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에 이만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가 쓴 '기업은 실험용 흰쥐 아니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국제적 회계법인들이 발간하는 회계기준서들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 매년 전면 개정돼 발간되는 기준서에서 사업 결합, 지분 증권, 파생금융상품 등 기업 재무구조 관련 사항의 비중이 점차 늘고 있다. 지난해 발간된 기준서를 충분히 읽지도 못했는데 더욱 두꺼워진 신년판이 도착했다. 이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붙들고 울고 싶은 심정이다.

    회계기준서의 기본 흐름은 ‘다양한 재무구조와 위험회피수단을 경영 판단에 따라 적절히 활용하되 이를 결산서에 적정하게 반영하라’는 것이다. 기업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적의 재무구조를 선택하되 이에 대한 투명한 공시를 요구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다. 

    이와 같은 국제적 조류와는 달리 우리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기업 재무구조를 실험 대상에 올려놓고 불필요한 논쟁만 계속하고 있다. 기업의 높은 부채비율을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오인한 김대중 정부는 ‘부채비율 200% 이하’라는 출처 불명의 계명을 들고 나와 기업들을 들볶았다. 

    원래 높은 부채비율은 국민이 주식투자를 기피하고 확정이자부 은행예금에 돈을 몰아넣어 기업이 은행 차입에 과잉 의존함으로써 생긴 현상이다. 자산 매각이나 외자 유치를 통한 재무구조 개선이 어려워지자 기업들은 순환출자를 통해 부채총액은 그대로 두고 자본의 장부금액만 늘려 부채비율을 줄이는 꼼수로 대처했다. 카드 빚 돌려 막기와 비슷한 수법이다 

    순환출자에 의한 부채비율 축소는 재무구조 개선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알면서도 정부는 출자총액한도제한을 풀어 가면서 이를 돕고 나섰다. 정부의 불필요한 부채비율 실험 결과 기업집단마다 순환출자로 내부 지분이 대폭 증가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기업의 순환출자가 실험대에 올려졌다. 일부 국회의원은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겠다고 나섰고, 이미 가지고 있던 주식을 강제로 처분해 순환 고리를 끊겠다고 벼르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삼성생명과 삼성카드는 금융업이기 때문에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을 소급 개정해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기업구조가 가장 효율적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근래에 와서 정부가 모범적인 지배구조로 치켜세우는 지주회사도 종전의 공정거래법에서는 금지 대상이었다. 

    기업의 부채비율이나 지분구조는 시장에 의해 평가를 받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삼성생명 보험계약자들은 자신들이 맡긴 돈으로 투자한 삼성전자 주식에서 큰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불만이 있을 리 없고 삼성전자 주주 대부분이 삼성카드 투자에 이의가 없는데, 정치권이 나서서 강제 처분을 들먹이며 민간기업 재무구조의 줄기세포를 바꾸려고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기업은 실험용 흰쥐와는 다르다. 실험용 흰쥐는 사육장에서 도망칠 수 없지만 기업은 언제든지 해외로 도망칠 수 있다. 실험용 흰쥐는 단식 등의 자해행위를 할 만한 지능이 없지만 기업은 투자를 줄이는 자해행위를 선택할 수도 있다. 실험용 흰쥐는 혼자 조용히 소멸하지만 기업이 망할 때는 종업원 일자리, 하청업체 일거리, 금융기관이 받을 돈을 모두 쓸고 사라진다. 

    기업을 실험용 흰쥐와 동일시한 결과는 생산시설의 해외 이전과 기업가 의욕 감퇴로 인한 투자 부진으로 나타난다. 국회 국정조사에 소환돼 자식뻘 나이의 젊은 의원들에게 말도 안 되는 충고와 질책을 받고 나오는 노년의 기업가는 “더는 기업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한탄한다.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구조 로드맵을 종이에 그리지만 기업은 피땀으로 길을 닦는다. 돈 벌어 월급 준 경험이 전무한 의원들의 기업가에 대한 충고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연초 방송에 출연해 올해는 더 열심히 기업 실험에 나서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국회의원을 보면서 이력서 수백 통을 뿌렸다는 청년의 수심에 찬 얼굴이 떠올랐다. 

    투자 부족으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청년 실업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그나마 일자리를 잡은 청년들도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 들볶기로 자신의 얼굴을 알리려는 정치가가 있다면 정말 큰일이다. 이제 청년들이 나서서 고용 헬퍼(helper)와 고용 킬러(killer)를 가려내야 한다. 고용 킬러는 낙선운동 대상 0순위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