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란에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국제정치학 전공)가 쓴 '입다물어 버린 보수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보수층’으로 규정한 한국인이 10년 전에는 29.3%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40%에 육박할 정도로 늘었다고 한다. 보수란 사회 변화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현재의 기반 위에서 천천히 개혁하자는 노선이다. 한국의 외교안보 사안에서는 북한 독재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한미 관계를 중시하려는 사람을 보수주의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칭 보수론자가 늘었다곤 하지만 요즘 한국사회에서 명쾌한 보수 담론을 접하기는 힘들다. 정부의 진보적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견해들은 대개 보수적 대안론이 아닌 두루뭉술한 절충론이다. 

    지금 한국이 당면한 중대한 안보 이슈 두 가지를 꼽으라면 북한 핵문제와 한미 동맹의 진로가 될 것이다. 그런데 북한을 몰아붙이거나 미국을 감싸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되어 버렸다. 북한 정권의 교체 같은 발상은 아예 정신 나간 수구주의자의 집착 정도로 치부된다. 북한은 어찌됐건 포용해야 하고 먼저 지원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 타협점을 찾아야만 전쟁도 막고 평화도 지킨다는 주장이 성서 말씀에 버금가는 진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북한 핵문제에 대한 절반의 책임은 북한을 감싸지 않으려는 미국에도 있다는 지적을 먼저 해야 외교안보에 관한 얘기를 풀어 나갈 수 있을 정도다. 

    일정 수준의 대북 압박을 병행해야 북한의 결단을 유도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들더라도 그러한 생각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려면 여러 가지 피곤한 일을 각오해야 하는 게 요즘 세태다. 전쟁을 서슴지 않는 탐욕스러운 패권국으로 낙인찍힌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상호 전략 공조를 회복해야 한다는 걱정을 압도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 관계로 개점휴업 중인 6자회담에도, 19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릴 한미 전략대화에도 보수시각이 제공할 마땅한 훈수가 빈약한 실정이다. 한국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말고 협력 분위기를 이어 가라는 정도의 충고가 제일 무난해 보인다. 

    이는 한국의 대외정책 진로를 놓고 정론(正論) 보수주의자들이 제기해야 할 핵심 가설들이 이미 진보세력에 의해 철저히 무력화됐음을 시사한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보수주의자 증가가 보수성 강화로 연결될 수는 없다. 

    보수주의 안보론이 늘 옳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쪽으로 치우친 진보주의의 이상론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덕목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북한 질책하기’도 ‘미국 감싸기’도 해야 한다. 

    독일의 여성 커뮤니케이션학자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은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우세하고 지배적인 여론과 일치하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그렇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는 성향이 있다”며 이런 현상을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이라고 표현했다. 국가의 주도적 엘리트와 선전매체들이(편재적 요소) 지속적으로(축적적 요소) 하나의 견해만(일치적 요소) 주입할 때 이 침묵의 나선은 확대된다. 

    건전한 보수의 안보관마저 고립시키는 침묵의 나선은 급진 좌파주의자들의 공세주의에서만 기인하는 게 아니다. 현 정부의 외교노선에 실망감을 품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반(反)정부성 강화가 보수성 강화로 오인될 수도 있다. 또 안보 성향을 측정하는 사회적 잣대가 갑자기 왼쪽으로 옮겨 가다 보니 똑같은 자리에 내내 그대로 서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오른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와중에 침묵의 나선 구조를 더욱 구조화하는 무책임한 사람들도 있다. 한국 외교안보 현실 저간의 사정을 뻔히 꿰뚫고 있으면서도 출세해야겠다고 작정한 일부 고위 관료와 여당의 정치인, 경제인들이다. 자신의 보수적 세계관을 감추고 권력과 사회 분위기에 맞춰 정책을 만들고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다. 심정적인 동조자들에게 돌을 던져야 자신이 올라가는데 별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최근 유행처럼 늘고 있는 뉴라이트 계열의 운동가들이 침묵의 나선을 깰 수 있을까.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목청을 높인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잃어버린 담론을 찾아올 수 있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 더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