과 운동권 일각에서 아직도 “해방 후 남한 단독정권의 수립으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으며, 그래서 대한민국 역사는 실패한 역사”라고 고집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까지 흔들고 있다고 하는 데 있다. 그리고 남한이 단독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 땅에서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년 만인 1946년 8월 29일자로 이른바 ‘조선로동당 강령’을 채택,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이 강령에 “일본인, 민족반역자 및 지주들의 소유 토지와 그들의 공장 광산 철도 운수… 문화기관 기타를 국유로 할 것, 일체 은행과 기타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할 것(3∼5)” 등을 규정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에 비해 남한에서는 1947년 10월 21일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했던 소련 측 대표단이 회담 결렬을 선언하면서 전원이 서울에서 철수함으로써 미 군정청이 남조선과도정부 구성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조선과도정부헌법이 기초되어 1948년 7월 17일에 대한민국헌법으로 탄생했다.

    역사란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史實)’을 객관적인 사관(史觀)에 따라 기술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사실’은 결코 왜곡하거나 가정해서도 안 되며, ‘사관’에는 개인적인 의견이나 이념을 반영시켜서도 안 된다. 그것이 올바른 역사이다. 그러나 이른바 ‘해전사’는 너무 많은 ‘사실’을 왜곡했고, 사상적인 편향성이 반영됐음이 입증됐다.

    생각컨대 우리의 해방 전후사는 조선왕조를 계승하는 역사가 아니라 조선왕조와는 단절하는 역사였다. 세계사의 조류에 떼밀려 ‘조선왕조’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조선 없는 조선’에서 남쪽은 자유주의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창건했고, 북쪽에는 공산주의 세력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했다. 자연히 남쪽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북쪽 사람들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인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은 국민 개개인에게 자유와 권리 그리고 재산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그 번영의 수단으로 시장경제 체제를 사상과 이념으로 채택했다. 반면, 북한은 인민 개개인에게 자유와 권리 및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고 통제경제 체제를 이념과 사상으로 채택하여 각기 다른 길을 가면서 전쟁까지 치렀다.

    저마다 새 나라를 창건한 지 30년이 지나면서 양자 간의 차이는 번영의 차이가 아니라 승자와 패자의 차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체제를 옹호하면서 대한민국의 이념과 체제를 허물어뜨리고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의 주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한 국가의 ‘국민’이란 그 국가와 체제가 국민을 압제와 기아로 몰아넣지 않는 한, 그 국가와 체제에 순응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리고 임기가 주어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들은 주어진 임기를 지나치게 뛰어넘는 정책의 무리한 착수나, 국가정체성을 의심할 만한 일을 해서 국민을 불안하게 해서도 안된다.

    현재 정부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과거사 정리와 친일 청산,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과의 무리한 교섭 등은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