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 극에 달했다전교조 주축 반 대한민국 역사관 주입교육도 최악이승만 바로 알아야 대한민국 산다
  • ■ 신선한 변화의 바람(Wind of Change)

    오랜 시일 동안 검은 먹구름으로 덮여있던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역사인식에 신선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정확한 사실적 조명의 바람이다.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이 다큐로는 드문 흥행기록을 세우며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권순도 감독의 <기적의 시작>
    김효선
    사무총장(건국대통령이념보급회)의 <이승만의 독립외교 33년> 등 다른 기록영화들도 <건국전쟁>과 거의 동시에 선을 보였다.
    이장호 감독도 이승만 관련 영화 <하보우만의 약속>을 만들고 있다.

    그 동안 영상 매체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는 주장을 하며 반공 애국 진영, 특히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비방하고 폄훼하는 반역 세력의 전유물처럼 이용되어 왔다.
    그런 영상매체가 이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밝히려는 일에 효율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최근에 선 보인 이런 기록영화들이 나오기 전 부터도 독립운동과 건국의 피나는 과정, 그 가운데서도 우남 이승만의 핵심적 역할을 사실대로 균형있게 조명하려는 전문가들의 노력은 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에도 끊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역사교육의 중요성역사왜곡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각성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말기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범죄적 수준으로 왜곡 날조하면서도 새로운 사료에 근거한 정통 역사물이라고 선전한 동영상 <백년전쟁> 을 극좌 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 <4.19재단> 이 유포했다.
    그럼에도 언론계고 일반국민이고, 해독성 강한 그 동영상을 무심하게 방치했다. 

    역사교과서에 들어가 있는 이런 반 대한민국적 시각을 바로 잡으려던 이명박 정부의 노력이나, 같은 목적으로 역사교과서를 국정화 하려던 박근혜 정부의 시도는 민주화라는 구호의 맹목적 포로가 되어 있던 여론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역사학계는 분열되고  학회들이 정치도구화 하는 역작용만 남겼다.

    ■ 이건 전쟁, '역사전쟁'이다

    반공 우파 애국세력이 역사왜곡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역사학계를 장악한 수정주의 측과 좌파 언론의 대한민국 기득권층에 대한 공격이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자는 요구로까지 담대해 지고, 
     촛불정변 으로 대통령이 된 문재인은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나라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이승만을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리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그 때까지도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몰아세우는 비판을  4.19의 후유증 정도로 가볍게 여겼던 애국 시민들이, 이제는 그것이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와 국가적 정통성을 허물려는 의도와 연계되어 있음에 비로소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역사전쟁이 이미 오래전부터 벌어지고 있었음을 뒤늦게야 국민이 감지하게 된 것이었다.

    불행히도 우리 국사학계는 한 갈래가 원래부터 마르크스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런데다 "분단극복-통일주체 역사학"이라는 미명에 현혹되어 일찍부터 좌경화 되었고, 무장투쟁이 아니었던 독립운동이나 건국과정, 특히 이승만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지난해 고인이 된 유영익 교수와 그 제자들 몇 사람만이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을 중심으로 진정한 학문적 연구의 맥을 외롭게 이어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학계내부에서 이승만이나 건국관련 역사왜곡 문제를 학문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한 쪽은 국사학자들이 아니다.
    서양사나 정치학, 경제학, 외교사 등 인접분야 종사자들, 그리고 브루스 커밍스 류의 편향된 한국 현대사 해석의 허점을 파악한 외국의 한국전문가들이었다.

    하지만 언론계마저 좌경화된 마당에서, 그들의 연구 결과가 국민 여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극도로 좌편향된 영상물들에 비해 심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설사 학문적으로 수준 높은 책이나 논문이 나와도, 서점들 마저 판매고가 높지 않다고 외면하는 상황에서 독자층을 만나기 어려운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 이승만에 대한 극단적 인식 편차는 인위적 조작 탓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서 뿐 아니라 과거사 전반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세대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우리 말과 글, 심지어는 이름조차 빼앗긴 상태에서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졸지에 해방을 맞았고,
    개념조차 생소했던 자유민주국가의 주권자로 선뜻 승격했다가 북한군의 6.25 침략으로 공산군 점령치하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시련을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이승만은 국부였고 감사와 존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4.19와 그의 불명예 퇴진은 이승만의 생애에 큰 오점이 되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희생된 불상사는 나라 전체의 한계를 드러낸 비극이었지, 이승만 개인의 책임이 아니었음을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운구가 나갈 때, 가족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서울 시내를 꽉 메운 남녀노소가 통곡을 했던 것이다.

    그런 반면에, 4.19의거로 희생된 젊은이들의 유족이나 친지들, 그리고 번영하는 민주독립국가의 시민으로 사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아는 먼 후속 세대에게는 다르게 인식될 소지가 없지 않았다.
    부정부패와 부정선거를 막지 못한 과오가 항일운동과 반공투쟁에 평생을 바쳐 대한민국을 자유민주국가로 독립시키고 공산군의 침략에 맞서 지켜낸 공로보다 더욱 선명하고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더구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들의 처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4.19 세력과 손잡고 이승만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에 설 정치적 필요를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부정부패와 부정선거를 용납하지 않는 나라로 바로 세우겠다는 의도에서 의거를 이르킨 젊은이들이, 불의를 보고 항거한 젊은이들의 기개를 칭찬하고 그들의 희생을 애도하며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사퇴한 85세 노인을 "독재자", 심지어는 "친일파"로 까지 낙인찍으며, 역사로부터 아예 추방시키려 할 이유는 없었다.

    해방 1세대와 후속세대, 특히 386운동권 세대와 그 후속세대, 사이에 벌어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인식 차이는 경험이 다소 다른 세대간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인식의 차이를 훨씬 넘어서는 인위적 현상이었다. 

    ■ 4.19 이후 바뀐 김일성의 전략

    게다가 이승만에 대한 부정일변도의 평가와 종국적 악마화는, 이승만이 데모하는 학생들과 교수들의 요구에 따라 선선히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것을 보고 놀란 김일성이 대남 전략을 게릴라 투쟁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 속으로 침투하여 세뇌공작을 함으로써, 내부로부터의 파열을 촉진하는 쪽으로 바꾼 것과 밀접하게 연계된 현상이었다.

    거짓 선동과 선전은 러시아 혁명운동 시절부터 공산주의자들에게 익숙한 기술이었다.
    특히 역사왜곡과 조작은 공산주의자들이 정적을 제거하는데 필수로 동원하는 고도로 정예화된 도구였다.

    이승만 "독재자"또는 "친일파"로 낙인찍히며 국민의 뇌리에서 아예 지워버려져야 할 추악한 인물로 악마화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독립운동과 반공투쟁에서 승리해서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 되었고 ※ 공산군의 6.25 남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 부흥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만 없었더라면, 남한은 쉽게 공산화되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김일성 의 지배를 받는 위성국가로 편입되었을 것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해방 당시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이 우리 민족 사회에서 받고 있던 신뢰와 기대가 압도적이었음을 알고 있던 공산주의자 박헌영 여운형 은 일제 항복 이후의 혼란한 상황을 이승만의 명성과 권위를 빌어 수습한 뒤, 자기들이 권력을 장악할 속셈으로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 을 부주석, 김구를 내정부장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을 1945년 9월 15일에 언론에 발표했다.
    물론 아직 귀국도 하지 않은 이승만의 내락도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승만은 그 계략에 넘어가지 않고, 공산당과의 결별을 독립을 위한 좌우 협동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자 그 때부터 공산주의자들은 이승만 "미국의 주구"로, "괴뢰도당의 수괴"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나 역사적 폄훼로나 이승만 죽이기는 북한이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 전복과 공산화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선수공작이었다.

    ■ 주사파가 점령한 한국 국사학계

    이승만 시대가 끝나고 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 반공정책의 칼날이 삼엄하게 살아 있을 적에는 이승만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1990년대 초 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소련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반공국가 대한민국이 소련과 국교를 체결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제치고 다시 역사왜곡과 날조의 제일 표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북한은 이제 소련이라는 후견인이 없이 홀로 대한민국을 상대 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큰 위기에 처했다.
    실력으로 대적하기는 불가능한 대한민국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선전 선동을 통해 대한민국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념적·정신적 토대를 허무는 길이 최선임을 다시 깨달은 것이었다.

    그와 대조적인 것이 우리 대한민국 당국의 안일한 대응자세였다.
    소련이 무너지자 북한을 흡수통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며 자만에 빠져들었던 반공 주류 세력은, 냉전시대 의식구조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앞당겨야 한다는 좌파 논리에 쉽게 현혹되고 압도되어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모든 경계심을 풀었다.

    반대로 1980년 이래 지하에서 꾸준히 조직을 강화해 오던 주사파 세력은,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이른바 "민족-민주-민중의 기치" 아래 평화 통일을 이룩한다는 미명을 내걸었다
    그리고 현대사를 대한민국 국민의 관점이 아니라 북한의 관점에서 보도록 국민을 세뇌시켜 국민의식을 마비시키고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우리 국민의 반공의식은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에, 저들의  접근방식은 조심스러웠다.
    대한민국 자체를 공격하기 보다는 우리 국민의 마음속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반일 감정과 비극적으로 암살당한 김구 선생에 대한 추모심을 세뇌공작의 연료로 이용했다.

    ■ 이승만은 '악마'로, 김구 는 '영웅'으로

    남북한 인구비례 동시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통일독립정부를 세우자는 유엔 총회의 반가운 결의는 소련의 방해로 무산됐다.
    그러자 이승만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만이라도 독립국가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아 우리 힘으로 북한까지 통일하는 방안을 강구하자는 길을 선택했다.
    김구도 1947년 11월 말까지는 찬성했었다.

    그러나 12월 2일에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김구가 연루되면서 이승만과 사이가 벌어 졌다.
    김구는 그 때부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이 주최하는 이른바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참가하여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대한민국이 자유독립국가로 출범하고 인정받는 것을 방해했다.
    소련이 이미 해체되고 난 뒤인 1990년대부터 주사파 세력이 이승만 죽이기를 위해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시킨 인물이 바로 대한민국 수립에 제동을 걸었던 김구였다.

    김구의 영웅화이승만·박정희 악마화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현상이다.
    대한민국의 역대 우파 대통령들을 악마화하며 "대한민국은 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는 나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나라"라는 그들의 주장이 국민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자,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김구는 곧 바로 용도 폐기 처분 되었다. 

    ■ <백년전쟁> 깨부수는 <건국전쟁>

    저들의 전략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지우고,
    ★ 다시 말하면 인민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격상시키며,
    ★ 반공을 죄악시하는 반역적 방향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반공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은 모두 <친일파 인명사전> 의 경우처럼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한 인사 열전"에 기록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또 그처럼 왜곡 날조된 역사를 초중고교 교과서 뿐 아니라 유치원생들이 읽는 그림책까지 이용하여 주입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건국과정과 6.25 전쟁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들로서는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거짓된 이야기들을 통해, 반(反)대한민국적 역사관을 젊은 세대 뇌리에 심는 일이 대한민국 지도층도 일반 국민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전교조> 조직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은 왜곡 날조된 역사의 결정판이었다.
    하지만 그 것의 위험성을 갈파하기에는, 교사들 자신이 진정한 역사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북한과 종북세력이 주입시키는 북한 중심 역사관에 젖어 들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순진한 교사들은 민주주의 의식과 균형 잡힌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비판하는 동영상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자기들이 의무라고 믿으며, 날조된 내용의 선전물일 뿐인 <백년전쟁>을 교재로 사용했다.
    "이승만은 추악한 독재자요 부도덕한 친일 정치인이었으니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역사에 대해 이 나라의 미래 주인공들이 갖게 된 인식이며, 반공은 이제 부끄러운 낱말이 되어 버렸다.

    ■ '역사왜곡·조작'은 '세뇌' 공작

    왜곡된 역사관을 주입시킨 데에서 오는 피해는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식의 마비는 북한과 종북세력이 본래부터 노리는 효과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해악은 논리적 사고 능력 자체를 마비시킨다는데 있다. 

     이승만이 그처럼 나쁜 사람이었다면, 이승만과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왜 그런 인물을 네 번씩이나 대통령으로 선출했을까?
     그런 나쁜 지도자들만 있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지금처럼 발전할 수가 있을까?
    호기심 많은 학생이라면, 당연히 던져 볼 만한 질문들이다.

    하지만 감히 그런 질문을 던질 엄두도 못 낸다.
    상상력이나 호기심, 논리적, 도덕적 사유능력 모두가 현실이나 역사적 진실과 동떨어진 역사 교육이 사회에 미치는 가장 심각하면서도 선뜻 드러나지 않는 폐해가 바로 이것이다.

    ■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이승만
    건국대통령에 대한 일반 국민의 관심을 다시 높이고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앞장 선 것은 학자들이 아니다.
    나라의 안위를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보수 노년층 애국지사나, 이호 목사나 배재학교 동창회 같은 기독교계 우파 인사와 단체들이었다.

    그에 앞서 <이승만기념사업회>이승만 건국대통령을 숭모하는 독지가 최송옥 여사가 기증한 자하문 밖 큰 한옥에 <이승만연구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방대한 자료를 보존 관리하도록 <연세대> 측과 합의함으로써, 후대가 아무리 우남의 흔적을 지우려 해도 언제인가는 진실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토대를 마련했다.

    적대적 정치 분위기와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이승만 전집> 간행사업이 시작되어 10권이 나왔다.
    2011년에는 안병훈<사진으로 읽는 대통령 이승만>이 간행되었다. 
    손세일은 40년간의 연구작업 끝에 <이승만과 김구>란 제목으로 7권 한 질의 방대한 책을 2015년에 내놓았다.
    면밀한 사료 검토에 기초한 학술서이지만 소설 같이 재미있는 책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호평을 받았지만, 널리 읽히지는 못했다.

    이승만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정보가 유포되는 것을 막으려는 反대한민국 세력이 언론-출판업계 모두에 널리 포진되어 있는데 반해, 역사에 대한 일만 국민의 관심은 너무도 빈약했다.
    그런 훌륭한 연구서를 토대로 KBS 역사드라마를 제작하여 국민을 계몽하자는 필자의 제안도 KBS 좌파노조좌파 이사진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검토대상에 오르지도 못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승만에 관해 추천할 만한 책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10여 년 전에 비한다면, 지금은 꽤 많은 수의 양질의 연구서와 대중상대의 저작물이 나와 있는 셈이다.
    이승만에 대한 폄훼가 도를 넘는데 자극을 받아 관심을 갖게 된 연구자와 작가들이 늘어난 덕분이다.

    하지만 책이나 공연물이 나와도 널리 유포되지 못하는 것이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최근에는 복거일이 대하전기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을 통해 이승만의 활약상을 세계사적 배경에 비추어 이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유교와 불교 가정 출신 이승만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경위와 그 역사적 의미를 상세하게 조명하는 김낙환 <우남 이승만 신앙 연구>도 특별히 주목할 만 한 책이다.
    학술 담당 전문기자의 시각에서 이승만의 정무활동을 조명한 박석흥<바로 본 대한민국 정사, 1948-2023>이승만 뿐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 전반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평가를 바로 잡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 '거짓의 벽' 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흥행에 성공하는 것을 보며 떠오른 것은,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이거나 모든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격언이다.

    이승만은 깊이 알면 알수록 감탄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식의 좌파 사이비 학자들 농간에 속아 자기들의 건국대통령을 "독재자" "친일파"라는 무식과 무모의 철갑 속에 가두어 놓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전개되어온 이승만에 관한 논란은 학술토론이 아니라 은폐된 이념논쟁이요 정치공작 일 뿐이다.
    결코 학술논쟁이라 불릴만한 수준의 것이 되지 못했다.

    그 많은 이승만의 저술이나 서신, 담화 한 줄도 찾아 읽은 적이 없고 학문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연구서 한권도 펼쳐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승만의 대내외적 정적들 주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며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런 엉터리들이 언론 조명을 크게 받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번 김덕영 감독의 가장 결정적인 공로는,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는 것보다는 역사적 진실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을 허락하지 않던 철통같은 거짓의 벽에 금이 가게 했다는 데에 있다.
    구세대 대한민국 국민이나 국내외 이승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익히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우리 국민 대다수가 모르고 지나쳤던 사실들을 가감이 있을 수 없는 사진·영상·증언을 통해 보여 줌으로써 말이다.

    ■ 무엇을 위한 '이승만 바로 알기'인가?

    지금까지 편견과 사실 날조를 진실인양 포장하여 가두어 놓고,  90년 긴 세월동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역사적 거물의 생애를 제대로 조명하는 데에는, 110분이란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이승만도 사람이요 정치인이었던 이상 약점과 실수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실 가운데서 현재 가장 의미있는 것을 취사선택해 강조하는 것은 불가피하면서 가장 큰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그간 특별히 크게 잘못 알려졌거나 무시되었던 중요한 사실들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을 구성한 것은 적절한 처사였다.
    이번 다큐가 성공한 비결이기도 하다.

    이승만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김덕영 감독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 거짓의 족쇄가 풀린 이상, 이승만을 재조명하고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우리 사회 전반에서 폭발적으로 펴져 나갈 것이다.

    이승만이 어떤 인물이고 어떤 정치 지도자였는가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그가 차지하는 세계사적 지위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이해하며 평가하는 일이 우리에게 남겨졌다.
    이것이야말로 이제 거짓에서 겨우 해방되기 시작한 우리 국민 전체의 의무이며 국민으로서의 생존 전략이어야 한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니다. 

    이승만에 관한 충실한 조명을 통해, 
     우리의 [독립정신] [건국이념]이 무엇이었던가,
     독립된 자유국가로 우뚝 서서 번영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가를,
    다시 상기하고 마음속 깊이 되새겨야 한다.

    이를 성공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 지금 기로에 서 있는 이 나라의 향방이 좌우되고, 우리 개개인의 운명이 극적으로 영향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깊이 알면 알수록 더욱 감탄스럽고 특히 우리 국민에게는 깊은 존경과 감사, 그리고 그분을 그처럼 홀대한데 대한 후회와 죄책감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또한 당대의 세계 지도자들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출중한 정치사상가요, 전략가요, 시인이며 문화 애호가였다.

    이런 자랑스러운 인물을 "독재자"  "친일파"라는 철책 속에 가두어 놓고 아예 역사의 구렁텅이 속에 묻어버릴 뻔했던 우리 국민은, 이제 드디어 이승만 악마화라는 정신적 족쇄에서 풀려나기 시작했다.
    이승만 바로 알기의 바람이 곧 돌풍으로 세를 불려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역사를 날조하기를 서슴지 않는 도덕불감증 무리들을 이 땅에서 깨끗이 씻어내 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