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 세미나… 2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려재일교포 출신 이상봉씨 "지금도 죄 없는 사람들 북한에서 죽어가고 있다""北에 있는 국군포로 대부분 고령으로 시간 얼마 남지 않아… 송환 외쳐야"
  • ▲ 사단법인 물망초가 21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함경북도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 세미나를 개최했다. ⓒ김성웅 기자
    ▲ 사단법인 물망초가 21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함경북도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 세미나를 개최했다. ⓒ김성웅 기자
    국군포로의 고난과 희생을 기억하고 그들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한 취지의 인권 세미나가 개최됐다.

    21일 오후 서울시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함경북도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 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사단법인 물망초가 주최하고 물망초 인권연구소가 주관했다.

    세미나에는 정수한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위원장, 이재원 물망초 인권연구소장, 이상봉 북송 재일교포, 강춘녀 사단법인 새삶 대표, 이혜민 깊은바다 돌고래 출판사 대표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개회사를 맡은 이재원 물망초 인권연구소장은 "휴전 이후 70년간 우리 정부는 국군포로를 송환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며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작은 진척이라도 이루려면 보다 많은 국민들이 소리 높여 국군포로들의 고난과 희생을 말하고 끈질기게 송환을 요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소장은 "사선을 넘어 조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 어르신들은 존재감 없이 외롭게 사셨다"며 "(탈북한 국군포로) 80명 가운데 70명이 배상금 한 푼 쥐어보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전선에 나섰다가 포로가 된 분들을 끝까지 잊지 않고 귀환시켜야 한다는 명제는 인권적 요구 이상의 함의를 지니고 있다"며 "이 명제야말로 국가가 국민에게 애국심을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적 기초"라고 강조했다.
  • ▲ 북송 재일교포 탈북자 이상봉 씨가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 북송 재일교포 탈북자 이상봉 씨가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재일교포 출신인 이상봉씨는 일본에서 빈곤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김일성과 조총련의 날조 선전에 속아 1960년 15살 때 부모와 함께 북한으로 넘어갔다.

    반세기 가까이 북한에서 지내다가 지난 2006년 탈북한 이씨는 이날 세미나에서 자신이 본 국군포로에 대해 설명했다.

    이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함경북도 유선군(이후 회령시로 편입됨)에 위치한 유선탄광에 배치됐다고 한다. 여기서 이씨는 국군포로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의 한 많은 삶을 지척에서 경청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자식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국군포로… 생지옥에서 비참하게 절명"

    이씨는 국군포로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이승식씨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씨는 "이승식 형님은 6·25전쟁 때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강원도 홍천군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줄곧 국군포로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며 "형님은 유선탄광 내 야간 기능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국가기능공 자격 1급을 받을 만큼 머리가 비상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형님은 언제나 설계도면을 그리며 연구하는 학자 스타일이었다"며 "한번은 제가 형님에게 '왜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탐구하는가, 그렇게 노력해도 국군포로는 출세도 입당도 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이승식씨는 이씨에게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식들 장래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거다"며 "내가 열심히 해야 우리 아이들이 사람 대접을 받고 대학도 진학할 수 있지 않겠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씨는 "한참 시간이 지나고 1989년경 '민족배반자 이승식 가족에 대한 인민재판'이라는 글이 적힌 게시판에서 형님(이승식 씨)의 사진을 보게 됐다"며 "그토록 자식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던 사람이 왜 남조선(대한민국)에 가려고 결심했는지. 왜 남조선에 가기도 전에 중국에서 잡혔는지. 너무 안타까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공개처형 당일 형님 가족들은 만신창이가 돼 제대로 걷지도 못 한 채 질질 끌려 나왔다"며 "(안전원들은 이승식 씨 가족에게) 검은 천으로 눈을 싸매고 입안에 모래주머니 자갈을 밀어 넣었다. 그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무력하게 서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집행관의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나무 기둥에 결박된 형님과 그 가족의 가슴에 총탄이 박혔다. 이내 그들은 고개를 축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날 저녁 집에 가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온 식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며 "이 지구상에는 여러 독재국가가 있지만 북한처럼 사람을 처참하게 쏴 죽이는 나라가 있을까. '인간 생지옥' '아비규환'이란 표현은 북한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이어 "이승식 가족이 한 일은 다른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며 "지금도 죄 없는 사람들이 북한 땅에서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 ▲ 북송 재일교포 탈북자 이상봉 씨가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 북송 재일교포 탈북자 이상봉 씨가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애국가, 조선 민족의 철학이 담긴 노래… 고향의 노래로 향수 달래"

    이씨는 채탄공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국군포로 이상범 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씨는 "이상범 씨는 6·25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에서 중대장을 맡고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며 "중공군과 교전 중 포로가 됐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한번은 이상범 씨가 석탄 생산에 이바지한 공로로 승진한 날 그와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며 "그때 이상범 씨의 고향이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이씨는 그날 이상범 씨와 술잔을 기울이며 나눴던 대화를 회상하며 말했다. "술기운이 오르자 이상범 씨는 가수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이라는 노래를 구슬프게 불렀다"며 "제가 이상범 씨에게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애국가'라고 답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상범 씨는 남조선의 애국가를 마음속으로 부른다"며 "그는 '애국가가 철학적인 내용이 담긴 조선 민족의 노래라고 느낀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제가 탈북하기 직전인 2006년에도 그를 집 근처에서 만난 적이 있다"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덧붙였다.

    "국군포로 송환 요구 않은 대한민국 대통령… 서둘러 국군포로 송환 해야"

    이씨는 "2000년 6월1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정일과 만났지만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며 "나와 친했던 국군포로들은 김 전 대통령 방북 때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그 희망이 사라졌다"고 털어놨다.

    이어 "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께 말하고 싶다. 북한은 지붕 없는 감옥이다"고 호소했다.

    이씨는 "현재 대한민국에는 북한을 동경하고 대한민국을 북한 사회처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북한 땅이 '사회주의 지상낙원'이라면 왜 수십 만 명이 목숨을 걸고 탈북하고, 3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일어날까. 깊이 생각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씨는 "생지옥과 같은 북한에서 반세기 이상 살아 가고 있는 국군포로와 유가족을 송환하는 문제가 급선무"라며 "국군포로 송환 없이는 남북 간의 어떤 회담과 협력을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사단법인 물망초에서 활동하는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하나 돼 국군포로 송환을 외쳐야 한다"며 "제가 함께 일했던 국군포로들은 1930년대 생이 많았다. 이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 강춘녀 사단법인 새삶 대표. ⓒ정상윤 기자
    ▲ 강춘녀 사단법인 새삶 대표. ⓒ정상윤 기자
    "국군포로 자녀도 고통스러운 삶 살았다… 꿈 조차 꿀 수 없어 공부도 하지 않아"

    강춘녀 사단법인 새삶 대표는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대한민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경원지역으로 추방돼 힘든 생활을 하다가 탈북했다.

    강 대표는 "국군포로의 자녀들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며 "국군포로의 자녀들은 대학이나 인민군대에 가는 것을 꿈 조차 꿀 수 없기 때문에 학교에서 공부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군포로뿐 만 아니라 남조선 출신은 전반적으로 아픔을 겪고 살았다"며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구성원 대부분은 남조선 출신"이라고 말했다.

    이어 "독재는 영원할 수 없다"며 "김정은 정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이제라도 인간다운 행동을 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혜민 깊은바다 돌고래 출판사 대표는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상봉 씨의 증언을 윤문하는 작업을 했다.

    이 대표는 "이상봉 님은 기억력과 문장력이 뛰어났다"며 "그는 유선탄광의 유일한 증언자"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군포로들의 증언을 듣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상봉 님의 증언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설명하고 싶었다"며 "기회가 된다면 국군포로들의 생활을 목격한 북송 재일교포 출신 탈북자들을 수소문해 증언을 듣고 싶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2011년 아들을 낳고 생명 하나하나가 고귀하게 느껴졌다"며 "아들을 안고 있으면 국군포로 어르신들이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대표는 눈물을 삼키면서 "(국군포로 어르신을 볼 때 마다) 아들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국군포로의 어머니를 생각했다"며 "아들을 둔 어미의 책임감으로 취재를 이어갔다"고 털어놨다.