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 '조선데스크'란에 이 신문 산업부 차장대우 이광회 기자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자립형 사립고로 유명한 전주 상산고 홍성대 이사장은 자신의 학교에 지난 20여 년간 1000억원의 사재를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가 참고서 ‘수학의 정석’ 등을 출판해 벌어들인 순수 개인 돈이다. 그런데 이 돈이면 ㈜코오롱 정도 회사 하나를 창업할 수 있다. 코오롱의 자본금은 1027억원. 매출은 훨씬 커서 1조2800억원에 종업원만 2000명이 넘는다. 홍 이사장은 결국 수천 명의 종업원과 1조원이 넘는 대기업 하나 대신 학교 하나를 키우는 데 만족했던 셈이다. 


    이 계산법은 기업과 학교, 특히 사립학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 때문일까. 요즘 재계가 정부·여당의 사학법 강행처리 이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불편한 심기 표출의 대상은 강행처리의 주역인 열린우리당보다도 이를 수수방관(?)한 한나라당이다.


    재계에서 한나라당은 ‘표결불참당’으로 통한다. 이번 사학법 처리 후 한 기업인은 “팔짱 낀 채 바라만 보는 표결불참당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언했다. 이 기업인은 “작년 출자총액제한 폐지 때는 물론 금융의결권 행사 한도를 30%에서 15%로 축소하는 등의 공정거래법 개정 때도 야당이 한 유일한 일은 표결불참뿐”이라고 비꼬았다. 


    옮기기에 부적절할 정도로 노골적인 비난도 적지 않다. A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나태함이 아니라 기회주의적이고,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열을 올렸다. 


    “기업 이익을 지켜 달라”는 재계 목소리에 야당이 무조건 귀 기울이고, 육탄전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기업 이익은 사회 이익, 특히 국민 이익과 언제라도 배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금융산업법 개정안이나, 증권집단소송제를 주주가 아닌 소비자까지 확대하겠다는 일부 여당 의원들의 움직임에 재계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상황에서 자칫 기업 논리가 지나친 자기변호 논리로 흐를 가능성 역시 다분하다. 올 들어 대기업 오너들 간의 비자금 조성과 공금 횡령 사건 등이 자주 일어난 것이 사실이고 보면 기업 이익에 대한 국민 정서 역시 그다지 곱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기업인들의 야당 비난 이유가 ‘기업 이익 사수’라는 수구적인 태도에서 표출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요약하면 “의원 수가 적으니 표 싸움은 질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산뜻한 시장경제의 논리라도 만들어 달라”는 목소리다. 야당에 대한 기업의 불만은 논리 만들기조차 무관심한 야당의 게으름, 나태함에 쏠려 있다고 보면 될 듯싶다. 


    그렇다고 시간이 한나라당 편일 것 같지도 않다. 매출 4000억 원 규모의 한 중견기업 회장은 이런 논리로 야당을 비난했다. “사학법 통과 후유증의 핵심은 ‘기업의 이익 환원 대상’에서 ‘학교’가 빠지게 됐다는 점입니다. 기업인이 ‘장학사업하겠다’는 말이 이제 ‘학생 착취’로 비치는 마당에 누가 (학교에) 투자하겠습니까. 학교 환경은 더 후퇴할 거예요. 정치권 모두의 책임입니다.” 한나라당도 향후 학교 교육을 죽인 공범이라는 뼈 있는 논리다. 


    표 싸움에서는 질 수밖에 없지만, 논리 싸움에서라도 제발 이겨 달라는 재계의 얘기가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기업 하기 싫은 나라에 덧붙여 학교조차 하기 싫은 나라’로 확대된 이 상황에서 재계는 가슴만 쓸어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